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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일본역대 수상중 12명은 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장풍(蔣豊)

 

전쟁은 역사를 바꾼다. 전쟁은 운명을 바꾼다. 전쟁은 국가의 명의로 진행하는 살인이다. 120여년전의 그 청일전쟁은 중국일본 양국의 국력과 지위에서 역전이 발생했을 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운명도 바뀌어 버렸다.

 

이 청일전쟁은 일본의 여러 수상을 만들어 낸다. 그들의 공명은 모두 중국인의 치욕과 백골 위에서 쌓여졌다.

 

일본 제1대, 제5대, 제7대, 제10대 수상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청일전쟁의 전과정에 참여했다. 모든 일본메이지정부와 전시대본영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그는 모두 참가하여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을 했으며 이 전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일본 제3대, 제9대 수상을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은 수상이 된 후에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나서서 병력을 지휘했다. 1894년, 그는 제1군사령관의 신분으로 청일전쟁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지휘하여 청군을 격파하고 평양을 점령한다. 그후에 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경내로 진입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싸우면 싸울수록 흥분하여 심지어 군대를 이끌고 북경성까지 진격하고자 했다. 이 구상이 실현되었더라면, 서태후는 일생동안 아마도 세번 북경성밖으로 도망쳐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할 만한 점은 야아가타 아리토모는 일본군이 여순(旅順)을 점령하여 메이지천황의 포상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천황에게 의외의 기쁨을 바치기로 결정한다. 일본군 전시대본영의 동의도 받지 않고, 그는 군대를 이끌고 단동에서 수암(岫巖)을 거쳐 요녕남부의 중요도시 해성(海城)으로 진격한다. 이러한 거동은 당시의 수상 이토 히로부미를 불쾌하게 만든다. 이토는 '이것은 최고총사령부에 대한 반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본영으로 하여금 야마가타의 독단을 제지하도록 제청하고, 천황을 설득하여 조서를 내린다. 야마가타의 제1군사령관 직위를 박탈한 것이다. 조서를 받은 후, 야아가타 아리토모는 실망하여 이렇게 쓴다: "무내천자소하급(無奈天子召何急), 임별진전루만의(臨別陳前淚滿衣)"

 

청일전쟁이 끝날 때쯤, 그는 <군비확충의견서>를 써서 이렇게 말한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번 전쟁을 통하여 우리는 해외에서 새로운 영지를 얻었다. 그렇다면, 군비를 확충하여 새로운 영지를 수비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하물며 연전연승의 승기를 잡아 바로 동양의 맹주가 되어야 한다."

 

일본 제4대 제6대 수상을 지낸 마츠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는 청일전쟁이 시작될 때 전임수상의 신분으로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 이토 내각의 사람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그는 북경을 점령한다면 명성을 떨치겠지만, 실제이익은 대만을 점령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이렇게 강조한다. "오늘 대만을 점령할 수 없다면, 앞으로 영원히 점령할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일본11대, 13대, 15대 수상을 지낸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정반대로 먼저 청일전쟁에 참전하고 나중에 수상이 되었다. 1894년, 제3사단장으로 있던 가쓰라 다로는 동원령을 받은 후, 기뻐서 말한다; "대장부에게 이보다 기쁜 일이 없을 것이다.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 이번에 달렸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진입해 들어간다. 해성전투, 우장전투에서 청나라의 회군과 상군을 격파하는데 사력을 다한다. 전시에 메이지천황의 통보가상을 받고, 전후에 삼등금치훈장(三等金鵄勳章)을 받고, 자작(子爵)이 된다.

 

일본12대, 14대 수상을 지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청일전쟁때 임시대리외무대신을 지낸다. 1895년 10월 그는 "삼국간섭"을 직접 처리한다. 친히 삼국공사에게 비망록을 제공하고, 자신은 "독일, 프랑스, 러시아등 3국공사에게 비망록을 전달하여 정부의 명의로 아래와 같이 통지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일본제16대, 22대수상을 지닌 야마모토 곤노효예(山本權兵衛)는 청일전쟁때 해군대신 부관등을 지낸다. 1894년 7월 25일 풍도해전후, 그는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스게유키(伊東祐亨)의 작전보고서를 받고 친히 집필하여 원문 <상대방은 전투준비를 마쳤다"를 상대방은 "어뢰를 우리에게 발사했고, 이로 인하여 우리는 응전을 개시했다"로 바꾸었다. 전쟁의 정당화를 기도하고, 침략전쟁을 자위전쟁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다.

