글: 최애역사(最愛歷史)
1901년 11월 7일, 서태후는 "서수(西狩)"를 마치고 북경으로 회궁하는 도중에 이홍장(李鴻章)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같은 날, 그는 의지(懿旨)를 반포하여, 원세개를 직예총독(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에 임명한다. 자신의 권세를 보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열강에 잘보이기 위하여, 그녀는 외교수완과 군사실력을 겸비한 인물에게 직예총독을 맡겨야했다.
당시, 외국세력이 지지하는 개명한 독무(督撫, 총독/순무)로는 두 사람이 있었다: 원세개와 장지동(張之洞). 장지동의 군대는 호북(湖北)에 있고, 만명이 되지 않았다; 원세개의 군대는 산동(山東)에 있으며 근 2만의 군대를 보유했다. 북경에도 가깝고, 장비도 우수하며, 건제도 완비되었다.
그리하여, 대청제일강신(大淸第一疆臣)인 직예총독의 자리는 그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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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가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여, 서태후의 회궁길은 아주 순조로웠다. 직예남부의 폭란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서태후는 원세개에게 "황마괘(黃馬褂)"를 하사한다. 그리고 자금성내에서 말을 탈 수 있는 특권도 부여한다. 그녀는 주변사람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경자년의 그 일로 나는 큰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그것을 기회로 나는 두 명의 충신을 발굴할 수 있었다. 하나는 잠춘훤(岑春煊)이고, 다른 하나는 원세개이다."
원세개가 직예총독을 맡은 6년간(1901-1907), 그는 전전긍긍하며 진직진책(盡職盡責)했다. 청나라조정의 여러가지 혁신적인 정책은 기본적으로 모두 그가 앞장서서 이룬 것이다. 그리하여 직예성은 개혁의 모범성이 되었다. 순경의 창립, 사법의 개량, 교육을 보급, 실업의 흥기로 "일시에 북양신정은 욱일기세로 전국이 모두 우러러보게 되었다." 당연히 원세개가 가장 중시한 개혁은 신군(新軍)의 편련(編練, 편제와 훈련)이었다.
1902년 2월, 독무들이 아직 관망하고 있을 때, 원세개는 직예의 방어를 공고히해야한다는 이유를 들어 현실적으로 가능한 병력훈련방안을 제안한다. 그는 경진(京津, 북경과 천지)의 재해구호금에서 100만냥을 꺼내어 신군을 모집하는 비용으로 쓰고자 한다. 청나라조정이 그의 요청을 비준한 후, 원세개는 즉시 직예에서 장정 6000명을 선발하여 보정(保定)에서 집중적으로 훈련시킨다. 1903년, 원세개는 이를 확대개편하여 북양상비군 좌진(左鎭)으로 하고, 나중에는 육군제이진(陸軍第二鎭)으로 개칭한다.
1903년, 청나라조정은 팔기(八旗) 정예병 3천명을 원세개에게 보내 훈련시킨다. 이들은 경기상비병(京旗常備兵)이다. 나중에 이 군대는 육군제일진(陸軍第一鎭)이 된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원세개는 다시 군대를 확충할 때가 왔다고 여긴다. 그는 상소를 올려, 러일전쟁을 피하기 어렵다. 마땅히 미리 준비하여 북경주위의 근본중지를 엄격히 방어해야 하므로, 이를 위하여 최소한 병력1만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리고 무기도 구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나라조정이 비준한 후, 원세개는 사람을 하남, 산동, 안휘등지로 보내 신병을 모집한다. 그리고 이들이 육군제삼진(陸軍第三鎭)이 된다. 동시에 북양상비군 우진(右鎭)에 인원을 보충하여, 육군제사진(陸軍第四鎭)으로 만든다.
육군제오진(陸軍第五鎭)은 원세개가 산동순무로 있을 때의 무위우군(武威右軍) 선봉대(先鋒隊)를 개편하여 만든다. 육군제육진(陸軍第六鎭)은 비록 가장 늦게 성립되었지만, 원세개가 가장 먼저 편성하여 훈련시킨 신건육군(新建陸軍)이다.
