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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시진핑 연임의 난이도 분석

by 중은우시 2021. 12. 26.

글: 담소비(譚笑飛)

 

중공 19기 6중전회에서 중공의 제3차 역사결의를 통과시켜, 시진핑에게 비교적 높은 역사적 지위를 부여했다. 중공의 앞의 2차에 걸친 역사결의는 모두 파구입신(破舊立新)이었다. 이전의 정치노선의 방식을 부정하면서 모택동과 등소평의 권위를 확립했다. 그런데 제3차 역사결의는 뭉뚱그린 내용이었다. 비록 시진핑을 모택동, 등소평과 나란히 세웠지만, 견강부회하는 의미가 너무나 명확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결의는 시진핑의 구상과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중공의 당매체들도 논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진파공(陳破空) 선생은 분석을 통해 이 역사결의는 나온지 1달이 지나자 열기가 식고 심지어 집어넣어버리는 분위기라고 한다. 중공의 <구시>와 <인민일보>는 심지어 문장을 통해 개혁개방을 찬양하면서 시진핑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기도 한다. 시진핑의 연임의 길은 가시밭길인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이 2012년 취임한 초기에 어떤 평론가는 시진핑의 연설내용과 인사배치를 보고서 시진핑이 2기연임제를 타파할 의향이 있는 것같다고 분석한 바 있다. 2018년 중국은 <헌법>을 수정하여,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을 취소시킨다. 시진핑의 연임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설명해야할 점은 중국의 국가주석직위는 허직(虛職, 실권이 없는 직위)이고,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래서 모택동, 등소평의 두 영도핵심은 이 직위를 맡은 적이 없다. 6.4사태 진압을 통해 급히 최고지도자의 지위에 오른 장쩌민은 자신의 경력상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 양상곤을 끌어내린 후 자신이 국가주석을 맡았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그중에는 외교측면의 고려도 있었다. 중공의 당수는 실질적으로 최고권력을 장악하지만, 만일 중공당내와 군대의 직무만 가진다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 명분이 맞지 않는 점이 있다. 상대방 국가원수는 정부수반이 대등하게 접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기실 중공당수와 군사위주석의 직무는 임기제한이 없다. 즉, 설사 헌법을 수정하지 않더라도, 이 두 실권직무는 연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헌법을 수정한 것은 그저 시진핑의 절박한 심정을 드러낼 뿐이다. 시진핑의 진실한 처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방의 민주법치사회라면 국가지도자는 일반적으로 연령제한이 없다. 심지어 내각제의 정치체제를 지닌 영국, 일본, 독일같은 나라는 수상의 임기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선거, 주권재민으로 민중의 인정을 받으면 되고 다른 요소는 전부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건과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할 때 이미 70세였다. 대처부인은 영국수상을 11연간 맡았고, 독일통일을 이룬 독일총리 콜의 재직기간은 16년에 달한다. 반대로 일당독재, 권력을 암상조작하는 중국에서는 말끝마다 무슨 임기제한, "칠상팔하"등등을 얘기한다. 그리고 다시 부득이하게 헌법을 수정하여 스스로가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인다. 정말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중공체제하에서, 지도자간부의 종신지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왜냐하면 필요할 뿐아니라 가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권력과 이익은 묶여 있다. 단순히 이익을 위해서라면 권력을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권력을 취득하고 공고히 하는 것은 격렬한 투쟁을 통해서 완성된다. 일단 권력을 잃으면, 목숨까지도 담보할 수 없다. 설사 모택동이라 하더라도, 그가 우려했던 일이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이 되었다. 그의 미망인 강청과 조카 모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이다. 그가 지정한 후계자 화국봉도 하야한다.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정치적 유산인 문화대혁명도 평가가 뒤집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권력의 핵심은 복종이다. 즉 누군가 너의 명령을 들으면 너는 권력이 있는 것이다. 중공체제내의 권력은 '사유제'이다. 방파를 끌어모아서 상대방을 타격하면 평생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한 북경대학의 박사는 허난성 신예현에 2년간 재직하던 기간동안, 현지의 관료사회생태를 심도있게 조사했고, 21개의 '정치대가족'이 있음을 발견했다. 모든 가족은 5명이 넘는 부과장급이상의 관리가 있었고, 가족구성원들주에서 부과장급이상이 2명 내지 5명인 정치소가족은 140여개나 되었다. 이들 가족의 형성은 많은 경우 한 사람이 고위직에 오른 후 다른 가족을 자리에 앉혀서 이루어졌다. 이들 가족간에는 여러가지 관계로 얽혀 있다. 현성의 관료사회는 비교적 규모가 적지만 이를 통해서 중국의 관료사회를 엿볼 수 있다.

