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중국외교: 일준(一蠢), 이만(二蠻), 삼사(三詐), 사파(四怕)

중은우시 2024. 8. 28. 12:11

글: 북유독서(北遊讀書)

청나라말기의 저명한 회교가 곽숭도(郭嵩濤)는 일찌기 12자로 만청외교(晩淸外交)를 표현한 바 있다:

일미준(一味蠢), 일미만(一味蠻), 일미사(一味詐), 일미파(一味怕)

당시는 멍청(愚蠢)하기 때문에, 야만적으로 행동했고(行蠻), 야만적인 방식이 통하지 않으면 속임수를 쓰고, 속임수도 통하지 않으면 무릎을 꿇고 빈다.

"천조상국(天朝上國)"의 우월감에서 벗어나, "한간(漢奸)"으로 욕먹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곽숭도는 1818년 4월 11일에 태어났다. 1840년 아편전쟁때, 20여세의 곽숭도는 항주(杭州)에 있었고, 직접 대청이 영국군의 견선이포(堅船利砲)에 형편없이 무너져 패배하는 것을 목도했다. 영국인에 대해 연구를 해본 후에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이들은 아주 우수하고, 아주 문명적이다. 중국이 잘 배워야할 가치가 있다!

이때 다른 사대부들은 여전히 영국을 금수같은 오랑캐(蠻夷)라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임칙서(林則徐)마저도 영국인은 다리도 구부릴줄 모른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후, 곽숭도는 마침내 과거시험을 통하여 관료의 길로 들어선다. 이때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다. 곽숭도는 사방에서 사람을 모으고, 증국번(曾國藩), 좌종당(左宗棠)의 사람들을 설득하여 상군(湘軍)을 만들게 했다. 자신도 때로는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고, 때로는 군량을 조달했다. 그는 증국번의 부탁을 받고 강절(江浙, 강소 절강)일대에서 군량을 모으고, 상해에 갔을 때, 외국인들과 직접 접촉한다.

그때의 상해는 곽숭도가 보기에 사상유례없던 "세외도원(世外桃源)"이었다. 영국인은 이미 이곳에 정착한지 여러 해가 되었고, 도로는 "매우 넓었다" 그리고 서양주택은 크고 밝았다. 그가 웅장하면서도 따스함이 있는 프랑스영사관과 영국영사관에 갔을 때 사방을 깨끗한 유리창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본다. 그때 서방근대문명을 느끼고 감탄하며 말한다: "세치정묘(細致精妙)함은 중국이 할 수 없는 것이구나!"

외국인과 접촉하는데 그는 편안하다고 느끼게 된다. 영국영사는 그를 보자마자, 먼저 모자를 벗어 인사하고, 그후 악수하며 안부를 물었다. 성이 Smith인 젊은이는 중국어를 잘 했다. 그는 곽숭도를 데리고 함정을 참관하게 하면서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그 동안 게속하여 미소를 지었고, 행동거지는 우아했다.

그는 한번도 이렇게 예의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영사관내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큰 소리로 떠들고, 용모는 험악하며, 위압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분명하게 대비되었다.

곽숭도는 포도주도 마신다. "술맛이 달고 진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버터를 바른 빵도 먹는다. 그는 "달고 기름지며 입맛에 맞는다". 이번에 영사관방문에서 그는 외국의 견선이포를 보았을 뿐아니라, 그들은 직책이 나뉘어져 있고,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배후의 인문교양도 엿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 것이다.

이는 당시 다른 중국인들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그들은 여전히 '천조상국'의 우월감에 머물러 있었고, 외국인을 멸시했다. 더더구나 외국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짐승이고 오랑캐라고 하면서.

곽숭도가 이렇게 외국인을 칭찬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역천(逆天)이고 "한간(매국노)"로 욕먹을 짓이다.

그의 동생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은 속에 있는 것을 너무 솔직하게 말하면 왕왕 다른 사람이 불편할 수 있다." 이홍장도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악을 너무 미워하고, 말은 너무 빨리 한다." 그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양무를 얘기하지 못하는데 나는 굳이 얘기했다. 설사 전체 천하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나를 욕하더라도 나는 얘기해야겠다. 중국이 대외대방으로 가야 하고,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성공적으로 중외분쟁을 해결한 것은 그가 중국에서 최초의 인물이다.

1860년, 곽숭도는 중앙으로 가서 함풍제에게 중용된다. 천자의 중신이 된 것이다. 이때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곽숭도는 승거린친(僧格林沁)과 함께 천진(天津)을 방어하러 나선다. 승거린친은 몽골귀족이고, 맹장이다. 침범해들어온 영국프랑스연합군에 대하여 승거린친은 "죽인다"는 방침뿐이었다.

그러나 곽숭도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프랑스는 이미 과거에 재물을 약탈하던 오랑캐와 다르다고 여겼고, 그들이 중국에 온 목적은 통상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국도 협상을 통하여, 서방과 상업무역관계를 건립하고,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전쟁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곽숭도의 견해는 승거린친과 모순되었다. 그리고 곽숭도는 청렴하여, 군영내에서 부정부패를 저지러그나, 소집단을 만들지 않아서, 상하의 반감과 배척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사직하고 호남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책을 읽으면서 농사를 짓는다.