1905년에 이르러, 북양육진(北洋六鎭)이 정식으로 완성된다. 이는 8,9만의 관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훈련이 잘된 무장역량이었다. 그 선배인 상군(湘軍), 회군(淮軍)과 비교하면 북양신군은 지역적인 사적부대가 아니라, 중앙집권색채를 지닌 중앙군이었다. 원세개 개인이 이처럼 방대한 군대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중앙병력훈련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인 1903년 12월 연병처(練兵處)가 정식으로 성립된다. 청나라조정은 황족인 혁광(奕劻)을 총리연병사무대신(總理練兵事務大臣)으로 하고, 원세개를 연병회판대신(練兵會辦大臣)으로, 만주족인 철량(鐵良)을 연병양판대신(練兵襄辦大臣)으로 한다. 그러나, 혁광은 너무 나이가 많았으며 혼용무능했고, 철량은 너무 젊어서, 경험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연병처의 대권은 자연스럽게 원세개에게 돌아간다.
원세개는 연병(병력훈련)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소참(小站)에서 연병할 때, 그는 많은 인재들을 자신의 막부로 끌어들인다. 여기에는 자신의 옛친구와 옛날의 막료들도 포함되어 있고, 천진무비학당(天津武備學堂)의 졸업생과 회군(淮軍) 노장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유학생과 외국인강사도 있었다.
신군을 편성훈련시킬 때, 그는 고의로 막료를 연병처의 각 기구에 채워넣는다. 그는 서세창(徐世昌)을 총제조(總提調)로 추천하고, 단기서(段祺瑞), 풍국장(馮國璋)을 군령사(軍令司)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로 임명하고, 유영경(劉永慶), 육가곡(陸嘉谷)을 군정사(軍政司)의 정사, 부사로 임명했으며, 왕사진(王士珍), 육건장(陸建章)을 군학사(軍學司)의 정사, 부사로 임명했다. 육가곡이 원세개가 산동순무로 있을 때 발탁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그의 연병핵심인물들이었다. 서세창은 원세개와 결의형제를 맺었고, 학식이 뛰어나며, 신중하면서도 임기응변에 능했다. 유영경은 원세개와 같은 고향사람으로 같이 공부한 인물로 그의 훌륭한 조수였다. 단기서, 풍국장, 왕사진은 사람들이 '북양삼걸(北洋三傑)"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이다. 여기에 육건장까지는 모두 천진무비학당을 졸업했고, 이론지식이 풍부하고, 근대군대를 어떻게 훈련시켜야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연병처를 설치한 기간을 계산하면 앞뒤로 4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신군제도는 모두 연병처에서 정하고 시행했다. 각성에서 이를 보고 모두 금과옥조로 삼았다. 그후 약간 늘어나거나 줄어든 것은 있지만, 근본이 세워진 것이고, 결국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 기구를 통하여, 원세개는 군대제도를 정립하고, 전국군대훈련의 용인권, 경비권, 무기제조권등등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권을 집중시킨다.
비록 원세개와 청나라조정은 천하의 병력을 모두 거두고자 했지만, 형세를 보면, 지방분권이 이미 사실로 되어버렸다. 그리고 군대훈련시키는 것이 권력집중보다 중요했다. 그러므로 독무의 권한을 너무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나중에 원세개는 독련공소(督練公所)를 설립할 것을 제기한다. 이는 성급군사기구이고, 연병처에서 독련대신(督練大臣)을 지정하는 것이다. 원래 의도는 지방의 연병대권을 중앙이 회수하는 것이나, 실제로는 여전히 각 독무의 지시를 듣게 된다. 이는 원세개와 청나라조정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위로부터 아래로의 군사개혁을 주도하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지방독무에게 여지를 남겨주고 지방사무에 지나치게 개입하지는 않는 것이다.
청나라의 나머지 성들은 연병업무의 진전이 느렸다. 어떤 곳은 아예 연병하지 않았는데, 중앙정부의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어떤 곳은 연병하고자 했지만, 재정결핍으로 힘들었다. 광동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양광총독 잠춘훤은 7/10의 녹영(綠營)을 없애고, 30여만냥백은을 마련하여, 광동혼성협(廣東混成協) 합계 2000여명을 편성했다. 나중에 수준이 너무 낮아서 결국 도태당하고, 겨우 2개영만 남는다. 신해혁명때까지도 광동신군은 그저 하나의 혼성협 수준이었다.
