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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군사

구쥔산(谷俊山): 군중제일탐(軍中第一貪)?

by 중은우시 2021. 11. 19.

글: 왕우군(王友軍)

 

얼마 전에 폐막된 중공19기 6중전회는 중공사상 제3차 역사결의를 통과시켜, 중공의 소위 '중대성취'를 크게 자랑했다. 중공이 일부러 숨긴 하나의 '중대성취'가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군대의 부패가 세계제일이라는 것이다. 전 중앙군사위 총후근부 부부장 구쥔산의 부정부패사건은 중공군대 부패사건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중 하나이다.

 

2015년 8월 10일, 신화시점의 공식웨이보에서 중국 군사법원이 구쥔산의 부정부패죄, 뇌물수수죄, 공금유용죄, 뇌물제공죄, 직권남용죄를 인정하고 사형을 판결하면서 2년간 집행을 유예했고, 중장계급을 박탈했다고 보도했다.

 

구쥔산은 백년중공역사상 조사처벌받은 두번째 중장계급의 부패분자이다.

 

구쥔산은 1956년 10월 허난성 푸양시(濮陽市) 멍커향(孟軻鄕) 동바이창촌(東白倉村)에서 출생한다. 1993년 3월 푸양군구 후근부장(부단급)이 된다. 1995년, 지난군구 생산판공실 부주임(정단급)으로 옮겨가고 나중에 지난군구 육군지휘학원 부원장(부사급)으로 승진한다.

 

2001년 7월, 구쥔산을 베이징으로 옮겨가서 전후로 총후근부 기건영방부 판공실주임, 영방토지관리국장, 기건영방부 부부장, 부장, 전군방개판공실 주임등을 맡는다. 2009년, 총후근부 부부장으로 승진한다. 짧은 8년동안 5단계나 승진하여, 계급이 대교(大校)에서 중장(中將)이 된다.

 

구쥔산의 재직기간동안 마침 군대에서 각급 군인의 주택기준을 제고하고, 전군의 주택임차료기준도 조정하며, 대규모로 군영을 건섷하고, 전면적으로 군용토지의 공개입찰방식매각의 개혁을 진행한다. 전군의 주택, 군영, 설비등이 전면적으로 업그레이드되던 시기였다.

 

구쥔산은 군대토지출양의 심사허가, 부동산개발, 부동산임대, 영방건설, 수선, 개조등의 과정에서 권력, 금전, 여색거래를 통해 뇌물을 받고, 뇌물을 요구하고, 뇌물을 제공하며, 관직을 사고, 관직을 팔고, 남녀관계가 문란하여, 수중의 권력을 극도로 활용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인 법이다. 2012년 1월 27일, 음력 정월 초닷새. 구쥔산의 좋은 시절이 끝난다. 이날 구쥔산은 엄중한 부정부패로 체포된다.

 

쉬차이허우, 궈보슝등에 뇌물을 제공하다.

 

구쥔산의 전우가 <봉황주간>의 기자에게 토로한 바에 따르면, "구쥔산의 인생철학은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길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쥔산과 잘 아는 한 푸양출신의 노간부가 <재신망>에 토로한 바에 따르면, 구쥔산의 가장 큰 재능은 상사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상사의 집에 한번 가면 바로 그 집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낸다. 이 방법으로 아무리 강경한 상사라도 그에 의해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구쥔산의 배후인물은 누구일까? 지금 널리 알려진 바로는 전 중공정치국위원, 중앙군사위부주석인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이다.

 

2015년 6월 홍콩의 <명보월간>에 실린 <쉬차이허우전>에서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구쥔산은 쉬차이허우에게 잘보이기 위해 아부할 때 미인계를 썼다. 먼저 요염한 안마소녀를 보내고, 이어서 '탕찬(湯燦)등 여배우를 쉬하이허우에게 보낸다. 마지막에는 겨우 20살된 친딸까지 보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쉬차이허우와 그의 딸이 방안에서 운우지정을 나눌 때, 그는 밖에 앉아 있었고, 안색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소식통에 다르면 구쥔산은 짐승이라고 욕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를 짐승이라고 욕하는 것은 짐승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한다.

