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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양주(揚州) 수양제묘(隋煬帝墓)

by 중은우시 2022. 5. 6.

글: 시정정(時婷婷)

 

2022년 5월 5일 양주(揚州, 양저우)시 문화재보호부서에 따르면, 수양제유지공원(隋煬帝遺址公園)을 10월에 대외공개하여, 400여건의 수양제와 관련된 문화재를 관광객들에게 관람하도록 제공할 것이라고 한다. 수양제는 최소 3번 이장되었는데, 지금 그 비밀이 풀리고 있다.

 

주나라때부터 시작하여, 한나라때, 수당송때, 명청때 3차례에 걸쳐 전성기를 맞이했던 강소성의 양주는 중국고대의 문화맥락이 농축되어 있다. 3000여년의 역사에서 양주는 정식으로 도성(都城)이 된 적은 엇지만, 수,당시기에는 중요한 도시로서 짙은 인상을 남겼다.

 

이 모든 것은 수양제 양광(楊廣)과 관련이 있다.

 

이 유명하지만 논쟁이 많은 제왕은 대운하를 만들었고, 과거제도를 시작한다. 그리고 호화사치와 음탕을 일삼고, 호대희공(好大喜功. 일을 크게 벌이길 좋아하고 공을 세우길 좋아한다)으로 천고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 다만, 역사상 한명의 제왕이 하나의 도시와 이렇게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경우는 없었다. 중앙민족대학 역사문화학원 교수인 멍만(蒙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다른 도시라면 수나라를 잊어버릴 수 있겠지만, 양주는 안된다.

 

2013년, 수양제 양광의 진실한 묘가 양주 조장(曹莊)에서 발견된다. 당시 수양제의 유체는 겨우 이빨 2개만 남아 있었다. 이곳의 묘는 이전에 공표된 묘와 겨우 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2022년 4월, 수양제유지공원이 국가중점문화재보호고고프로젝트에 들어가고, 600만위안의 중앙예산자금을 지원받는다.

 

양주에서 14년간 생활했고, 일찌기 "양주볶음밥(揚州炒飯)"을 시작한다.

 

<수서.제기.양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양황제(煬皇帝)는 이름이 광(廣)이다. 어려서부터 잘 생겼고, 총명하며 재빨랐다. 그리하여 수문제와 독고황후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개황원년(581년), 나이 겨우 13살의 양광은 진왕(晋王)에 봉해진다. 개황10년, 진(陳)나라를 평정하고 태위(太尉)에 봉해진다. 2년후, 양광은 명을 받아 강남으로 가서 양주총관(揚州總管)이 도히어 강도(江都, 지금의 양주)에 주둔한다. 양소(楊素)와 함께 반란을 평정했다. 수문제 인수4년(604년), 칠월, 수문제 양견이 붕어하고, 양광이 즉위한다. 다음 해애 연호를 대업원년으로 고친다.

 

학계의 고증에 따르면, 양광은 즉위전에 양주에서 11년간 생활했고, 즉위후에는 3번에 걸쳐 양주로 내려간다. 일생동안 양주에서 모두 14년간 생활했다. 양광은 황제에 오른 후, 수나라의 배도(陪都)로 양주에 수궁성(隋宮城), 동성십궁(東城十宮)을 건설한다. 거주인구는 10만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양주에는 "수양제가 없었더라면, 양주의 '삼경(三京)'중 하나라는 지위도 없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양주시의 시수(市樹)는 양류(楊柳, 버드나무)이고, 시화(市花)는 경화(瓊花)인데 모두 수양제와 관련이 있다. 

 

수양제의 일생은 논쟁거리가 많다. 그는 대운하를 팠고, 장성을 수리하였으며, 과거를 열었다. 중국의 경제, 정치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만 운하를 파고, 동도 낙양을 건설하면서 백성들을 심하게 동원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다. <수서.제기.양제>,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양광은 양주를 순행하기 위하여 배 '수만척'을 만들었고, 그를 수행하는 인원이 수만에 이르렀다. 대업원년의 제1차 순행때 용주선대(龍舟) 선단은 동도 낙양의 부두에서 출발하는데, 50일이 걸려 모두 출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업14년(618년) 삼월, 양광 휘하의 우문화급(宇文化及)이 쿠데타를 일으켜 양주에서 양광을 핍박하여 목을 매 자살하게 한다. 양광은 그 후 양주에 묻힌다.

 

양광은 일생동은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포악과 사치, 황음한 성격결함으로 민중들에게 침중한 고난을 겪게 했다. 결국 "내가 실로 백성들에게 잘못했다"는 한 마디로 자신의 일생을 묘사했다.