청나라가 멸망할 때, 36진까지 훈련해서 편성하려던 신군은 겨우 14진만 완성한다. 그리고 원세개가 통제하는 군대는 신군 총병력수의 절반이상이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연병의 성과가 커질수록, 원세개의 권세는 더욱 커졌다. 북양육진의 중요장령은 원세개가 직접 선성하고, 거의 모두 소참 출신이다. 육군제일진이 기병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원세개의 직계부대라고 말할 수 있다. 북양집단은 이미 초보적으로 규모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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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보면, 재정을 정돈하고, 부국강병하려는 개혁들 예를 들어, 왕망의 개제, 왕안석 변법은 모두 국가쇠망을 가져왔다. 그러나, 외적이 사방에서 노리는 '대쟁지세(大爭之世)'에 만일 충분한 재정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일체의 신정은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할 것이다.
연병에는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을까? 1904년, 원세개는 <주관첨연상비신군편(籌款添練常備新軍片)>에 따르면, 북양군의 1진에 1년에 드는 비용은 "정향(正餉) 은100만냥, 잡지출액 20만냥, 영방건조 은21만냥, 말값 4만냥, 군장비기구 15만냥, 무기총탄 약 100만냥"이다. 매진의 년간경비는 약 160만냥이고, 무기총탄까지 합하면 260만냥에 이른다. 1907년, 원세개가 <핵명부박육군제오진향수병무부부절(核明部駁陸軍第五鎭餉數幷無不符折)>에서 토로한 바에 따르면, "육군제오진의 연간필요향은 150여만냥이다."
이같은 거액은 직예성 하나의 재정만으로는 모두 부담할 수 없다.
경자이후, 직예는 연간 80만냥의 배상금도 부담해야 했다. 그리고 외채이자, 이전 교안(敎案)의 배상금도 지급해야 했다. 재정은 이미 붕괴상태였다. 전세(田稅), 관세(關稅), 염세(鹽稅)를 다 쏟아부어 구멍을 메워야 했다. 다행히 전임 직예총독 이홍장이 매관매직으로 1,308만냥의 순직진연(順直賑捐)이 있었다. 이 돈은 원래 중앙정부에 납부해야하는 돈이지만, 원세개가 대부분을 남겨서 배상금과 재건에 썼다. 그리고 100만냥을 신군에 지급한다. "공금유용"같은 수단은 그다지 고명하지 못하다. 그러나 최소한 효과는 있다. 그리고 원세개만이 이처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청나라조정이 그에게 상방보검을 주어, 그를 제국경내에서 가장 강력한 독무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홍장의 유산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만든 양무사업은 기본적으로 성선회(盛宣懷)가 계승했고, 특히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과 전보국(電報局)은 두 개의 캐시카우였다. 원세개가 북양사업을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이들을 수중에 장악해야 했다.
1902년 10월, 성선회의 부친이 병사하고, 관례에 따라 "정우수제(丁憂守制, 우리나라의 삼년상)"해야 했다. 청나라조정은 장익(張翼)을 파견하여 윤선초상국, 전보국 두 국의 업무를 독판(督辦)하게 했고, 관판(官辦)으로 회수했고, '호부주향지용(戶部籌餉之用)'으로 했다. 성선회는 원세개에게 도움을 구한다: "공이 상무를 독판하는 것은 이미 중국을 위해 정해진 방향이다. 공이 계속 유지할 생각이 있다면, 원컨대 그(장익)가 개평(開平)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시고, 공론을 주재해주시기 바랍니다." 장익은 개평석탄광산의 책임자이다. 경자년에 중외합작개평석탄광산합의를 체결했다. 성선회의 말은 겉으로는 장익이 국가의 권리를 팔아먹을까봐 우려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원세개는 이렇게 대답한다: 2국은 북양에서 만들었으니, 북양이 유지해야 한다. 그 말에 숨은 뜻은 둘 다 북양의 공공재산이니, 내가 결정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는 상해로 가서 성선회를 만나, 입으로는 그에게 권한을 내놓으라고 권하지만, 천진으로 돌아온 후에는 윤선초상국, 전보국 2국의 정돈을 요구한다. 성선회는 크게 실망하여, 두 가지 방법으로 원세개에 대항한다.
