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경제학 관점에서의 표준(標準)과 기준(基準)

중은우시 2024. 8. 13. 00:41

글: 참사오대(饞師五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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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이래로 인류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다툼이 집단싸움으로 발전하고, 다시 세계대전으로 발전한다.

인터넷이 나온 후에는 원래 정보유통이 순조로우면 서로간의 간격이나 오해가 사라져서, 인류간의 우의가 더욱 증진되고, 서로 아끼고 사로 사랑하는 인류운명공동체를 건립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다툼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왕징 북쪽의 강변에서 할일없이 심심한 프로그래머와 밴쿠버의 단풍나무 아래 그늘에서 시원함을 만끽하는 해외의 애국자가 신나게 싸우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무슨 원인으로든 싸울 수 있다. 거기에는 표준과 기준이 없다는 것이 중요한 원인중 하나이다.

오늘은 표준과 기준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표준과 기분이 있으면 일부 소음은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길 바란다.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싸우는 쌍방은 표준도 없고 기준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있다면 아마 싸우지 않을지도 모른다.

2

사람이 좋은지 나쁜지, 뛰어난지 아닌지, 특히 저명한 인물을 평가하는 경우가 항간에서 가장 많이 논쟁이 일어나는 이슈이다.

너는 영웅이라고 여기는데, 다른 사람은 깡패라고 여긴다. 어떤 시기에는 영웅이라 여겼는데, 다른 시기에는 정반대이다. 한 민족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다른 민족은 나쁜 놈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표준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시기마다 표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같은 사람에 대하여 서로 다른 평가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표준을 정해보았다:

한 사람이 기여와 소득이 같으면, 일한 만큼 돈을 가져가면, 손해도 보지 않고 이익도 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보통사람이다.

한 사람이 기여한 것이 소득보다 많으면 좋은 사람이다. 즉 일은 더 많이 하고 가져가는 것은 더 적었다면 더 좋다. 모택동이 한 말처럼, 전혀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이며, 전혀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기여만 하고 보답은 없다면 그것은 고상한 사람이고, 영웅이다. 예를 들면 레이펑(雷峰)동지같은 사람이다.

한 사람이 기여한 것보다 소득이 많으면, 기여는 많이 하지 않고 심지어 전혀 일도 하지 않고 얻어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나쁜 사람이다.

이 표준은 보편성이 있을까? 내 생각에 있을 것같다.

예를 들어, 세계의 각 인민은 왜 이구동성으로 모친이 위대하다고 찬양할까?

왜냐하면, 한 가정에서 모친은 항상 기여하는 것은 가장 많으면서, 가져가는 것은 가장 적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잔다. 일은 가장 많이 하지만, 먹는 것은 가장 적고, 가장 못하며, 가장 늦다. 가정과 저녀에 대하여 부친도 기여와 노동을 한다. 그러나 모친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온갖 문장으로 모친을 찬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모친은 하늘아래 자녀들을 위하여 가장 많이 희생하고 가장 적게 보답을 챙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혹은 사람들이 모친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경제적인 시각이다. 그저 가족의 정이라는 공리공담이 아니라. 나아가, 모친의 사람이 큰 것은 바로 자녀에 대한 희생에서 댓가를 바라지도 않고, 비용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3

이상에서 말한 것은 통상적인 경우이다. 완전히 경제적인 각도에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정의한 것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에 따옴표를 붙인 이유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여와 소득중 어느 것이 더 많은지를 척도로 하여 사람을 평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통상적인 경우가 있으면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라 함은 한 사람이 타인 혹은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때 내놓은 것은 생명인데, 얻는 것은 무엇일까? 생명을 잃는 것과는 그 무엇도 나란히 놓고 얘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지고무상의 것이고, 한번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경제적인 척도로 형량한다면, 그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수량의 또 다른 등급이 있다. 무한. 기여하는 것은 무한하고 얻는 것은 유한하다. 유한을 무한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류중의 대영웅이다. 레이펑이나 서방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람이다.

상대적으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친다. 그것은 바로 십악불사의 대악인이다. 그가 얻는 것은 단지 이익이다. 아마도 권력의 보좌일 수도 있고, 개세의 명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빼앗기는 것은 무한히 고귀한 생명이다.

