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제3차역사결의에 드러난 중국의 10대위기

중은우시 2021. 11. 17. 11:36

글: 학평(郝平)

 

중국 신화사는 11월 16일, 6중전회에서 통과된 제3차 역사결의의 전문을 공표했다. 결의는 모두 36,000여자이다. 신화사는 동시에 6,600여자의 <중공중앙의 당의 백년분투중대성취와 역사경험에 관한 결의>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4만여자는 일관된 중국의 문화선전에서의 가대공편(假大空騙)의 특징외에도 중국에 닥친 사상유례없는 내부투쟁의 위기국면과 직면한 현실적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위기1: 결의기초과정에서의 구심투각(勾心鬪角)

 

이 6,600여자의 '기초설명(起草說明)'에 따르면, 제3차역사결의의 초안작성은 2021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8개월이나 걸렸다. 시진핑이 기초조의 조장을 맡고, 왕후닝, 자오러지가 부조장을 맡았다. 다만 이 설명에서는 곧이어 이런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당과 국가의 유관지도자동지 및 유관중앙부서와 지방책임자동지가 참가했다" 기초조는 "중앙정치국상위의 영도하에 문건초안작업을 맡았다."

 

즉, 결의초안작성은 왕후닝등이 실제로 집필했고, 정치국상위가 영도했다는 것이다. 다만 상위중 여러명은 시진핑과 같은 마음이 아니다. 왕후닝은 삼조국사로 실제로는 그저 당곤국요(黨棍國妖)이다. 그러니 저급홍고급흑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기초설명에서는 또한 이런 내용도 토로하고 있다: "결의초안작성과정에서, 중앙정치국상위회는 3차례의 회의를 개최했고, 중앙정치국은 2차례의 회의를 개최하여 심의했다." "각지구 각부문 각방면에서 여러가지 좋은 의견과 건의를 제출했다" "반복된 연구와 추고를 거쳐 결의초안은 547곳을 수정했다." 이는 확실히 그 안에 구심투각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위기2: 시작부터 타협을 통해 '시핵심'을 얻어냈다.

 

결의 3.6만자중 2.5만자는 18대이후의 시진핑신시대를 묘사한다. 0.9만자로 중공역사의 백년을 썼다. 전신위축, 각지비종(脚趾肥腫)의 '신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

 

전문에서 시진핑은 22번 나오고, 모택동은 18번 나오며, 등소평은 6번 나온다. 장쩌민, 후진타오는 각각 1번 나타난다. '핵심'이라는 단어는 단 한번 모택동과 관련하여, 그리고 9번 시진핑과 관련해서 나온다.

 

글자수로 보면 시핵심은 확실히 제3차역사결의에서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제3차역사결의를 당내에서 일치된 찬성과 컨센서스를 얻었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결의의 첫부분 '서언'에서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중공의 전 2차례에 걸친 역사결의는 "당과 인민사업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인도작용을 했고, 그 기본논술과 결론은 지금도 여전히 적용된다"고 했다. 

 

시진핑은 취임이후 모택동을 숭배하고 등소평을 깍아내렸다. 좌전환과 쇄국경향이 뚜렷했다. 그리고 그는 중대한 경우에 여러번 전후 30년이 상호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등소평의 제2차 역사결의는 실제로 전30년에 대한 부정이다. 등소평은 명확하게 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말했다. 시진핑은 제3차 역사결의에서 등소평의 <건국이래당의 약간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긍정했다. 이는 실제로 모택동을 숭배하고 등소평을 깍아내렸던 태도가 역전된 것이다. 아마도 그의 본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타협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 뜻은 당내의 원로와 다른 파벌들로부터 '핵심'지위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위기3: 등소평시대의 대약진 문혁에 대한 규정을 그대로 두다.

 

결의 정문에서는 모택동시대의 진반, 삼반, 오반, 한국전쟁, 공사합영등 중공의 폭정에 대하여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정문에서는 겨우 300여자를 통해 한문단에서 대약진, 인민공사, 반우, 문혁등의 착오를 기술한다. 이 짧은 단락의 문자에서 집필자는 의식적으로 '당' '당중앙' '모택동'의 세 개념을 엄격히 구분했다. 