그는 대외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윤선초상국, 전보국은 '비양(肥壤, 비옥한 땅)'이고, 한양철창(漢陽鐵廠)은 '척토(瘠土, 척박한 토지)'이다. 한양철창의 주주는 모두 윤선초상국, 전보국의 상인들이다. 비양은 빼앗아가고, 척토는 남긴다면 그것은 장기적인 방안이 될 수 없다. 성선회의 의도는 아주 명확하다: 한양철강은 윤선초상국, 전보국 양국의 자금투입이 필요한데, 만일 2국을 거두어가버리면 철창은 그저 외채로 버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외에 성선회는 이런 말도 한다. 만일 반드시 전보국을 관용으로 회수하려면, 반드시 현금을 주주들에게 지급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수완은 총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방법으로 장지동을 국면에 개입시킬 수 있게 되어, 원세개에게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 수법은 원세개에게 돈이 없다는 약점을 확실히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완도 '형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양무기업은 오랫동안 관상합작이었고, 대권은 일찌감치 관에 있었다. 이때는 청나라조정이 권력을 집중하던 때이고, 그저 경영자를 교체하는 일일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원세개의 심복 양사기(楊士琦)가 윤선초상국 독판이 되고, 전보국도 '상본관판(商本官辦)'으로 된다. 북양군은 매년 윤선초상국, 전보국 2국에서 수십만냥의 돈을 가져갔다.
다른 한편으로, 원세개는 개평석탄광산을 눈독들인다. 그는 영국에 성명을 발표하여 개평광산을 영국회사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3차례에 걸쳐 장익을 탄핵한다. 압박을 받은 장익은 개평공사의 영국대표와 합의를 이루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개평석탄광산은 영국회사라는 전제하에서 중국의 국가주권과 지방정부의 관할권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세개는 전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장익을 영국법원으로 보내 영국인과 대질하도록 한 다음, 그가 떠난 틈을 타서, 즉시 영국인과 협의하여 개평석탄광산에 대한 직예의 광산권을 쟁취한다.
1907년, 원세개는 심복 주학희(周學熙)를 보내 "중국의 자본으로, 중국의 인력을 써서 또 다른 새로운 광산을 개발한다" 그는 난주(灤州)석탄공사를 만들어 개평광산과 경쟁하게 한다. 동시에 그는 광업권을 회수한다는 명목으로, 지방관리와 벨기에상인간에 합작운영하던 임성광무국(臨城鑛務國)을 통재한다. 그리고 원래 이홍장이 통제하던 산동 봉현(峰縣)의 중흥(中興)광산도 북양의 휘하로 거두어들인다. 이들 석탄광산은 매년 영업액에서 5%를 북양군비로 배정하여 사용했다.
주목할 점은 주학희의 부친 주복(周馥)은 이홍장이 직예에 있을 때의 심복이었다. 나중에 원세개와는 사돈관계를 맺는다. 주학희의 능력과 가족은 직예에서 경영하고, 원세개는 광산기업, 은행등을 열어 모두 순조롭게 자금을 벌어들인다.
그렇기는 해도 기업의 이윤은 너무 적어서, 근본적으로 군대의 거대한 자금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자금원이 필요했다.
1902년 8월, 원세개는 육가곡을 보내 주관총국(籌款總局)을 두어, 전문적으로 자금을 모은다. 구체적인 방법은 두 가지이다: 중간에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타격하고, 세금비용을 추가로 징수한다. 전자는 매년 30만냥의 돈을 더 벌어들일 수 있었고, 후자는 소금가격인상, 토약, 담배, 술, 차, 중개세등을 거두고 매년 세율을 올렸다. 그중에는 담배,술세금이 가장 컸다. 금액은 80만냥에 달한다. 이 돈은 나중에 직접 신군을 편성 훈련하는데 썼다.
1903년, 원세개는 녹영을 철폐하고, 남은 20만냥을 아낀다. 다시 직예의 회군과 연군을 철폐하고, 80만냥을 아낀다.
1904년, 원세개는 매관매직으로 200만냥을 만든다.