 

양주시박물관 관장 슈쟈핑(束家平)은 이렇게 말한다. 양광은 젊었을 때 비범한 군사, 정치능력을 발휘한다. 20세때 51만대군을 지휘하여 일거에 강남의 남조 진나라를 평정한다. 그리하여 남북조할거시대를 끝내고, 중국역사상 또 한번의 대통일을 이룩한다. 사실상 대운하를 파고, 동도낙양을 건설하는 등의 규모가 거대한 공사는 비록 백성들의 힘을 낭비하고 호화사치한 혐의는 있지만, 중국남북의 교통이나 중원통치를 공고히하는데, 그리고 중국경제의 중심을 관중에서 중원으로 다시 남방으로 옮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수양제의 탁월한 장기적 안목을 여볼 수 있다. 중국에 천년간 영향을 끼친 과거제도는 비록 폐단도 있지만, 학문을 중시하고, 문벌을 중시하지 않는 관리선발방식은 하층지식계층에게 정치참여기회를 부여했고, 봉건국가의 통치기반을 확대했으며, 왕조의 흥성과 발전에 큰 촉진제역할을 했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이다. 수양제는 오명을 뒤집어 썼고, 확실히 잘못한 것도 있지만, 그는 근면한 황제였다." 슈자핑의 말이다. 수양제의 양주에 대한 공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양주의 고전원림(園林)중에서도 수양제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다. <수춘도경(壽春圖經)>에 다르면, "수나라의 십궁(十宮)은 강도현 북쪽 장부원(長阜苑) 내에 있다. 숲을 끼고 냇가에, 성의 모양에 따라, 귀안(歸雁), 회류(回流), 구리(九里), 송림(松林), 풍림(楓林), 대뢰(大雷), 소뢰(小雷), 춘초(春草), 구화(九華)와 광분(光汾)의 10개 궁이 배치되었다" 이것이 바로 양주역사상 유명한 '강도십궁'이다. 비록 '강도십궁'의 유적지는 지금 고증하기 어렵지만, "창창고목중(蒼蒼古木中), 다시수가원(多是隋家苑)"의 상방행궁(上方行宮)은 지금도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2019년 양주는 '세계미식도시'라는 칭호를 얻는다. 당시 중국에서 네번째로 이 칭호를 얻은 도시가 된다. 양주의 이름을 딴 "양주볶음밥"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볶음밥이 된다. 실제로 양주볶음밥의 유래도 수양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양주의 공식적인 고증에 따르면, 수양제의 상식직장(尙食直長, 주방장)인 사풍(謝諷)은 일찌기 어연식보(御宴食譜) <식경(食經)>에 양주볶음밥을 만드는 방법을 기록한 바 있다. 그리고 이를 "월국식쇄금반(越國食碎金飯)"이라고 이름붙였다. 이 6자는 바로 양주볶음밥의 '출생증명서'이다. 기록에 따르면, 양광은 쌀밥을 반찬을 곁들여 먹는 것은 너무 번거롭다고 여겼다. 월국공(越國公) 양소(楊素)의 주방장은 황제의 주방장에게 달걀로 쌀밥을 볶을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달걀을 기름바른 솥에 넣은 후, 신속히 쌀밥을 쏟아넣어 달걀이 밥을 감싸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금이 은을 감싸다"는 볶음밥의 개량품종이 되었다. 밥과 반찬을 하나로 만든 "쇄금반"은 양광의 식욕을 돋구었고, 그는 계속 이 음식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하여 양주볶음밥은 낙양, 개봉, 항주등 운하연안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가경12년, 양주의 거유 완원(阮元)은 수양제능이 지금의 양주시 한강구(邗江區) 괴사진(槐泗鎭) 괴이촌(槐二村)에 있다고 제기한다. 이 곳은 2013년이전까지 세상사람들이 수양제의 능묘라고 여긴 곳이다. 지금 이곳도 이미 강소성문화재보호단위가 되었다.

 

2012년 12월 19일, 양주시문화재고고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어떤 부동산건설공지를 추적, 조사할 때, 고대의 청전(靑磚)을 발견한다. 문화재부문은 즉시 공사중단을 명령하고 현장을 보호한다. 슈쟈핑에 따르면, 묘장은 당나라때 양주성 자성(子城)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자성의 서남각에서 1.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양주의 고고인원은 1984년 겨울에 이곳의 동남쪽에서 당나라중기의 전실묘(磚室墓)를 하나 발굴한 바 있다. "묘장의 동남 촉강서봉생태공원에 기념비적 건축물인 옥구정(玉鉤亭)이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곳은 수양제의 비(妃)가 묻혀있는 묘라고 했다." 슈쟈핑의 말이다.