 

모택동, 주은래, 주덕등등은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은 중공의 제1대 원로이고, 그들은 모두 현직에 있으면서 사망했다. "총부리에서 권력이 나온다"는 논리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타천하(打天下)하고나면 좌천하(坐天下)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들 본인은 당연히 은퇴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런 의식조차 없었다. 중공제1대 원로는 가볍게 명실상부한 지도자간부종신제를 실현했다. 문혁이 끝난 후, 마음 속으로 약간의 거리낌이 남아 있던 중공의 고위층은 최고권력에 어느 정도 제한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오쯔양의 정치비서 바오퉁(鮑彤)은 이렇게 토로했다: 등소평이 처음에 종신제를 취소하는데 동의했지만, 취옹지의부재주(醉翁之意不在酒)였다. 화국봉을 타도한 후에는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헌법의 궤이한 점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의 헌법에서는 전인대위원장, 국가주석, 총리의 임기제한을 규정했다. 다만 군사위주석의 임기만은 규정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전인대상임위원회, 총리, 최고법원원장, 최고검찰원검찰장등 전인대의 '선거'를 통해 임명되는 직위는 모두 전인대에 '업무보고'를 해야 하지만, 유독 군사위주석은 예외였다. 법리나 입법기술적으로 이런 규정은 실로 누추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필자의 법학교수는 헌법의 군사위주석에 관한 조항은 등소평이 직접 썼다고 말한다. 등소평은 만일 전인대에 업무보고를 한다면 그것은 신분에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1989년 등소평은 군사위주석을 장쩌민에게 넘긴다. 이 직위가 없더라도 최고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어떤 사람은 장쩌민이 군사위주석을 여러 해동안 지냈지만, 군사위의 대문이 어디로 열려있는지도 모른다고 농담했었다. 등소평이 죽은 후, 장쩌민은 추도회에서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을 흘리는 졸렬한 연기를 펼쳤지만, 실제로는 내심의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즉, 등소평은 우회적으로 지도자간부 종신제를 실현한 것이다.

 

장쩌민은 등소평과 같은 경력이나 권위가 없다. 다만 등소평 사후의 권력진공상태에서 당당하게 권력을 가지고 놀 수 있었다. 부정부패를 눈감아주면서 심복을 심고, 자신의 일파를 당정군과 국유기업에 배치시킨다. 다만 등소평이 지정한 후진타오가 있었고, 주룽지, 리루이환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장쩌민은 임기를 연장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2002년 물러난다. 다만 여전히 군사위주석을 2년간 유지했다. 비록 장쩌민이 현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심어놓은 심복들이 상당한 정도로 후진타오, 원자바오를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었다. 장쩌민의 영향력은 심지어 시진핑의 제1차임기에도 미치고, 제2차임기때도 영향력이 남아 있었다. 이는 장쩌민에 있어서 최소한 현재까지도 우회적으로 준종신제를 실현한 셈이다. 후진타오는 사임하면서 깨끗하게 물러났다. 설사 장쩌민을 본받아 2년간 군사위주석을 유지했다고 하더다고 실제권력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만인의 공적이 될 수 있었다. 앞에는 장쩌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뒤에는 시진핑의 발걸음이 다가온다. 후진타오가 깨끗하게 물러난 것은 비록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후진타오는 등소평이 직접 지정한 후계자이고, 중공고위층에 여러 해동안 머물러 있으며, 경력도 심후하다. 비록 권력을 잃더라도 스스로를 지킬 수는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처지는 가장 난감하다.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 것은 공청단파와 장쩌민파가 각자 나름대로의 계산을 품고 타협한 결과이다. 그래서 두 파로부터 협공을 받게 된다. 장쩌민파는 단지 시진핑을 임시발판으로 여겼고, 암중으로 정변을 통해 보시라이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러나 공청단파는 비록 정변을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후춘화를 시진핑의 후계자로 배치한다. 방법은 달라도 목적은 같다. 최종목적은 모두 최고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는 것이다. 단지 공청단파의 방식이 약간 더 온화할 뿐이다. 시진핑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장쩌민파 및 공청단파와 격렬하게 투쟁한다. 현재는 이미 호랑이등에 올라탄 격이다. 만일 시진핑이 20대에 물러나면, 심지어 후진타오처럼 말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즉, 등소평과 장쩌민은 막후로 물러난 후에도 우회적으로 종신제를 실현했지만, 시진핑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시진핑은 모택동모델을 본받아 명실상부한 종신제를 꾀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미 시대가 달라졌고, 시진핑은 모택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공도 풍촉잔년(風燭殘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 처했다.

