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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2차대전후 만주의 100만 일본포로와 일본교민은?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배의연(裴毅然) 

 

1905년 러일전쟁후, 일본세력은 동북으로 침입한다. 여순, 대련을 기점으로 하여, 남만철도를 중심으로 점차 철로연도의 양측으로 이민자들이 들어간다. 1920년 심양의 일본교민은 5만명이 되지 않았다. "9.18"후 1년도 되지 않아, 15만명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일본군대본영의 중국침략계획에 만주,몽골은 그들의 광활한 식민지일뿐아니라, 그들이 의지해야할 후방이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을 만주로 이민시킨 것은 심원한 '전략적의미'가 있는 것이다. 1927년 7월, 악명이 자자한 다나카(田中)의 보고서는 '만주와 몽골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논의한 것이다.

 

일부 이미 만주로 이주한 일본낭인(浪人), 즉 '중국통'들은 중국인거주지역에 섞여 살면서 감시업무를 수행한다. 그들은 일본특무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중국인의 생각과 활동을 보고한다. 그외에 그들은 아편, 커피를 판매하고, 도박장, 아편관, 기원을 개설하여 중국인을 해치고 돈을 긁어모았다.일본교민을 만주에 배치시킨 것은 일본군의 전략적 필요에 기한 것이다. 남만에 밀집되어 있었고, 북만에는 희소했다. 대도시가 소도시보다 많았다. 소도시는 시골보다 많았다. 공장광산이 있는 곳이 많았다. 시골에는 일본낭인을 제외하고 일본교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1945년 8월, 일본은 2차대전에서 패배하여 투항한다. 무기도 내려놓았다. 50만 관동군(關東軍)은 소련군이 러시아로 끌고 가서 노동에 투입한다. 그러나, 부르지도 않았는데 들어온 일본의 관리, 헌병 및 이민자들은 어떡할 것인가? 국민정부는 송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동북지방에만도 송환해야할 일본교포 및 일본포민이 100만이 넘었다. 장춘의 일본교민연락처주임 가와시카 다케오(川島武夫)는 이렇게 말한다: "1931-1945년, 14,5년동안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기초를 닦기 위하여, 일본인들을 죽어라 동북삼성으로 이주시켰다. 이 시기에 동북삼성으로 온 일본인은 20여만에서 110여만으로 증가한다. 여기에는 30만 일본군대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점령시기에 동북 각 대도시의 환경이 아름다운 지역은 대부분 일본인주택지구였다. 장춘의 남호공원(南湖公園), 심양의 대서로(大西路), 만상공원(萬象公園), 관동군총사령부부근지구가 그것이다. 일본군영부근은 더더욱 '일본국'이었다. 중국행인이 다니지 못하게 막았다. 여순, 대련은 아예 중국어로 된 광고와 간판, 길표지, 도로명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심양일본교민연락총처의 1946년 통계에 따르면, 하르빈, 치치하르, 자무쓰등의 일본교민이 25만 - 30만이었다; 장춘, 길림, 심양, 안산, 무순, 금주, 부신등지가 90만이다; 여순, 대련, 영구, 봉성등지가 약 20만이다, 여기에 내몽고의 약 12만을 합치면 합계 150만-160만에 이른다. 일본의 투항전에 국내로 도망친 고관가족과 부유한 일본인이 15만-16만이다. 남은 일본교민은 대부분 군속, 의무후방근무요원, 기술자, 교사, 상인, 서비스인원이고 그중 부녀가 70%, 아동이 10%, 노약자 장애자가 4-5%를 점했다. 나머지는 장년남자였다. 부녀중에는 영기(營妓), 무녀(舞女). 가녀(歌女), 기녀(妓女)가 약 30%를 점했다.

 

일본은 동북에서 노예화통치를 실시했다. 한 두가지 작은 사례를 들어보면, 첫째, 사평(四平)의 동쪽교외에 한 중국어린이가 방학하여 집으로 가다가 한 일본소학생을 만났다. 이 일본소학생은 중국어린이의 뺨을 두 대 때리고는 당당하게 떠났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말리지를 못했다. 둘째, 1942년 음력 설날 전날, 진노삼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새해음식을 사러 갔다. 손자가 같은 학교학생을 만나서 일본어로 얘기했는데, 동작이나 표정이 일본아이같았다. 진노삼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너희 이놈들.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너희는 중국인이다. 어찌 일본어만 하고 중국어를 하지 않느냐." 아이가 대답한다. "중국인은 나쁘고, 일본인이 좋다고 선생님이 말했다. 중국인은 돼지처럼 멍청하다고." 진노삼은 화가 나서 손자를 끌어와서 마구 때렸다. 지나가던 두 일본헌병이 경위를 물어보고는 그 자리에서 진노삼을 끌고 간다. 반일사상범으로 소풍만집단수용소에 넣었다. 진노삼은 나중에 중한 형을 받고,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눈더미속에서 죽어갔다...

