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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張良): 일개 서생으로 진시황암살을 도모하다

중은우시 2018. 2. 19. 00:22

글: 임염청추(林炎淸秋)





여러 제왕들과 마찬가지로, 진시황은 일생동안 여러번 암살을 당할 뻔한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것은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이다. 이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더 말하지 않겠다. 장량도 일찌기 진시황 암살을 모의한 바 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후 그는 유방을 도와 반진건한(反秦建漢)의 대업을 완성시킨다. 그리하여 한왕조의 개국공신이 되고, 한신(韓信), 소하(蕭何)와 더불어 한초삼걸(漢初三傑)로 불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장량을 알고 있는 것은 어렸을 때 그가 황석공(黃石公)의 신발을 주워주면서 뜻을 세운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진시황암살이 발생한 이후의 일이다. 장량은 전국시대 한(韓)나라 사람이고, 관료집안이었다. "장량이라는 사람은 그의 조상이 한나라 사람이다. 할아버지 장개지(張開地)는 한소후, 선혜왕 양애왕의 재상을 지냈고, 부친 장평(張平)은 리왕 도혜왕의 재상을 지낸다" 이를 보면 그의 집안이 얼마나 혁혁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고, 장량이 청년이 되었을 때, 한나라는 쇠망하여 멸망하게 되고, 진시황은 통일대업을 완성하고, 새롭게 역사를 쓰고 있었다. 그동안 분명히 살륙이 많았을 것이다. 역사에 따르면 장량의 집안에는 종만 해도 삼백명이 있었다고 한다.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동생이 죽었는데도 장례를 지내지 않고, 집안재산을 모조리 긁어모아서 자객을 구해 진시황을 암살하고자 한다." 그는 동이(東夷) 예국(濊國)의 군주 창해군(滄海君)과 교분을 맺는다. 예국은 고대 한반도 동부의 국가이다. 창해군은 그를 도와 대력사(大力士)를 구해준다. 그리고 대력사를 위하여 무게가 120근이나 나가는 대철추(大鐵錘)도 만든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이제는 기회를 보아 실행하면 되었다.


중원통일이후, 진시황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랏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가만히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주 외출하였다. 때로는 봉선(封禪)을 하고, 때로는 순유(巡遊)했다. 이는 민간에 그를 암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원전219년 진시황이 군현을 동순(東巡)하면서 봉태산(封泰山), 선양보(禪梁父)한다. 그리고 태산의 돌에 진나라의 공덕을 새긴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 법을 바르게 마들고, 신하들은 행동을 올바르게 했다. 이십년 하고도 육년이 되어, 처음 천하를 통일하니, 신하로 복속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친히 먼 곳의 백성들을 순방하고, 이번에 태산에 올라, 동쪽 끝을 둘러보았다."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이다. 장량은 진시황의 순유노선을 알아낸 후,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수레가 양무현(陽武縣, 지금의 원양현 동쪽)에 이르렀을 때 장량은 대력사를 양무현에서 반드시 지나가는 곳인 고박랑사(古博浪沙)에 매복시킨다. "고박랑사는 북으로는 황하(黃河)에 접하고, 남으로는 관도하(官渡河)에 접했다. 그리고 함양(咸陽)에서 동방으로 가는 치도(馳道)에 위치하고 있다. 망산(邙山)의 여맥이고, 도처에 사구가 이어져 있는 모양이며 일망무제여서 걷기가 곤란하다. 군대는 더더구나 행군이 느려진다. 사구에는 가시나무가 많이 자라고, 들풀도 없고 사람도 없다. 사구의 낮은 곳은 늪이다. 늪이 이어져 있었다. 사구는 쉽게 숨고 도망칠 수 있었고, 늪에는 갈대가 자라고 있어서 더더구나 몇걸음내에서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장량이 이곳을 선택하여 암살하려 한것은 지리적인 우세를 이용한 것이다.


"천자가육(天子駕六)은 중국고대의 예제이다. 즉 황제급의 인물은 6필의 말이 수레를 끌게 된다. "천자가육, 제후가오, 경가사, 대부삼, 사이, 서인일" 즉 천자는 여섯마리, 제후는 다섯마리, 경은 네마리, 대부는 세마리, 사는 두 마리, 서인은 한마리가 끈다. 그래서, 장량은 대력사에게 목표를 여섯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치도록 한다.