1905년, 원세개는 100만냥백은을 담보로 하여, 480만냥의 공채발행을 할 것을 주청드린다. 실제로 대부분은 외국은행에서의 차입이다. 그중 일본정금은행(日本正金銀行)에서 300만냥을 빌린다. 나머지는 초상국과 전보국이 떠안았다. 이 돈은 거의 모두 연병에 쓰인다. "연이어 5진, 6진 및 13협의 모집경비, 군수물자, 군영의 토지가격, 공임, 말, 차량가치 모두 은448만 2260여냥이고 보관금 31만6630여냥"이다. 비교하자면 양광총독 잠춘훤이 100만양의 외채를 빌려서 광서군의 군비로 지급하고자 했을 때, 조정은 그 제안을 부결시키고, 매관매직으로 자금을 충당하도록 한다.
그러나, 모집자금은 여전히 군비지출에 부족했다. 직예총독으로서, 원세개의 처지와 해법은 기실 다른 독무들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만일 조정에서 그가 하려는 조치를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직예의 신정은 '욱일승천'하는 정도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북양군의 진정한 자금조달원은 여전히 조정이었다.
1905년을 예로 들면, 북양육진은 모두 8,995,200냥이 필요했다. 호부에서 540만냥을 내놓고, 각성에서 3,595,200냥을 부담했다. 호부의 돈은 기실 각 성에서 징수해온 것이다. 그 돈도 결국은 지방에서 온 것이다. 학자 주육민(周育民)의 고증에 따르면, 북양군비의 78.3%는 각 성에서 제공한 것이다.
중국의 대부분 성은 자신의 신식, 구식군대를 유지하는 외에 자신의 돈으로 북양군을 지원해야 했다. 원세개와 관계가 친밀한 총독 예를 들어,주복, 양사양(楊士驤), 단방(端方)등은 북양군에 지금지원하는 것을 적극 도왔다. 주복이 관할하던 산동은 1903, 1904년 2년간 직예포정사에 89만냥을 보낸다. 그리고 20여만냥의 조절은(漕折銀)을 직예양향국(直隸糧餉局)으로 보낸다. 사천총독 석량(錫良)은 비록 원세개와의 관계가 그저그랬지만, 1906년에 54만냥을 내놓는다. 할당받은 금액보다 14만냥이나 많았다. 어떤 성은 비교적 항거하고, 지급을 지연시키거나, 일부만 직브했다. 양광총독 위광도(魏光燾)는 이렇게 불평했다: 강소의 신군을 유지하는데만도 이미 힘이 들다. 만일 더 이상 부담하라고 하면 백성이 더욱 빈곤해져서 ,회당에 가입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군비의 부족분은 기본적으로 호부에서 메워주었다.
온나라의 힘을 기울여 1개성의 병력을 훈련시켰고, 강력한 북양군을 만들어 냈다. 장교들에 있어서는 원세개와 그의 심복들이 대권을 장악하고 있는한 그는 귀인이 될 수 있었고, 병사들은 원세개가 급여만 제때 지급해주면 그가 바로 의식부모였다. 그들이 충성하는 것이 원세개 개인인지, 아니면 그의 배후의 지위와 권세인지는 모호했다. 당시의 정세로 보면 다른 사람이 이 부대를 지휘하기는 어려웠다. 거의 '원세개가 아니면 안된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원세개가 욱일승천할 때, 전체 제국은 가라앉고 있었다. 중앙정부는 민심을 잃고, 독무는 겨우 버티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북양집단이 강력한 실력으로 중앙정부를 장악하면서, 중국은 군벌사회로 들어가고, 사람들은 암흑의 근대화가 진행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든지 효과적으로 전국의 자금을 쥐어짜낼 수 있다면, 그는 현대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더 많은 재정수입을 거둘 것이고, 그는 바로 경쟁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천년간 이어진 독재'의 마지막 청제국 10년동안 누가 좀더 사나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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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격패시킨다. 이는 당시 중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이는 '입헌'이 독재를 이긴 것이다. 만일 이전에 사람들은 일본이 섬나라이고, 발전형세가 대륙과는 다르기 때문에, 일본의 개혁의 길은 모방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했다면, 이번 러일전쟁의 승리는 '대이무당(大而無當)'의 러시아가 중국이 배워야할 대상에서 배제되고, 동문동종(同文同種)의 일본이 진보의 모범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전쟁의 결과가 한 가지 사실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황인종이 반드시 백인종보다 약하지 않다. 아시아의 군대라도 훈련만 제대로 하면, 서방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양군은 그런 수준에 도달했을까?
