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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현왕(八賢王) 조덕방(趙德芳)은 정말 금간(金鐧)을 가졌는가?

by 중은우시 2018. 3. 7.

글: 조한청(趙汗靑)


조덕방은 '팔왕야(八王爺)'로도 불리고, 사람들은 그를 "팔현왕(八賢王)"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희곡, 연의에서 유래한 것이다. 허구로 조덕방이 손에 금간을 쥐고, 위로는 혼군(昏君)을 치고, 아래로는 간신을 때리는 정기늠름한 이미지이다. 즉 정의의 화신이다. 그는 고전문학의 명저인 <양가장전>, <양가부연의>, <삼협오의>와 <만화루>에 나오는 인물이다.


"팔현왕"이라는 이 허구의 인물은 "양가장", "포청천"등 이야기의 극적인 충돌을 증가시킬 뿐아니라, 더더구나 사람들의 충신에 대한 존경, 간신을 처벌해야한다는 심리적 요구까지도 만족시킨다.


고대에 황제는 구오지존(九五之尊)으로 불리웠다. 그 뜻은 권력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이다. 바로 '보천지하(普天之下), 막비왕토(莫非王土), 솔사지빈(率士之濱), 막비왕신(莫非王臣)"이다. 이를 보면 고대의 사람들은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은 황제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네가 가진 것도 황제가 내린 것이다. 다만 고인들은 이런 문제도 생각했다. 만일 황제가 지고무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큰 화가 닥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대에 왕왕 황제의 권리를 제약하는 것이 나온다. 금간도 바로 그런 것이다.


당연히 역사상 정말로 금간이라는 것이 있었는지는 지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민간전설에 의하면 송나라 조광의 시대에 금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금간을 가진 사람이 바로 조덕방이다. 이 금간은 아주 신기하다. 위에는 9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상타혼군(上打昏君), 하타영신(下打佞臣)"할 수 있다. 특히 황제를 때릴 때, 황제가 맞아 죽으면 금간의 용을 한 마리 줄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덕방은 어떻게 하여 이런 금간을 갖게 되었을까?


조광윤(趙匡胤)이 남당을 멸망시키고 대송강산을 건립한 후 그에게는 모두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조덕수(趙德秀), 차남 조덕소(趙德昭), 삼남 조덕림(趙德林), 사남 조덕방(趙德芳). 그중 장남과 삼남은 모두 요절한다. 그리하여 조덕소와 조덕방만이 자라서 성인이 된다. 이치대로라면 황제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가 붕어한 후에는 아들에게 황위를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조광윤이 죽은 후, 황제에 오른 것은 동생인 조광의(趙光義)였다.


조광의가 어떻게 황제에 올랐는지에 관하여는 형으로부터 대권을 빼앗은 것이냐, 어떤 음모수단을 쓴 것이 아니냐는 것이 이미 역사의 수수께끼로 되었다. 이 이야기는 역사에서 '촉광부영'이라고 칭한다. 왜냐하면 조광윤이 죽는 날 그의 동생 조광의만이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이 조광윤이 죽은 소위 '촉광부영'을 얘기해보기로 하자.


궁정예절에 따르면, 조광의는 황궁안에서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는 그러나 궁안에서 잠을 잔다. 태감, 궁녀는 황제에게서 떨어져서는 안된다. 그런데 모두 떨어져 있었다. 어지럽게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 기괴한 옥도끼소리, 그리고 조광윤의 "잘했다. 잘했다."는 고함...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이것이 잘 기획된 모살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태감 왕계은이 성지를 거짓으로 전한 것도 있다. 이 왕계은이 도대체 무슨 담량으로 대송황후의 뜻을 어기고 원래 조덕방ㅇ게 전해야할 내용을 조광의에게 전했던 것일까? 만일 일이 틀어지면, 살신지화를 당할 일이다. 기실 이런 견해는 그저 찬위의 죄책을 일개 환관에게 떠넘기는 것일 뿐이고, 동시에 황형을 죽인 죄행을 덮으려는 것일 뿐이다.


'금궤지맹'의 진위문제도 있다.


두태후가 서거하기 전에, 조광윤은 34살이고, 한창 나이였다. 그의 아들인 조덕소가 이미 14살이다. 설사 조광윤이 몇년후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주세종이 7살짜리 고아를 남긴 군룡무수의 국면은 펼쳐지지 않는다. 두태후는 일생동안 현명했는데, 어찌 이런 하책을 내놓았을까? 하물며, "금궤지맹"은 조광의가 등극한지 5년후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공표된다. 왜 조광윤이 죽었을 때 정정당당하게 공표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약간의 이문점이 있다. 역시 사람들이 조광의를 의심하는 부분이다.