 

결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당시 엄준하고 복잡한 외부환경에 직면하여, 당은 사회주의정권을 공고히 하는 것을 극히 주목한다. 그리하여 여러 방면의 노력을 진행했다. 그러나, 모택동 동지는 사회주의사회계급투쟁의 이론과 실천에서의 잘못된 발전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당중앙이 적시에 이런 잘못을 시정하지 못했다. 모택동 동지는 당시 중국의 계급형세 및 당과 국가정치상황에 대하여 완전히 잘못된 평가를 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영도했다."

 

위의 글은 3가지 의미를 지닌다: 모택동의 잘못, 당중앙은 적시에 잘못을 시정하지 못했다. 즉, 당은 정확했다.

 

결의에는 또한 문혁이 임표, 강청에게 이용당했다고 적었다. "대량의 국가와 인민을 해치는 죄악활동을 저질러 10년내란을 일으켰고", "교훈은 극히 참통하다"

 

결의는 또한 11기 3중전회에서 계급투쟁위주를 끝내고, 개혁개방노선을 열면서, 문혁을 부정하고, 화국봉의 '양개범시'를 부정한 것을 긍정했다. 결의전문에서 개혁개방은 모두 40번 나온다.

 

결의의 위 내용은 확실히 최고당국의 최근 정책과 보조가 맞지 않는다. 당국은 얼마전에 중앙집권강화를 통해 문혁2.0의 폭풍을 일으켜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외부에서는 중국이 전면적으로 역사를 거꾸로 돌려 문혁시대로 되돌아가고 개혁은 이미 죽었으며, 개방은 끝났다고 예측했었다. 특히 중공이 최근 중소학교 교재에서 문혁에 대한 정의를 질적으로 바꾸었다. 더 이상 문혁을 '착오'라고 부르지 않고, 전진하는 길에서의 '탐색'이라고 불렀다.

 

지금 제3차 역사결의에서 등소평시대의 문혁에 대한 역사정론은 그대로 둔 것의 의미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내부에서 당국의 문혁2.0에 대하여 보편적인 반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위기4: 6.4사태 결론을 유지하여, 중공의 마이너스자산을 승계했다.

 

중공 6중전회의 결의공보에서, 6.4사태에 대하여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장쩌민의 책임으로 돌렸다. 다만, 결의전문에서는 다른 내용도 들어 있다: "국제적으로 반공 반사회주의 적대세력의 지지와 선동으로 국제적인 대기후와 국내적인 소기후로 1989년 봄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엄중한 정치적 풍파가 있었다" 그리고, "당과 정부는 인민에 의지하여, 선명한 기치로 동란에 반대하고, 사회주의국가정권을 보위했다."

 

89년 6.4는 확실히 등소평의 정치적 마이너스자산이다. 장쩌민도 그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다. 시진핑은 그의 역사결의에서 중공의 입장에 서서 진압을 긍정한다. 기본적으로 이 마이너스자산을 승계했다는 것이다.

 

위기5: 저우용캉, 보시라이, 궈보슝, 쉬차이허우등이 결의에 언급되다.

 

결의의 '반부(反腐)' 부분에 "당내에 이익집단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고, 저우용캉, 보시라이, 쑨정차이, 링지화등의 엄중한 위기위법사건을 조사처벌했다"고 적고, 동시에 저우용캉 보시라이사건에 대하여 "당은 정치문제와 경제문제가 교차하는 부패사건에 주목했다"라고 두리뭉실하게 언급한다.

 

결의는 "국방과 군대건설에서"라는 부분에 스스로 시진핑의 군대내의 권력위기를 폭로했다. "한동안, 인민군대에서 당의 영도가 약화되는 문제가 두드러졌다. 만일 철저히 해결하지 않으면, 전투력에 영향을 줄 뿐아니라, 당이 군대를 지휘한다는 중대한 정치원칙에 관련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동시에 "견결히 궈보슝, 쉬차이허우, 팡펑후이, 장양등의 엄중한 위기위법사건을 조사처벌하고, 철저히 그 여독과 영향을 숙청하며, 인민군대의 정치생태가 근본적으로 호전되도록 추진했다."