원세개가 소참에서 연병할 때 참고한 것은 독일의 군사제도였다. 북양군을 편성하고 훈련한 것은 주로 일본군대를 본받았다. 기실 일본군제도 독일을 본받은 것이다. 양자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북양군진의 구조는 아주 완비되어 있었다. 하나의 진 아래에는 두 개의 보병협(步兵協, 보병여단에 상당), 1개의 마대표(馬隊標), 1개의 포대표(砲隊標, 포병연대에 상당), 1개의 공정영(工程營, 공병대대에 상당), 1개의 치중영(輜重營, 운송대대)가 있다. 매 협의 아래에는 2개의 표(연대에 상당)가 있고, 매 표의 아래에는 3개의 영(대대에 상당)이 있으며, 매영은 4대(隊, 중대에 상당), 매대는 3배(排, 소대에 상당), 매배는 3붕(棚, 분대에 상당)가 있고, 1개붕은 14명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다. 인원을 꽉 채운 진의 병력은 개략 12,000명가량이다.
양무운동이 개시된 때로부터, 중국인은 무기장비의 갱신을 군사개혁의 최우선임무로 보았다. 특히 자신이 제조한 총포와 탄약의 능력을 중시했다. 그러나, 기기제조, 무기생산은 과학기술, 자금, 경험등 요소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일거에 모두 이룰 수는 없었다. 군수기업을 여러 해동안 경영하면서, 청나라조정은 기본적으로 겨우 호북총포창만이 제대로 가동되었다. 1904년, 장지동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호북공장은 현제 매일 50정의 총을 생산한다. 기계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며 더 이상 만들 수 없다. 1년에 겨우 15000정을 생산한다. 이는 실로 각 성의 필요에 부족한 형편이다." 이를 보면, 중국의 군수공업은 신군의 발전을 받쳐주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들 수 없으면, 외국에서 사와야 한다. 원세개는 무기구매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산동에서 연병할 때, 그는 군대의 무기장비를 '서양화'했다. 포병장비는 독일의 군수산업의 거두 Krupp이 생산한 57밀리 과산포(過山砲)와 75밀리 육로포(陸路砲)를 갖추었고, 보병장비는 오스트리아의 Mannlicher보병소총을 갖추었고, 기병장비는 Mannlicher카빈소총과 전도(戰刀)였다. 장교의 장비는 6연발좌륜권총으로 모두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무기들이었다.
다만, 육군의 무기는 통일된 표준이 없었다. 북양군제일진을 예로 들면, 포병은 일본에서 제조한 야전포, 독일의 Krupp의 과산포와 Gruessen의 야전포를 갖추고 있어, 모델이 가지각색이어서 유지비용과 조달부담이 컸다. 그리하여 전투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외에 재정부족으로 탄약은 기본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청일전쟁이후,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기장비가 거의 차이없는 상황하에서, 청군은 왜 참패했을까?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온다. 관병의 자질이다. 전통군대는 자질이 낮은 것으로 유명했다. 모집된 자들은 기본적으로 무뢰한, 죄인, 아편쟁이, 백수들이었다. 사회는 군인을 멸시했다. 그리하여 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이 아니면 군대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군을 훈련시키려면 반드시 '새로운 사람'을 뽑아야 했던 것이다.
병사의 자질을 보장하기 위해, 북양군의 모병은 매우 엄격했다. 대체로 다음의 몇 가지 요구사항이 있었다: 나이는 20에서 25세 사이, 키는 4척8촌이상(남방인은 2촌을 줄여줌), 백근 무게의 물건을 들 수있어야 함. 1시간에 20리이상을 뛰어야 함. 내력이 분명하고, 장애, 흡연, 강간전과가 있으면 받지 않음.
당시 전사회는 모두 상무정신을 부르짖고, 군인의 이미지를 새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견실한 대우의 기초 위에서 가능했다. 간단히 말해서, 군관의 지위가 문관이나 사신보다 낮지 않아야 했고, 병사의 생활도 농민이나 노동자들보다 못하지 않아야했다.