이런 류의 사람은 그 자신이 보기에 아주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표준대로라면 완전히 악마이다.

4

표준이 있으면, 사람의 우열을 평가하기도 더 쉬워진다.

제1류의 영웅은 분명 세계를 위해 탁월한 이론과 위대한 발명을 한 과학자, 발명가와 엔지니어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전기, 엔진, 발전기의 발명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복지를 가져다 주었고, 거의 무한하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것은 유한하다. 만일 특허제도가 없었더라면, 그들의 소득은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비행기의 발명을 보자. 오늘날 세계는 지구촌이 되었다. 헝가리를 가는데 새벽에 출발하면 정오에 프라하의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풍경을 감상하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위대한 발명가 라이트형제덕분이다. 그들은 무한한 복지를 인류에게 주었다. 그리고 얻어간 것은 형편없이 적다.

가장 나쁜 사람은 누구일까? 독재자이다.

모든 독재자는 내놓는 것이 유한하지만 얻어가는 것은 무한하다. 무한은 두 가지 측면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황제는 무한한 권력으로 이익을 추구하며, '갖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마치 건륭제가 매카트니에게 써준 서신에서 처럼: '짐은 갖지 않은 것이 없다.' 그건 허풍이 아니다. 건륭은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화신의 그 재산도 역시 건륭의 것이다. 건륭제가 마음에 드는지 안드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가지고 싶은지 아닌지가 문제일 뿐이다. 그 뿐이다.

둘은 독재자는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생명은 가치가 무한하다. 한 사람의 생명을 잃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헤아릴 수가 없다. 하물며, 황제가 희생시키는 생명은 통상 수천이고 심지어 천만에 이른다.

예를 들어 징기스칸을 보자. 징기스칸은 일생동안 47개의 유라시아국가를 멸망시키고, 700여민족을 정복한다. 그리하여 전세계에서 근 2억명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은 피정복자의 면전에서 그의 처와 딸을 간음하는 것이다. 신부의 초야권도 반드시 점령자에게 바쳐야 한다. 그가 침략하고 도살한 민족들은 그를 피를 좋아하는 마귀로 본다. 오로지 징기스칸 및 그의 자손들에게 4등인으로 취급당한 모민족만이 자랑스럽게 그를 '일대천교(一代天驕)'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재자를 숭배하는 민족은 저능아이다. 독재자에게 찬가를 부르는 사람, 집단과 조직은 사악하다. 내가 경요(瓊瑤)아줌마를 혐오하는 것은 아무런 한계선도 없이 대청왕조와 건륭제를 위해 도지말분(塗脂抹粉)해주었기 때문이다.

5

표준은 보편적인 것이다. 시간, 공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

기준은 다르다. 왜냐하면 참조하는 대상이 다르면 달라진다. 심지어 상반되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표준은 절대적인 것이라면,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제왕을 예로 들어보자. 위의 표준대로라면 제왕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분식된 범죄꾼"이다. 제왕에 대하여 나는 본토(糞土)처럼 본다. 그러나, 제왕중에도 구분은 있다. 잔혹하고 인성이 없는 자도 있다. 예를 들면 명나라때의 주씨들이다. 관후인자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송왕조의 조씨들이다. 특히 북송. 말때문에 주살당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명나라때 십족을 주살한 것이나, 청나라때의 문자옥, 문혁시기의 지식계층에 대한 탄압과 비교하면 몇배나 관후했던가.

그러므로, 한 사람을 평가하려면, 우리는 표준으로 평가할지, 기준으로 평가할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스포츠경기의 선발표준을 가지고 설명하면 더욱 쉽게 이해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올림픽에 참가하는데, 100미터를 반드시 10초이내에 들어야 한다면, 어떤 나라에서는 한 명도 그 표준내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는 올림픽 표준으로 말하자면, 어떤 지방에는 한명도 '좋은 사람'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표준을 적용하지 않고, 상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어느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2명을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한다면, 그 지역에는 2명의 '좋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두 명의 '좋은 사람'은 난쟁이들 가운데 장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