 

2015년 1월 22일 대륙의 <염정요망>은 이렇게 보도한다: "구쥔산이 정식으로 조사받는다고 선포되기 전에, 비록 자신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전히 마지막 발버둥을 쳤다. 여러번 쉬차이허우에게 뇌물을 보냈는데, 금액이 4천만위안에 달한다."

 

<봉황주간>은 보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구쥔산은 뇌물로 얻은 금괴로 3개의 수십킬로그램에 이르는 황금불상을 만들고, 그중 2개는 이미 보냈다"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에게 보낸 것인지에 대하여는 보도에서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

 

보도에서는 또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구쥔산이 뇌물을 보내는 방식은 이렇다고 한다: "12기통짜리 벤츠600을 1대 준비하고, 그 안에 100킬로그램이 넘는 금괴를 놓아둔다. 그리고 차열쇠를 직접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측한다. 이런 방식으로 선물을 보낸 대상은 쉬차이허우라고. "구쥔산은 그의 주요뒷배경인 X가 자기 딸을 아주 아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한꺼번에 그의 딸에게 호화주택 몇 채를 선물했다." 여기의 X는 분명 쉬차이허우일 것이다.

 

2014년 4월 8일, 어떤 사람이 "총정기관 몇몇 간부"의 명의로 해외에 <전군지휘관에게 보내는 제2차 공개서신>을 발표한다. 거기에는 귀쥔산이 궈보슝에게 뇌물을 가져다준 흑막이 기재되어 있다: "후기로 갈수록 구쥔산은 궈보슝에게 잘보이느라 더욱 애를 썼다. 그가 총후근부 영방부초대소에 궈보슝가족을 위한 특공점(特供點)을 설치한다. 그리고 궈보슝의 친척이나 친구가 베이징으로 오면 거기에서 접대했고, 산해진비가 언제든지 제공되었다. 궈보슝의 딸이 샤하이(下海, 관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다)할 때, 궈보슝은 구쥔산에게 말한다. 그녀가 잘 시작할 수 있게 네가 도와주어라. 구쥔산은 금방 현금 300만위안을 보내고, 그녀의 계좌에 2000만위안을 송금해주었다."

 

구쥔산에게는 또 한명의 상사가 있었다. 그는 전중공정치국위원, 중앙군사위부주석 장완녠(張萬年)이다.

 

홍콩 <경제일보>는 장완녠을 '구쥔산의 은사(恩師)'로 표현했다. 구쥔산은 자신을 '홍색후대'로 포장하기 위하여, 아무런 근거없이 자신의 부친 구얜셩(谷彦生)을 '우화대열사(雨花臺烈士)'로 날조했다. 그리고 사람을 찾아 <생사기억: 저우하오(周鎬)와 구얜셩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다. 그리고 장완녠에게 서문을 부탁한다. 장완녠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생사기억>이라는 책을 읽고는 오랫동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책에 적힌 이야기의 곡절은 진실로 감동적이다.

 

재신망의 보도에 따르면, 구얜셩은 1990년에 사망했고, 동바이창촌에 묻혔다. 동바이창촌의 촌민은 구얜셩이 우화대열사라는 말을 듣자,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완녠이 왜 이 가짜열사를 위해 서문을 써주었을까? 그 배후에는 분명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이다.

 

중국군대의 '허난방(河南幇)'의 방주는 전 중앙군사위주석 장쩌민의 비서실장 자팅안(賈廷安)이다. 중국관료사회의 상식으로 판단하면, 자팅안은 분명 구쥔산이 접근하고, 뇌물을 주고, 잘보이려 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부정부패금액이 300여억위안이다

 

<봉황주간>의 기자가 독점취재한 바에 따르면, 구쥔산의 최종적인 사건금액은 300여억위안이라고 한다. 구쥔산이 뇌물로 받은 금액은 6억여위안에 달한다고 한다.