진시황의 수레대오가 호호탕탕하게 박랑사로 들어왔다. 장량과 대력사는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수레를 네마리의 말이 끌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어느 수레가 진시황이 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량은 할 수 없이 즉석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래서 대력사에게 수레중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것을 습격하게 한다. 철추로 내려치자 수레는 박살이 나고, 수레에 탔던 인물은 즉사한다. 그러나 진시황이 아니라, 그의 대역이었다. 장량은 머리를 다 짜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바로 현장을 벗어나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황제의 보안조치는 일개서생이 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번 암살을 당하고,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구르다보니 진시황은 단지 정치가일 뿐아니라, 말그대로 음모가였다. 비록 암살은 면했지만, 진시황은 대노한다. "천하에 영을 내려 10일마에 찾아내도록" 한다. 장량은 운이 좋았다. 그가 성공적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자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용모가 부녀같았다." 아마도 그래서 여자로 변장했을 것이다.


이렇게 역사상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서 박랑사는 천하에 명성을 떨친다. 이 곳은 이런 별명이 붙는다: "장량자진처(張良刺秦處)"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한 곳. 혹은 "장자방격진처(張子房擊秦處)" 장자방(장량)이 진왕을 친 곳. 지금은 신향시의 중정문화재보호지역이 된다.


장량은 하비(下), 즉 지금의 강소성 수녕현 고비진으로 도망친다. 그후에 황석공을 만나서 유명한 황석공의 신발을 주워주는 이야기가 탄생한다. 황석공은 그에게 책을 주면서, "이것을 읽으면 왕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장량은 <태공병법>을 깊이 연구한다. 말마려병(秣馬勵兵, 칼을 갈고 말을 길러서 전쟁을 준비하다), 침과대단(枕戈待旦, 창을 베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다)한다. 진나라말기, 진승오광이 반안을 일으킨 후, 장량도 천명을 끌어모아 호응한다. 얼마 후 그는 강력한 유방에게 의탁한다. 그리고 유방의 군사가 되어, 운주유악, 결승천리한다. 유방에게 많은 계책을 내놓아 유방이 전략을 세우도록 도와준다.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전투이건, 아니면 초한전쟁이건, 장량은 모두 큰 공을 세운다. 그는 군사적으로 유방을 보좌했을 뿐아니라, 일처리에서도 유방을 지도했다. 함양시를 점령하고 유방이 진나라궁전의 호화스러움을 보고 떠나고 싶어하지 않자, 장량이 그에게 향락을 탐하지 말라고 권한다: "진나라가 무도하여, 패공께서 이곳에 이르렀다. 무릇 천하의 잔적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검박해야 한다. 지금 진나라에 들어왔는데 거기에 편안하게 눌러앉아 즐기려고 한다면, 이는 '조걸위학(助桀爲虐)'하는 것이다." 유방은 즉시 군대를 패상으로 돌리고 진나라군민의 지지를 얻어낸다.


유방이 황제에 오른 후, 장량을 유후(留侯)에 봉한다. 유방은 출신이 미천하여, 건걱시의 대신들은 대부분이 포의(布衣)였다. 심지어 깡패나 무뢰배도 적지 않았다. 덕과 재주를 겸비한 장량은 군계일학격이었다. 유방은 자연히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잘 대우해준다. 그러나, "장량은 원래 병이 많아서 황상이 관중에 들어간 후, 음식을 먹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집안이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고, 이제 한나라가 멸망했고, 만금의 돈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하여 진나라에 복수를 했고, 천하를 진동시켰다. 이제 세치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어 만호후에 봉해졌으니 이는 포의로서 최고 높이 오른 것이고 장량은 만족한다. 원컨데, 인간세상의 잃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서 놀고 싶다." 장량은 공을 이룬 후에 물러나는 것을 선택하고 산야에 은거한다. "그리하여 자방은 신선에 맡기고 인간을 버렸다. 공명등은 신외지물로 여기고, 영리도 신경쓰지 않았다. 소위 명철보신(明哲保身)한 사람으로는 자방이 있다."


진시황을 암살하는 큰 용기로부터 공을 이루고 물러나는 큰 지혜까지, 역사상 제일군사인 장량은 심모원려, 창현종용(彰顯從容)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초기의 공신중에서 장량이 가장 행운아였다. 그는 평안하게 살았고, 격류용퇴할 줄 알고, 버릴 줄 알았다. 이것은 큰 지혜를 나타낼 뿐아니라, 공을 이루고도 그것에 눌러앉지 않으려는 풍격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