 

2년후, 이홍장의 초청으로 곽숭도는 다시 소송양저도(蘇松糧儲道)의 관직을 맡는다. 다음 해애는 서리광동순무(署理廣東巡撫)가 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대리광동성장이다. 그는 한 지방을 책임지는 지방장관이 된 것이다.

광동에서 대외관계를 처리하면서, 곽숭도는 사상유례없는 일을 하나 행한다. 국제법을 인용하여, 홍콩으로 도망친 태평군의 우두머리를 영국으로부터 인도받아온 것이다. 그는 또한 영국당국에 공문을 보내어 해외로 유괴납치된 중국인을 돌려달라고 했고, 영국인이 해남에서 광산을 허가없이 개발하는 것도 막았다.

국제법인 인용하여 평화롭고 성공적으로 대외분쟁을 해결한 것은 그가 첫번째 인물이다. 협상으로 전쟁을 대체하고, 평화롭게 외교사무를 처리한다. 이것이 그의 대외방침이었다.

"사이장기이제이(師夷長技以制夷)"의 괴담에서 벗어나 더욱 심층적인 것을 보다.

1875년, 마가리(Augustus Raymond Margary)사건(영국영사관직원 마가리가 운남에서 피살된 사건)이 발생한다. 영국은 고위관료를 파견하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공사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한다. 조정에서는 양무를 잘 아는 곽숭도를 떠올린다. 그때 영국으로 출장하는 것은 그다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한간(매국노)로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고향사람들은 더욱 과격하게 행동한다. 곽숭도가 지은 상림사(上林寺)를 불지르고, 곽숭도의 집도 부숴버리겠다고 말한다.

나이가 이미 60에 이른 곽숭도는 2만리 떨어진 영국으로 간다. 영국에 도착한 후, 그는 그곳의 정치, 경제, 문화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아보았고, 의회의 변론도 참관하며, 가극연출도 구경한다. 그리고 자신의 부인으로 하여금 집안에서 party를 열게 하여 각게의 명사들을 초대하고, 영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그는 외국인들 앞에서 불비불항(不卑不亢, 교만하지도 비굴하지오 않음)하며, 완전히 국제법에 따라 외교사무를 처리했고, 영국상하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더욱 귀한 점은 그가 "사이장기이제이(오랑캐의 뛰어난 기술을 배워서 오랑캐를 이기자)"는 괴담에서 벗어나, 서양의 소위 장기인 견선이포의 배후에는 더욱 심층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서양의 정치종교, 제조는 모두 학문에서 나왔다!" 곽숭도는 옥스포드대학을 방문했을 때, 영국문명의 배후에는 학술이라는 원동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 나라의 기술과 일은 갈수록 뛰어난데, 그것은 학문사고에서 얻어낸 것이다"

곽숭도는 작은 노트에 보고 들고, 생각하고 고민한 것을 기록했다. 아편전쟁에서부터 이때까지 30년이 흘렀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고, 천조상국의 우월감에 빠져 있었다.

부사(副使)인 유석홍(劉錫鴻)은 기회를 잡아 국내보수파들을 끌어들여 함께 곽숭도를 탄핵한다:

첫째, 서양의 포대를 참관했을 때, 날씨가 추워서 곽숭도는 서양의 의복을 입었는데, 그는 얼어죽더라도 서양인의 의복은 입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둘째, 곽숭도는 브라질국왕을 만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서, 당당한 천조의 체면을 떨어뜨렸다.

셋째, 음악청에 갔을 때, 서양인을 따라서 음악연주목록을 보았다. 이는 체통을 잃는 일이다.

결국 곽숭도는 스스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않는다.

그는 비록 사회에 대해 비관적이었지만, 그 자신에 대하여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죽기 전에 쓴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유전백대천령후(流傳百代千齡後)

정식인간유차인(定識人間有此人)

백대 천년이 흐른 후에

분명 인간중에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시대를 앞서갔고, 후대인들은 분명히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91년, 곽숭도는 장사(長沙)에서 사망하니 향년 73세이다.

친구인 이홍장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그를 위해 '입전(立傳)'하고,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곽숭도는 서양에 사신으로 나가, 그가 쓴 서적은 외부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시호를 추증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 백년이 흘렀다. 대청의 궤멸을 되돌아보면, 바로 곽숭도가 말한 12글자이다: 일미준, 일미만, 일미사, 일미파.

중국역사상 곽숭도처럼 새로운 '세계관'을 제공하고, 새로운 문화적 시야를 연 사람은 실로 너무 적었다. 그와 같은 사람이 설사 나타나더라도, 왕왕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적대시당한다. 왜냐하면 그가 제공하는 것은 기성관념과 기설질서와 충돌되는 사실과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초초함과 불안감을 준다.

곽숭도를 이해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문명이 근대에 어떤 곤경에 처해 있었는지를 의미하고, 우리 자신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 상흔을 직시하는 것이다. 역사는 기실 우연한 일들이 연결된 것이지, 순수한 숙명의 과정은 아니다. 오직 역사의 우연성을 보아야 우리는 역사를 반성할 수 있고, 역사의 복잡함과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으며, 역사와 우리 자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