 

2013년 1월 12일 심야, 군사검찰원의 수사관이 구쥔산 고향의 '장군부'를 압수수색했다. 거기에서 압수한 재물은 트럭 4대를 가득 채웠다. 거기에는 400킬로그램의 황금, 1800여상자의 마오타이원분주(原份酒), 11장의 동백호랑이 호피가죽, 수십개의 아프리카상아, 1척의 '일범풍순(一帆風順) 금선(金船), 1개의 '금옥만분(金玉滿盆)'의 금세수대야, 그리고 순금 모택동상등이 있었다고 한다.

 

2014년 1월 20일 해외에서 발표된 <구쥔산사건을 심도있게 조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전군지휘관에 보내는 공개서신>에 따르면, "구쥔산의 허난고향에서 수천만의 현금이 나왔다"고 하였다.

 

<봉황주간>의 보도에 따르면, 핵심정보원에 가까운 한 고위장교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위의) 공개서신을 제공한 사람은 절대로 보통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구쥔산사건의 구체적인 내용도 있고, 최근 1월 군대부패의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도 있기 때문이다. 군대내의 인사가 아니라면 이렇게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서신의 내용의 대부분이 관련기관이 중앙군사위에 보고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문의 문구를 그대로 옮겨적기도 했다." 즉, 위의 공개서신은 신뢰도가 아주 높다는 것이다.

 

토지와 인프라건설로 큰돈을 벌다.

 

홍콩 <동향> 잡지의 보도에 따르면, 2009년 7월부터 2011년 1월까지, 구쥔산은 베이징, 지난, 항저우, 상하이, 푸저우, 우한등 58개 도시의 황금지역의 군대토지를 출양하는 과정에서 수백억의 거액재산을 취득했다.

 

2014년 1월 20일 발표된 공개서신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총후근부에서 조사하여 확인한 부동산개발상들 중에 천쯔쥔(陳子君)이 있다. 그는 베이징의 서교공항에서 100무짜리 토지를 출양받고, 상하이의 강만공항에서도 적지 않은 토지를 출양받았다. 구쥔산은 한꺼번에 그에게 7,500만위안을 내라고 요구했고, 그리고 또 한번은 천쯔쥔이 2억여위안을 구쥔산에게 보냈다. 구쥔산사건이 터지자 모 군사위의 고위직이 사람을 시켜 천쯔쥔에게 알렸고, 천쯔쥔은 캐나다로 도망쳤다."

 

<재신망> 보도에 따르면, 구쥔산이 손을 댄 베이징2환로의 황금지역주변의 군대부동산은 수십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십채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채당 면적은 170평방미터가량이라고 한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구쥔산은 이들 부동산을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하려고 했는데, 사건발생시까지 주지 못하고 있던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상하이의 한 군대부동산은 20여억위안의 고가에 매각했는데, 그중 약 6%를 구쥔산이 리베이트로 받았다.

 

<봉황주간>의 보도에 따르면, 모 군대가무단은 총후근부에 가무단의 연습실과 연습건물을 짓도록 요청했는데, 예산이 8천만위안이었다. 구쥔산은 1.9억위안을 내려보내고, 동시에 가무단의 책임자로부터 500만위안과 5킬로그램의 황금을 받는다.

 

수백채의 부동산과 '장군부'

 

2014년 11월 22일 <중국기검감찰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구쥔산사건등 성장장관급(혹은 이상) 고위관료는 걸핏하면 수백채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 구쥔산의 남북 '장군부'는 CCTV에서 보도한 바도 있다.

 

남'장군부'는 허난의 고향 푸양 동바이창촌에 위치하고 있다. 고궁설계원의 엔지니어가 설계했다. 메인건물은 2층이고, 부속건물은 2층이다. 문앞에 회랑이 있고, 실내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된 기둥과 그림이 있다. 모두 고궁의 화가들이 그린 것이다. 메인건물의 계단앞에는 두 마리의 한백옥으로 만든 코끼리상이 있다. 편방의 앞에는 금원보 모형의 분수연못이 있다. 후원에는 정자, 화원이 있으며 회랑이 길고 구불구불하게 그 사이로 지어져 있다. 남쪽 담장쪽에 붙은 건물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호화주택은 2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북'장군부'는 베이징 우커송부근의 총후근부설계원내에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원래 부지는 가산화원(假山花園)이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설계자는 구쥔산의 거처로 통하는 외부와 좁은 길의 양측에 굵은 대나무를 심는다. 따스하고 습기있는 것을 좋아하는 대나무는 북방의 기후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설계자는 일부러 대나무숲의 아래에 스팀파이프를 부설하여, 대나무가 잘 자랄 수 있게 해주었다. 큰 대나무풍이 구쥔산의 집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밖에서는 거기에 주택이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대나무숲 깊은 곳의 호화주택 옆에는 성당모양의 클럽하우스가 있다.