 

"우리가 발견했을 때, 묘장은 이미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당시 촌민들은 집을 묘혈의 위쪽에 지어놓아서, 묘혈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묘장의 구조는 간단했고, 겨우 2칸의 묘실이 있었으며, 좌우에 각각 1개의 이실(耳室)이 있었다. 여기에 용도(甬道)와 묘도(墓道)를 합하여 전체 묘실을 구성했다. 이런 규모는 단지 보통사람의 묘장표준이다. 나중에 고증한 바에 따르면, 1980년대, 현지주민이 수양제묘 부근에 집을 지었다. 당시 화장실을 파내서 만들었는데, 바로 주묘실중심의 위쪽이었다. 화장실의 최저부와 묘실은 겨우 반미터의 간격이 있을 뿐이었다. 

 

2013년 4월, 당시 양주시문물고고연구소 소장이던 슈쟈핑은 고고팀을 이끌고 묘혈을 열었다. 1호묘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수고양제묘지(隋故煬帝墓誌)>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우리 모든 사람은 이 글자를 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할 수 있다. 놀라고 기뻐한 다음에는 아주 두근거렸다. 이제 진짜란 말인가?" 슈쟈핑과 고고팀은 묘지는 석회암재질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연대가 오래되어서 많을 글자는 이미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인 점은 가장 중욯나 정보는 그래도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묘지에서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모두 52자였는데, 그중에는 "고양제묘지(故煬帝墓誌)" "유수대업십사년태세(惟隋大業十四年太歲)" "일일제붕어양주강도현(一日帝崩於揚州江都縣)" "어유주당기년팔월(扵流珠堂其年八月)"등의 문자가 있어 묘주인이 수양제 양광이라는 관건적인 증거가 되었다.

 

묘지명외에 고기팀은 묘자에서 2개의 이빨을 발견한다. 체질인류학적 감정을 거쳐, 그들이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낸다. 마모된 정도를 보면 이빨의 주인은 나이가 50세가량이다. 이는 사서에 기재된 수양제사망연령과 일치한다. "1호묘를 수양제로 확정한 또 하나의 중요한 물증은 바로 십삼환접섭대(十三環蹀躞帶)였다. 고대에는 명확한 법도가 있어서, 금상옥(金鑲玉)의 결합에, 13환은 황제전용의 규격이다. 이는 황제신분을 확정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슈쟈핑의 말이다. 이는 현재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유앨한 가장 완벽한 13환접섭대이다. 또한 고대의 허리띠계통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실물이기도 하다.

 

왜 묘장에 이빨밖에 남지 않았을까? 나머지 유골은 어디로 갔을까? 슈쟈핑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뼈들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묘장이 매장된지 천여년이 지나서, 유골은 자연히 썩었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강남지역의 토양은 산성이 비교적 강해서 유골의 부식을 가속화시킨다. 그외에 매장시간이 비교적 이르고, 관곽(棺椁)으로 보호되지 못한 점등으로 인하여 수양제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수양제묘는 양주에서 최소 3번 개장되었다. <수서.제기4>의 기록에 따르면, 소후(蕭后)는 궁인(宮人)에게 명하여 상궤(床簣)를 해체하여 관을 만들고 매장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처음에는 강도궁의 유주당 아래에 매장된다. 얼마 후, 수양제는 개장된다. <자치통감>기록에 따르면, 무덕원년 팔월(618년) 수양제의 옛부하장수는 수양재를 강도궁 서쪽 오공대(吳工臺) 아래로 개장한다. <신당서>에는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당고조 이연이 두 번에 걸쳐 수양제묘를 개장했다고 한다. 소후를 존경하였으므로, 소후가 죽은 후, 당태종 이세민은 사람을 보내어 소후의 유체와 대량의 부장품을 강도로 운반하여 수양제 양광과 합장하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만일 조장이 수양제묘의 진실한 장소라면, 이전에 괴사진 묘장은 수양제가 언제 개장했던 곳일까? 슈쟈핑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 묘는 청나라 가경연간 양주출신 대학사 완원이 고증을 거쳐 확인하고 돈을 내어 수복한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은 진행하지 않았다. 문화재보호의 각도에서 보자면, 괴사진의 수양제묘도 중요한 역사유적이다. 이런 주장은 주로 괴사진과 조장은 모두 예전 고대 대뢰당(大雷塘)의 범위내에 속하기 때문에 모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왼쪽은 원물, 오른쪽은 환원후의 복제품임.

소후의 키는 150센티미터이고, 봉관(鳳冠)에는 면화를 넣어서 채웠다.