 

일본18대수상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일찌기 내전 - 서남전쟁에 참전했다. 오른손에 전상을 입어 행동이 불편하므로 그 후부터는 왼손으로 경례를 했다. 그래서 별명이 "좌경례(左敬禮)"가 된다. 청일전쟁기간동안 그는 일본군 병참의 최고책임자 운수통신장관을 지낸다. 나중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전공'으로 1895년 소장으로 승진한다.

 

일본19대수상을 지낸 하라 다카시(原敬)는 청일전쟁때 외무부 고관을 지낸다. 일찌기 중국대만을 통치하는 근본방침의 작성에 참여하고, 1985년 2월, 청일간의 담판이 지연되자, 하라 다카시는 "해군은 2,3일전에 웨이하이웨이를 함락시켰고, 육군의 진군은 아직 따라가지 못했다. 국민들은 원정에 대하여 아직도 피로한 뜻이 없는 오늘, 강화가 성립되지 않으면 오히려 유리하다...."고 보고한다.

 

일본20대수장을 지낸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는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 아직 일본은행 서부(馬關) 지점장이었다. 그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환호작약한다. "삼국간섭'에 대하여는 이를 갈았다. 청일전쟁이후, 그는 정부에 중국배상금을 준비금으로 하여 금본위제도로 바꾸어 시행하자고 한다. 일본엔화를 황금과 연결시켜 발행하는 것이다.

 

일본21대수상을 지낸 가토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郞)는 사무라이가정 출신으로 해군에서 활약한다. 청일전쟁시기에 그는 제1유격대의 기함 '요시노(吉野)"호의 포술장으로 풍도해전때 일본함을 지휘하여 중국군함을 돌파한다. 그리고 중국운송선을 침몰시킨다. 황해해전에서 친히 '요시노'호를 지휘하여 북양수군의 유명한 '치원(致遠)"호를 격침시킨다. 그가 1923년에 수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공로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26대수상을 지닌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는 청일전쟁때 일본군 제2군 제1사단을 따라 요동반도로 들어가서 당시 사단참모를 맡는다. 얼마후 중위에서 상위로 승진한다. 11월, 여순전투에서, 그는 친히 <작전동원계획>을 제정하고, 히로시마에 설치된 대본영에서 이를 채택한다. 이로 인하여 대위로 승진한다. 전후에 육군참모본부에 들어간다.

 

일본제40대수상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부친인 도조 히데노리(東條英敎)는 청일전쟁때 일본대본영 참모를 지낸다. 일본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를 도와 전략을 짰다. 그는 대형상선을 군함으로 개조하여 일본해군의 총톤수를 늘일 것을 주장하고 동시에 육군과 해군의 공동작전을 제안한다.  이 두 가지 조치로 일본군의 작전능력은 크게 증강된다. 나중에 아들도 아버지를 본받아 중국을 친다.

 

일본제42대수상인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는 청일전쟁의 웨이하이웨이포위공격작전때 제3어뢰함대 6호정의 정장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파도를 넘어 북양함대가 엄밀하게 방어하는 항구로 돌진해 들어간다. 84식 어뢰로 원동제일거함 북양함대의 기함인 '정원(定遠)'로를 항구 안에서 격침시킨다. 스즈키 간타로는 이로 인하여 명성을 크게 떨친다. 나중에 수상이 되는데 공적의 하나를 쌓은 것이다.

 

이들 이름을 기억하자. 이토 히로부티,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야마모토 곤노효에, 데라우치 마사다케,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다나카 기이치, 스즈키 간타로, 이 열두명의 일본수상은 모두 청일전쟁때 참여했고 일찌기 중국과 싸운 적이 있다.

 

일본이 강대해지고 자아팽창한 것은 청일전쟁에서부터이다. 그래서 갑오년이 돌아올 때 일본수상 아베 신조(安培晋三)를 대표로 하는 일본은 흥분과 역사의 모순에 빠졌다. 그들은 불만이 많고 아시아에서 두 강국이 병존하는 국면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상대방을 땅바닥에 쓰러뜨리면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