 

2014년 1월 20일의 공개서신에서는 이렇게 토로했다: 구쥔산은 사적으로 부동산을 점거해서, 고대, 현대가 혼합된 건축을 짓는다. 베이징 자죽원공원 부근에 있으며 시가로 환산하면 수억위안은 호가한다. 구쥔산은 안에서 먹고 마시고 놀았다. 총후근부의 지도간부는 먼저 봉존(封存)하고 나중에 사건이 종결되면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군대 기율검사위의 간부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중에 구쥔산은 거기에서 적지 않은 나쁜 짓을 벌일 수 있었다.

 

신분의 다섯가지 조작

 

공개서신에 따르면, 구쥔산의 인사자료에는 5가지 조작이 있다: 첫째, 나이를 조작했다. 그의 출생연도는 3개이다. 1952년, 1954년, 1956년. 둘째, 공을 세우고 상을 받은 것을 조작했다. 1993년 그의 인사기록표에는 1992년 1번 3등공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1995년의 인사기록표에는 1988, 1989, 1990, 1991, 1992년 연속 5번이나 3등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셋째, 학력조작이다. 먼저 공군제2기술학교를 졸업했다고 썼다가 나중에는 허난 푸양교육학원졸업이라고 적었다 .그후에는 다시 중전(中專), 대전(大專), 대학원생이라고 적었다.

 

넷째, 자녀를 조작했다. 그의 인사자료에는 딸 하나만 적혀 있다. 그러나 총후근부 간부부서의 컴퓨터자료에는 아들 하나가 더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섯째, 부친의 신분을 조작했다. 그의 부친은 보통농민이다. 나중에 그는 난징 우화대에서 희생된 열사로 포장된다. 그는 푸양에 부친을 위해 '열사묘'를 짓고, 전기까지 써서 출판했다.

 

가족부패

 

재신망의 보도에 따르면, 구쥔산의 고향 푸양에는 구씨집안의 주택단지와 장군부 이외에 구씨가족이 개발한 상업무역성이 분포되어 있고, 각종 부동산은 이미 매각되거나 매각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도시중심의 '열사능원'과 두 곳의 '병기공장'도 있다. 구쥔산의 셋째동생인 구셴쥔(谷獻軍)은 구산(谷三)이라고 불리는데, 그의 사업은 군수생산, 토지, 부동산개발및 건설건축등 분야에 걸쳐 있다.

 

구산은 동바이촌의 지부서기를 10년간 지냈고, 촌의 3천여무에 달하는 땅을 모조리 팔아치웠다. 소식통에 따르면, 구산과 구씨가족은 푸양에 거액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 먼저 집체토지를 매각하여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차지한다. 개발상을 도와 토지를 수용하게 도와주고 리베이트를 받아챙겼다. 그리고 암중으로 개발상과 결탁하여 명목상으로는 개발상이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구산과 구씨가족이 실질적인 소유자이다.

 

구쥔산이 낙마한 후, 구씨 5형제자매중에서 이미 3명이 구속되었고, 구쥔산의 처남인 장타오(張濤)도 체포되었다.

 

결론

 

구쥔산 사건이 발생한 후, 어떤 사람은 구쥔산을 '군중제일탐'이라고 불렀다. 중앙군사위 부주석 쉬차이허우, 궈보슝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비로소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이야말로 '군중제일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은 모두 전 중앙군사위 주석 장쩌민이 발탁중용한 사람들이다. 장쩌민의 비호, 종용, 지지가 없었다면, 쉬차이허우, 궈보슝, 구쥔산은 이렇게 대담하게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장쩌민은 중공당정군의 가장 심각한 부패문자들의 총뒷배경이다. 아마도 진정한 '군중제일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