조광의는 해가 지나기도 전에 연호를 바꿔버렸다. 새로 황제가 즉위하면, 통상적인 관례에 따르면, 다음해부터 새로운 연호를 쓴다. 그러나, 조광의는 겨우 2달을 남겨둔 개보9년을 흥국원년으로 바꾼다. 이렇게 통상적인 법도에 어긋나게 서두른 것은 단지 한가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서둘러 자기의 '명분을 바로 해야 햇다(正名)' 마음 속에 뭔가 거리끼는 게 있어서일 것이다.


조광윤이 죽은 후 그의 장남 덕소(당시 이미 30살), 조광윤의 막내아들 조덕방(당시 겨우 26살, 일설에는 23살이라고 함)도 신비하게 급사한다. 조광윤의 미망인이 죽은 후에도 조광의는 황후의 예로 장례를 지내지 않는다. 이것이 모두 우연일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조광의의 자손후대는 모두 그의 조상 조광의가 '형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했다"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황위를 다시 조광윤의 후손에게 돌려준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송고종 조구가 황위를 넘겨준 이야기이다.


조구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누가 황위를 계승할 것인가? 대신들 사이에 의론이 분분했다. 하나의 강력한 의견은 조광윤이 개국의 군주이므로, 당연히 그의 후손중에서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조구는 이런 주장을 질책하고 무시했다. 돌연 어느 날, 그는 생각을 바꾼다. 말하기를 그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송태조 조광윤이 그를 '만세전'으로 데려가서 당일의 '촉광부영'의 모든 광경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말했다고 한다: "너는 황위를 나의 자손에게 넘겨라, 그래야 국세에 한 줄기 전기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조구는 마침내 조광윤의 칠대손 조신(趙愼)을 찾아 황위를 그에게 넘겨준다. 이때는 이 피비린내나는 사건이 일어난 날로부터 187년이 지난 후였다.


이것은 바로 설명한다. 조구는 조상의 죄를 인정했고, 조광윤의 죽음에 기본적인 답을 준 것이라고.


당연히 이런 분석은 어쨌든 확실한 증거가 없다. 누구도 조광의의 황제라는 신분이 황형이 그에게 준 것인지 아니면 그가 빼앗아 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어쨌든 그는 황제가 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광의는 황제에 오른 후, 조덕소와 조덕방 형제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광윤의 황후는 불만이 많았다. 원래 자기의 아들인 조덕소가 황위를 승계해야 하는데, 순식간에 조광의에게 빼앗겨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조덕소는 숙부인 조광의를 찾아서 따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접점을 찾지 못했고, 게다가 조덕소는 성격이 강하여, 직접 금란전의 기둥에 머리를 부딛쳐 죽고 만다. 이제 조광의는 더욱 난감하게 된다. 형의 황위를 빼앗았을 뿐아니라, 형의 아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조광의는 형의 아들 중에서 조덕방만이 남은 것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보상하는 차원에서, 이 조카에게는 아주 잘해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같다. 내가 황제가 되었지만, 정의나 의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네가 의지할 곳이 없게 두지 않겠다. 그래서 그는 조덕방에게 8개의 왕의 작위를 내린다. 각각 천왕(天王), 지왕(地王), 재왕(財王), 수왕(水王), 행왕(行王), 화왕(花王), 현왕(賢王), 대왕(大王)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덕방을 '팔현황'이라고 불렀다. 


조덕방은 혼자서 8개의 황의 이름을 가졌고, 8개의 왕의 봉록을 받았다. 그러나 조덕방은 만족할 수 없었다. 어쨌든 8개의 왕을 가져도 역시 왕인 것이다. 황제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치대로라면 그가 황제에 올라야 했다. 조광의는 조카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금간을 하나 내린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구룡금간이다. 조광의는 팔현왕의 특권을 부여받는다. 이 금간으로 "상타혼군, 하타영신'을 할 수 있게 된다. 황제를 대려죽어도 단지 금간의 용 하나만 지우면 된다.


당연히 이것은 원래 전설이다. 그러나 나중에 민간에서는 가면 갈수록 그럴 듯하게 전해지게 된다. 그래서 팔현왕은 정기늠름의 상징이 된다. 그는 양가장, 포청천 등의 이야기에 나온다. 기실 이런 희곡은 모두 허구이다. 역사상의 조덕방은 23살때 이미 죽었다. 그리고 양가장과 포청천시대에는 조덕방이 살아있던 때도 아니다.


조덕방(959-981), 송태조 조광윤의 넷째아들. 송태종 조광의의 조카. 송진종 조항(趙恒)이 당형. 북송종실. 검교태보, 귀주방어사, 흥원윤, 산남서도절도사, 동평장사, 검교태위등을 역임했다. 태평흥국6년(981년) 병사하니 당시 나이 23살이다. 중서령, 기왕(岐王)에 추증되고, 강혜(康惠)의 시호를 받는다. 나중에 태사로 추증되고, 초왕, 진왕으로 다시 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