1909년에 반포한 무관직대조표에서 무관의 지위는 이미 문관보다 올라갔다. 도원(道員, 정4품)은 겨우 관대(管帶, 영장, 대대장)과 같은 등급이었다. 최하급의 열병(하사)도 "종구품"의 직위였다. 관대의 연수입은 1200냥이고, 매월 공비 140냥을 따로 주었다. 당시 지부(知府)의 연수입은 1,531냥이었다. 진통(鎭統, 사단장)의 연수입 4,800냥으로 포정사(布政使)의 연수입 5,200냥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사병의 급여는 4냥5전으로 수입이 대체로 사회중등수준이었고, 공농과 관상의 중간이었다. 동시에 집안에서는 세금을 감해주고, 친척이 소송에 걸리면 정부에서 보호해주었다. 그리고 사병은 복무연한이 있었다. 상비3년, 속비3년, 후비4년, 생활에 희망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군대는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았고, 방대한 역량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원세개는 사람들이 군대에 들어오도록 힘껏 격려했고, <행군가>도 지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아들로서 마땅히 효도를 다해야 하고, 신하로서 마땅히 충성을 다해야 한다. 조정은 돈을 내고 국채를 발행하여, 큰 돈을 들여서 병사를 기르고 있다. 1명의 병사가 먹고 입는 것에 110냥이고, 육품관의 녹봉과 같다. 만일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하지 않으면, 천지귀신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자고로 장상(將相)은 군인들 중에서 만히 나왔다. 군인이 되는 것이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라고 더이상 생각지 말라."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오래된 외나무다리(관리가 되는)가 무너졌다. 다만 중국사회는 여전히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다리가 끊어진 곳에는 금방 돈과 권력으로 새로운 길이 생긴다. 군인은 새롭게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이었고, 주류사회에 성공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인 것이다.
4
1905년 8월 북양육진이 막 완성된지 얼마지나지 않아, 연병처가 상소를 하나 올린다: 북양군은 회합하여 훈련하고, 공격전술을 실습하며 위세를 보여야 한다. 청나라조정은 윤허한다. 원세개는 연합훈련을 준비한다. 그는 북양육진의 3진, 4진의 전체 그리고 1진, 2진, 5진, 6진의 일부를 뽑아 합계 45,002명의 관병을 남, 북 양군으로 나누어, 하간(河間)일대에서 대항전을 펼치게 한다.
연습방법은 남군이 공격, 북군이 수비였다. 9월 24일, 양군은 대치장소에 도착하고, 훈련이 정식으로 개시된다. 25일, 양군의 기병이 선봉에 서고, 보병이 엄호하면서, 태평장(太平莊)에서 만나 상호 공격한다. 26일 포대가 나와서, 포탄이 날리는 와중에 보벼잉 돌격한다. 전선이 가까워지면서 거의 백병전이 된다. 27일, 양군의 주력이 모두 전투에 투입된다. 격전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열병처(閱兵處)에서 정전령(停戰令)을 내린다. 28일 남북 양군은 열병장에 집결하여 열병식을 거행한다.
하간의 연합훈련이 끝난 후, 여론이 비등한다. 중국의 군인은 신체가 건장하고, 기운이 넘쳤다. 옛날의 병비(兵痞)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들 젊은이들의 몸에는 참신한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상무주의. 더 이상 문관의 제약을 받지 않고, 더 이상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 군대가 철혈로 민족의 미래를 밝혀주기를 기대했다.
훈련을 관람한 영국장교 포웰은 신군에 대해 깜짝 놀란다: "몇년전에 만일 3만명의 중국군대가 제국의 어느 지방에 있었따면 그들은 굶주림에 지쳐서 약탈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속속 고향을 떠나 피난했고, 심지어 부녀자들은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기도 했다. " 그러나, 지금 훈련하는 부대는 기율이 엄명하고, 물건을 사면 돈을 지급했고, 백성들도 만족하고 잇다. 외국인의 관찰에는 이런 점도 있었다: 사병의 체격이 건장하고 튼튼했으며, 사기도 아주 높았다. 단체정신과 애국주의를 발전시키는 모습이 있었고,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군인이 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1906년 청나라조정은 다시 한번 훈련을 진행한다. 장소는 창덕(彰德, 하남 안양)이었다. 이번 훈련은 더욱 개방적이었고, 국내외 신문기자들의 현장취재도 허락했다. 그리고 각성에서 사람을 보내 훈련을 참관하도록 독려했다. 동시에 호북신군과 하남신군도 참여한다. 남북신군의 최초의 만남에서 북양군은 군용(軍容), 장비, 사기에서 호북신군에 완승을 거둔다.