 

모두 알다시피, 저우용캉, 보시라이, 쑨정차이, 궈보슝, 쉬차이허우등은 모두 장쩌민의 군정 두 분야의 핵심세력이다. 심복이 부정적으로 백년역사결의에 기록되었으나, 그들의 최종보스인 장쩌민은 당의 주요대표자로 이름을 남겼다. 시진핑 정치생애에서 장쩌민파는 여전히 기회만 노리고 있으며, 나중에 양파간의 극렬한 투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기6: 스스로 신앙위기와 정권위기를 폭로하다.

 

결의에서 시진핑 신시대를 논술할 때, "당의 영도가 약화, 허화, 담화, 주변화되는 문제"를 언급한다. "당중앙의 중대결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 대책이 없다는 식으로 처리하고, 심지어 말로는 따르면서 행동은 그렇지 않고 마음대로 처리하는 일이 있다." 무슨 '양면인'등이 나온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중공당원의 신앙위기, 조직위기, 기율위기를 언급했다. 소위 신앙정신상의 "거지" "연골인(軟骨人)"을 언급한다.

 

전문은 여러 곳에서 중공의 정권위기를 암시하고 투영했다. 예를 들어, 관리의 부패, 정경유착관계, 배금주의, 향락주의, 극단적개인주의, 이데올로기분야에서 당의 지도력약화문제로 인하여 '일부 지도자간부의 정치적 입장이 모호하다'는 등이다.

 

결의에는 특별히 '인터넷여론의 혼란상이 나타났다" "인터넷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장기집권이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 이는 중공의 집권위기를 드러낸 것이다.

 

중공은 이번 결의에서 여전히 중공과 국가정권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신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엄준한 국가안전형세에 직면했고, 외부압력이 사상유례없다. 전통적인 안전위협과 비전통적인 안전위협이 상호교차하면서 '블랙스완' '회색코뿔소'사건이 수시로 발생한다" 그리고 "국가안전은 가장 큰 대사이다"

 

중공은 여전히 백만대군을 보유하고 있고, 안전유지경비는 군비를 추월했다. 거의 모든 중국인들은 하나의 감시장비를 누리고 있다. 전국곳곳에서 '풍교경험(楓橋經驗)'이 나타난다. '시여세(時與勢)'가 모두 중공에 있다면서도 여전히 공포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 정권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기7: 경제적인 곤경과 체제의 질곡을 인정하다.

 

중국은 항상 자신들이 세계2위의 경제체이며 GDP가 백조위안을 넘어섰고, 1인당소득이 1만달러를 넘어섰다고 자랑하며, 미국을 넘어서겠다고 큰소리쳤다. 미중무역전은 그들을 옛날의 초라한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2020년의 코로나바이러스에 최근의 부동산위기, 외자철수, 사영기업탄압과 에너지위기까지 겹치면서 경제는 계속 부진하다. 개혁의 이익, 인구의 이익, 외자의 이익이 동시에 쪼그라들어, 중국경제는 즉시 빈혈상태에 들어간다.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제3차역사결의에서도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구조적인 체제적인 모순이 계속 누적되고, 발전의 불균형, 부조화, 지속불가능문제가 특히 두드러진다." "이미 고속성장단계에서 고품질발전단계로 전환했고, 증가속도교체기, 구조조정진통기, 전기부양정책소화기의 3기가 중첩되는 복잡한 국면이고, 전통적인 발전모델은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

 

11월 16일, 중공당매체는 심상치 않게 시진핑의 영상회의를 보도하면서 '평화공존' '평등호혜' '합작윈윈'을 얘기하고, '신냉전'에 반대하면서, 키신저시대의 미중관계로 되돌리고자 헛된 시도를 하며 미국이 중국을 끌어안는 아름다운 시기로 되돌아가기를 혼자서 꿈꾸었다. 이를 보면, 중공은 실제로 돈도 없고, 자신도 없어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8: 타이완문제에 대한 기술. 중공의 '정신분열'을 보여준다.

 

타이완문제에 관하여, 제3차역사결의의 두 역사단계에서 모두 언급되었다. 등소평시대에 대한 결의에서 "당은 타이완문제해결의 대국을 장악하고, 평화통일, 일국양제의 기본방침을 확립했다." 