 

중공의 권력투쟁은 군권을 뒷배경으로 한다. 모택동은 말할 것도 없고, 등소평이 세번이나 하야했다가 다시 기용된 중요한 원인은 군대내에 심후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찌기 2인자였던 유소기가 신속히 타도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도 그가 군대내에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장쩌민은 비록 군대에 기반이 없었지만, 등소평사후 명정언순(名正言順)하게 권력을 이어받았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군대의 지휘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자신의 세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이는 장쩌민은 수렴청정할 수 있었지만, 후진타오는 그렇지 못했던 원인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비록 태자당이면서 군복을 입었지만, 그가 취임할 때 군대내에 심복은 말할 것도 없고, 안면있는 고위장군들도 아마 몇명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며느리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다. 시진핑은 궈보슝, 쉬차이허우, 팡펑후이, 장양같은 거물들을 타도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메꿀 자신의 심복은 없었다. 위수사령관과 중앙경위국국장을 빈번하게 교체했는데, 이는 시진핑이 그들을 신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쩌민파의 세력은 군대내에서 수십년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진핑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군대내에는 기회주의자들도 아주 많다.

 

군대가 이런 태도라면, 시진핑이 당내의 각 권력귀족집단을 평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에 대하여 시진핑의 장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시진핑은 어쨌든 당수이다. 중공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다. 상당히 큰 권력을 운용할 여지가 있다. 시진핑은 2012년 취임후 돌연 두 주간 나타나지 않는다. 나중에 나온 소식에 따르면, 시진핑은 취임하지 않겠다는 카드를 내밀고 보시라이에 대한 조사와 링지화를 중앙판공실에서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대로 되었다. 시진핑은 당시에 아직 후계자이다. 이를 보면 당수라는 직위는 여전히 무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시진핑은 여러해동안 심복을 발탁하고, 정적을 타격해서 권력이 날이갈수록 공고해졌다. 다만 시진핑이 재임기간내에 무슨 정책을 실시하는 것과는 달리, 시진핑의 연임은 관례를 깨는 것이다. 이는 중공체제의 운용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부닥치는 곤란이 더욱 심층적이다. 중공은 신장인권, 신종코로나바이러스, 타이완, 남중국해등의 문제로 국제적으로 비난받고 있다. 국제환경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중국경제도 부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재정도 부족하다. 사회위기도 사방에 널려 있다. 그리고 홍콩문제, 미중무역전, 문혁회귀붐등의 문제까지 있다. 이는 모두 정적이 시진핑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가 된다. 시진핑이 만일 연임을 추진하면, 더욱 강경한 수단으로 정적들에게 타격을 가해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막고, 당내 다른 각파들이 통일된 의견과 행동을 보이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중공역대 당수의 종신제의 길을 살펴보면, 난이도가 갈수록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수의 권력은 특히 군댕 대한 장악력이 갈수록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계파의 세력도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시진핑은 모택동을 본받고자 하지만  마음은 있으나 힘이 모자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택동, 등소평시기의 중공은 소위 공산주의신앙으로 중공체제의 가치관이 응집되어 있었다. 다만 6.4의 총성은 중공신앙의 파산을 선언했고, 장쩌민은 '닥치고 돈이나 벌자'는 것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공산주의는 중공체제내에서도 우스개거리가 되었다. 진정 중공체제를 잇는 유대는 이익이다. 중공은 완전히 권력귀족집단이 이익을 위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만일 각방이익의 모순이 조화를 이룰 수 없다면, 그것은 결국 해체로 이어질 것이다.

 

중공최고권력의 다툼은 도궁비수현(圖窮匕首見)의 시기에 도달했다. 반드시 격렬한 이상현상으로 국면이 순식간에 만변할 것이다. 심지어 급전직하하는 극적인 전환점이 도래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