훈련과정에서 북양군은 유례없는 전투력을 나타낸다. 먼저, 전선이 수십리에 달했는데, 구부대라면 지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겠지만, 북양군은 팔을 쓰는 것처럼 지휘가 잘 되었다. 다음으로, 보병이 돌진하고, 포병이 엄호하고, 마대가 정찰하고, 공정대는 다리를 놓았다. 각 병종간의 협력이 긴밀했다. 그 다음으로, 철로, 전보, 전차, 기구의 사용은 더더욱 군대의 전문성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군기도 혼란한 와중에 엄명했다.
훈련에 참가한 풍옥상(馮玉祥)은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소재하고 있던 혼성협의 자체훈련에서, "하나가 좌회전을 하면서, 양군이 방향이 바뀌었다 남군이 북군이 되고, 북군이 남군이 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단기서가 그 모습을 보고 긴급히 호각을 불어, 장교들에게 욕을 하고, 양군에게 각각 20리를 물러나게 한 다음 다시 훈련했다. 저녁에 행군시에 큰 비를 만났다. 단기서는 부대에 비를 맞으면서 행군하도록 명령했다. "당시에 원래 오륙십근이던 텐트는 큰 비에 젖어 백여근의 무게가 되었다...대다가 고비점을 지나 정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오후4시였다. 모든 사람이 진흙투성이었고 낭패한 모습이었다. 이때도 우리의 군기는 흩어지지 않았다. 참모인원이 도착했을 때, 형제들은 모두 총을 받들고 비를 맞으면서 꼿꼿이 서 있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단기서는 백성들에게 병사들이 교란행위를 한 적이 있는지를 묻기도 했다.
이번 연습에 관하여 외국에서도 모두 호평이었다. 단지 일본의 신문에서만 평가가 좋지 못했다: "형식은 볼만했으나, 정신은 부족했다. 국민교육이 없는 때문이다." 어느 정도 급소를 찌른 말이기도 하다.
북양군은 기껏해야 진흙밭에서 한 발을 뺀 수준이었다. 구군대의 나쁜 습관은 잠시 억눌려 있을 뿐이다. 만일 공급이 제대도 되지 않으면 백성을 괴롭히는 현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동시에 정계의 분위기도 군대에 전해졌다. 만주족엘리트들은 군대의 권한을 놓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인독무의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원세개를 제거하고자 하게 된다.
창덕훈련이 끝난 후, 청나라조정은 즉시 관제개혁방안을 공표한다. 육군부(陸軍部)를 성립하고, 철량을 상서(尙書)로 하고, 두 명의 시랑(侍郞)도 모두 만주족이 맡는다. 원세개는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고 보고 회판연병사무대신등 8가지 겸직을 모두 사임하고, 북양군의 지휘권도 내놓는다.
원세개의 차남 원극문(袁克文)이 이때 부친에게 건의한다. 군권을 내놓기 전에, 북양의 여러 장령들과 함께 경사로 쳐들어가서 청군측하고 철량등 간사한 무리를 베어버립시다. 만일 서태후가 너무 심하게 몰아부치면 아예 천심과 민의를 받들어 만주정부를 쫓아내고, 일거에 나라를 차지합시다.
원세개는 승산이 크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북양군을 비록 그가 만들었찌만, 완전히 그의 사적인 군대는 아니었다. 그들이 '희망찬 앞날'을 포기하도록 하고, 자신과 청나라조정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반드시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원극문을 크게 질책한다: "어린 녀석이 알지도 못하면서 망녕된 말을 하는구나. 멸족을 당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나보다." 그리고 원극문을 내실에 몇달간 구금한다. 그가 불손한 말을 해서 큰 화를 입게 될 것을 우려해서이다.
청나라말기의 마지막 몇년간, 신군이 커지면서 백성들의 부담은 갈수록 커졌고, 소란도 끊이지 않았다. 그들을 진압하러 오는 것도 신군이었다. 이는 민중의 원한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군의 재정은 갈수록 부족해졌고, 관료기가 군대에도 침투해 들어간다. 관병의 사기는 저하했고, 군인의 이미지는 다시 나빠진다.
아이러히한 점은 청나라가 결국은 신군에 의해 멸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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