 

양주 조장의 수양제묘를 발굴한 것은 2013년도 전국고고10대발견에 포함된다. 이번 발굴에서 고고팀은 109,000평방미터를 탐사한다. 그중 1호묘는 방형(方形)전실묘로 묘장이 길이는 24.48미터이고 동서에 이실은 너비가 8.22미터, 남은 높이는 2.76미터이다. 2호묘는 요고형(腰鼓形)전실묘료 주묘실, 동서이실, 용도, 묘도의 5개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장의 길이는 12.64미터, 너비는 5.9미터, 남은 높이는 1.6미터이다. 1호묘를 수양제묘로 확정한 외에 2호묘는 소후의 묘로 확정했다. 규모는 황제의 규격보다 훨씬 낮다. 그래서 수양제의 묘장은 그저 "묘"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능"으로 부를만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는 하지만, 고고팀원들은 여러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한다. "2호묘내에 일부 유골이 보존되어 있었다. 감정을 거친 결과 56세가 넘었고, 키가 150센티미터인 여성유골이다. 비록 문자정보는 없지만, 문헌기록과 부장품을 보면 묘주인은 수양제의 소후로 단정할 수 있다." 슈쟈핑의 말이다.

 

지금까지. 수양제와 소후의 묘에서 모두 400여건의 문물이 출토되었다. 소후의 부장품중에는 옥기백옥장 1건, 동제의 편종, 편경, 동등, 동두등이 있다. 그중 한세트의 편종16건, 편경20건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수당시기의 편종, 편경실물이다. 중국음악고고사의 공백을 메워준 것이다.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소후의 관식(冠飾)이다. 소후관식의 제작공법은 추엽(錘揲), 겹사(掐絲), 상감(鑲嵌), 주화(珠化), 유금(鎏金), 포광(抛光)등이다. 그리고 대소 동채(銅釵) 12건, 액탁(額托) 1개, 박빈(博鬢) 2개, 화타(花朵) 약간과 기타 잔편(殘片), 악세사리에는 수적형(水滴形), 하화형(荷花形)등 여러 종류가 있다. 놀라운 점은 동채의 갈라진 틈에 면화같은 것으로 채워넣은것이 보였다는 것이다.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적외선으로 분석한 결과 면화였다. 동채가운데의 면은 현대의 면과 일치하는 특징을 나타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현재 출토된 당나라때의 면화는 아주 드물다. 소후관식내의 면화가 발견된 것도 그 공백을 메워줄 수 있다.

 

그외에 수양제묘에서는 수면(獸面) 직경이 26센티미터인 유금동포수가 발견되었다. 유금동포수는 숫사자모양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전체는 도금되어 있다. 당나라 대명궁 유적지에서 출토된 동수와 크기가 비슷하다. "우리는 이렇게 추측한다. 이런 규모의 도금동포수는 분명히 궁전에서 쓰던 물건이다. 아마도 매장할 때 상궤를 가지고 관을 만들었으므로 거기에 붙어있던 것이 함께 매장된 것일 것이다." 슈쟈핑의 말이다. 출토문화재는 아주 높은 연구가치가 있다. 30여건의 기마용은 수양제가 병력을 이끌고 전쟁에 나서던 장면을 보여준다. 이는 고대의 여복제도(輿服制度), 군진배치, 생활방식 및 중외문화교류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수양제유지공원은 10월에 개방할 예정이다.

 

금년 4월, 국가발개위는 문화보호전승이용공정 2022년 중앙예산내투자계획을 하달한다. 양주시수양제묘고고유지공원의 환경정비 및 경관조성프로젝트는 "국가중점문화재보호및고고발굴"프로젝트에 들어가 있으며 600만위안의 중앙예산내의 자금지원을 받았다.

 

양주시문화재보호부서는 수양제묘고고유지공원의 환경정비 및 경관조성프로젝트는 점유면적이 10.74헥타르에 이르며 총투자금액이 1.5억위안이라고 한다. 프로젝트가 완공된 후, 양주시는 유적보호, 고고연구, 관광, 레크리에이션, 교육등의 기능을 하나로 모은 대표적인 문화관광 랜드마크로 만들 것이라고 한다.

 

현재, 수양제고고유지공원의 외부장식, 인테리어는 대부분 완공되었다. 천톤의 강철기둥으로 '짜서 만든' 건축물인데, 이는 소후의 황후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완공된 후에 주체는 지상1층, 총건축면적 3,800여평방미터, 건축고도 16미터가 될 것이다. 수양제묘에서 발굴된 문물을 전시하면서, 레이저쇼를 통해 수양제의 이야기를 보여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