 

시진핑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시진핑이 새로운 총체적 전략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당은 "양안일가친(兩岸一家親)"의 이념을 견지하여, 양안관계의 평화적 발전을 추진하며, 일련의 타이완동포에 혜택을 넓히는 정책을 실시하며 양안의 경제문화교류협력을 강화한다. 2016년이래, 타이완당국은 '타이완독립'의 분열활동을 가속화했고, 이로 인해 양안관계의 평화적인 발전추세는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의 중국원칙과 '92컨센서스'를 견지하며, '타이완독립'의 분열활동에 견결히 반대하고, 외부세력의 간섭에 견결히 반대하며, 양안관계의 주도권과 주동권을 장악한다. 조국의 완전한 통일은 시(時)와 세(勢)가 시종 우리편이다.

 

이 묘사는 아주 '정신분열'적이다. '양안일가친'이라는 것은 직접 "유도불유인(留島不留人)"을 뒤집는 말이다. 이 모순은 중공이 스스로 내놓은 것이다. 뒤의 문자는 마치 '타이완독립'이라는 것을 핑계삼아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의 문구인 '조국의 완전한 통일은 시(時)와 세(勢)가 시종 우리편이다." 라는 것은 중공이 정신병환자같은 말이다. 언제 사람을 때려죽여도 범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위기9: 홍콩문제, 빈곤탈출, 재해, 전랑외교를 분식하여 책임을 면제시키다.

 

이들 의제에서 중공의 묘사는 사악함과 흑백을 전도시키는 논리에 부합한다. 전혀 예상밖이 아니다. 홍콩탄압을 '애국자가 홍콩을 통치한다'로 말해버리고, 바이러스를 대국전역(大國戰疫)으로 포장하고, 빈곤탈출은 더더욱 정치적 기치로 내건다.

 

결의에서는 외교에 대한 논술에서 두 가지 비밀을 폭로했다. 하나는 시진핑시대에 당중앙이 "반드시 당내국제 두 대국을 통합하고, 당의 외교업무영도체제매커니즘을 완비하여, 대외공작의 상층설계를 강화한다"고 했다. 이 말은 시진핑이 전랑외교로 인한 국제충돌과 부정적 영향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또 하나의 비밀은 결의에서 "주변의 전략적 의존을 안정시키고, 주변의 운명공동체를 만든다" 그 말에 숨은 뜻은 '인류운명공동체'는 세계형세가 너무 동탕에 빠지고, 역글로벌화조류가 너무 심해져서 주변의 운명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럼 주변의 운명공동체는 누구를 말하는가? 일본? 한국? 인도? 아프가니스탄? 아마 겨우 아프가니스탄만 남을 것같다.

 

위기10: 도덕, 종교, 인권의제를 무시하다.

 

수만자에 이르는 백년역사를 종합하는 장문에서 '도덕'이라는 글자는 단1번 언급된다. 그리고 그것도 다른 탐관오리들이 "경제적으로 탐욕스럽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할 때 나온 것이다.

 

종교와 인권은 단지 중공당문화상의 용어사용에 다라 '중교문제'와 '생존권과발전권이 바로 인권이다'라는 틀에서 나온다.

 

중공은 1999년이래 파룬공에 대한 박해를 하여 금세기 최대의 인권재난을 일으켰는데,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장문에서 여러번 중화민족의 부흥을 얘기하는데, 도덕과 종교신앙문제는 무시했다. 이는 중화민족을 어느 방향으로 부흥시키겠다는 것인지. 중공이 투쟁철학방향으로 부흥시키겠다는 것인지.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사람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결론: 만지황당언(滿紙荒唐言)

 

소위 두번째 백년전략방향을 지도하겠다는 웅장한 글에서 전문을 검색해보면 249번의 인민이 나온다. 무슨 인민민주,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 인민권익, 인민에 복을 준다. 인민지상등등등등. 진상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중공의 거짓말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읽을 때 가슴이 뛸 것이다.

 

"혁명의 명의로 사람을 죽이고, 인민의 명의로 재물을 강탈하고, 개혁의 명의로 장물을 나눠가진다" 이것이야말로 중공백년의 진실한 결론이다.

 

"만지황당언, 일파악어루(一把鰐魚淚)" 이것이 중공의 제3차역사결의의 진실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