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상담사사(風尙談史事)
기원전202년, "귀신을 만나면 귀신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는 서초패왕 항우는 인생의 마지막 열차를 탔다. 그의 첩인 우희(虞姬)가 자결한 후, 그도 이어서 오강(烏江)에서 자결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는 "패왕별희(覇王別姬)"의 장면이 펼쳐졌다. 그때 항우의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항우는 후손을 두었을까? 우희는 항우의 첩일 뿐이고, 그에게는 원래 정실부인이 있다. 성은 원(袁)이다. 이건 헛소리가 아니다. <항씨족보>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천하의 항씨는 모두 일가(一家)이다"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즉 천하의 모든 항씨성은 모두 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이는 2200여년의 일이다. 항우의 할아버지인 항연(項燕)은 세 아들을 둔다. 장남 항초(項超, 항우의 부친, 다만 요절했다), 차남 항량(項梁), 삼남 항양(項襄). 그외에 항우의 당제(堂弟)로 '초국제일검객' 항장(項莊, 홍문연에서 검무를 춘 인물)이 있다. 그리고, 유방을 도왔던 항백(項伯)도 있는데, 그는 항우의 족숙이다. <사기>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유방은 항백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딸을 항백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다.
<항씨족보>에 따르면, 항우의 정실부인은 원씨이고, 그녀는 항우와의 사이에 항룡(項龍), 항창(項昌)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우희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딸도 물론 낳지 못했다) 항우가 오강에서 포위망을 뚫기 전에 항우는 일찌감치 필사의 준비를 한다. 그는 아들들을 미리 떠나보낸다. 자신이 안심하고 죽을 수 있도록.
항우의 아들은 절강 소흥에 은거한다. <항씨족보>의 기록에 따르면, 절강 소흥의 백마촌에 있는 항씨후손들이 바로 항우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항우의 형제도 아주 많은데, 어떻게 그들 중에 항우의 후손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항우가 너무 유명하다보니 그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것이 아닐까? 항우가 죽은지 1천년이 지난 후, 남송의 주희(朱熹)는 백마촌으로 가서 직접 살표본 바 있다. 항우에게 후손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있다'는 것이다. 단지 주희가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남송에서 주희는 정주이학의 권위자이니 그의 말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해서였을까?
어찌되었건 그의 후손이 살아있다는 것은 서초패왕 항우에게도 하나의 위안이 될 것이다. 어쨌든 영웅의 후손이 있으니까. 왜 은거하게 되었는지는 유방과 여후에게 물어봐야 한다. 한신이 바로 생생한 사례이다. 여후가 한신을 죽인 후, 미안한 마음에 소하는 몰래 한신의 아들을 광서로 보내 숨긴다. 여후가 참초제근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韓)"에서 왼쪽을 잘라내고 "위(韋)"로 성을 바꾼다. 그래서 전해지는 바로는 광서일대의 "위"씨는 모두 옛날 한신의 후손이라고 한다. 태평천국의 난때 북왕 위창휘(韋昌輝)가 바로 한신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항우의 후예들은 성을 바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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