 

이런 역사배경하에, 송환전에 국민당정부는 각지의 군중들에게 송환장소에서 원한을 지닌 일본포로가있으면 얘기하도록 하고, 서면으로 검찰에 제출하도록 고발박스를 걸어놓았다. 그러나 각지에 접수된 고발서신은 겨우 1,2백통에 불과했다. 그래서 붙잡은 전범도 겨우 1,2백명이다. "이런 비율은 정말 웃기는 것이다.' 비록 당시 동북의 백성들은 일본인이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고 우려하였지만, 즉, 중국군대가 장기간 동북을 지켜줄 수 있을지 우려했지만, 이는 어느 정도 중국인들의 보복심리가 그다지 강하지 앟다는 것을 말해준다. 14년간이나 점령당하고, 여순, 대련지구는 심지어 40년에 달했는데, 집단보복을 요구하지 않고, 대다수의 일본포로와 일본교민들을 나누어 대우해준 것이다.

 

장기간 중국에 거주하다보니, 상당한 일부의 일본교민은 귀국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특히 동북에 사업이 있는 사람은 귀국후에 일자리를 찾지 못해 생활하기 어려울 것을 우려했다. 심양에만 200여명의 일본교민이 남는데, 그중 50여명은 중국의 기술전문가로 사칭한다. 그들의 중국어는 뛰어나서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고, 생긴 모습도 중국인과 똑같았다.

 

일본부녀들은 더더욱 귀국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젊은 여자들이 그러했다. 중국에 남고자 하는 바램이 강렬했다. 그리하여 앞다투어 중국남자와 결혼한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나이만 비슷하면 결혼을 했다. 이 시기에 중국인에게 시집간 일본여인의 비율은 이전 십여년의 총합계보다도 몇 배나 많았다. 국민당 동북행원 "일본교민포로관리처"의 처장 이수업에 따르면, "일본부녀들을 귀국시키는 것은 당시에 어려운 일이었다. 중국인과 동거하는 사람도 있고, 직장이 있는 사람도 있어, 귀국을 원치않았다. 당시의 추산에 따르면, 약 10만명이상이 그러했다" 적지 않은 국경을 초월한 사량을 하던 사람들은 생이별을 하여 아주 처참했다. 그리고 어떤 중국군인은 군적을 포기하고, 일본교민을 사칭하여 일본국적 여자친구와 함께 일본으로 가기도 했다.

 

일본여인들중 중국인에게 시집간 경우에는 중국에 남았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일본 국내에 남자가 부족했다. 전쟁으로 남자들은 전쟁터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귀국하여 남자를 찾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남자가 많이 모자라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민정부는 동북지방인민의 부담을 줄이고, 하루빨리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빠른 시일내에 일본포로와 일본교민을 귀국시키려 한다. 왜냐하면 백만명이 하루를 더 체류하면, 1인당 양식을 1.5근씩 소요한다고 치더라도 150만근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노력을 다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가동하여 송환을 서둘렀다." 호로도는 매일 1만-1.5만명의 일본인을 보냈다. 1946년 11월말, 마지막 배가 항구를 떠난다. 백만의 일본포로, 일본교민의 송환업무가 이제야 끝난 것이다.

 

일본포로, 일본교민은 칼을 들고 중국에 았다. 지금은 중국인들이 평안하게 돌려보냈다. 송별회에서 중국관리는 그들에게 다음에는 우의를 가지고 오기를 희망했다. 어떤 일본인은 통곡하며 참회했고, 어떤 사람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비록 패전했지만, 여러해동안 길러진 대화민족의 자만심은 적지 않은 일본포로, 일본교민으로 하여금 정복자의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실패감을 느끼지 않고, 그들은 중국인에게 진 것도 아니고, 미국소련에 진 것도 아니며, 투항은 그저 천황의 권의지계(權宜之計)에 불과하며, 본토가 심각하게 파괴되는 것을 막고, 국력을 보존하여 전쟁을 마치는 것은 나중에 국위를 다시 떨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송환선이 부두를 떠나면, 배에 탈 때는 감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금방 육지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이를 갈며, 노기충천한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의 몇 척의 송환선이 부두를  떠날 때, 많은 일본인들은 소리높여 외쳤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온다. 기다려라."

 

이제 6,7십년이 지났다. '돌아오겠다'던 일본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다시 군함을 몰고 돌아올 수는 없다. 1953년이후, 중국은 근 4만의 일본교민을 귀국시킨다. 요녕, 무순의 전범관리소는 기한을 앞당겨 일본전범을 석방시켜 귀국시켜준다.

 

1970년이후, 어떤 일본인들은 다시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과 우의를 가지고 왔다. 그중 자연히 어떤 사람들은 다른 생각으로 오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6,7십년전에 중국정부는 백만의 일본인포로와 일본인교민들을 송환했고, 단지 200명도 되지 않는 만주의 일본인을 처벌했다. 전승국이 이처럼 이성적으로 자신의 치욕사를 정리하고, 이렇게 덕으로 원한을 갚은 국가행위에 대하여 오늘날 절대다수의 일본인청년들은 아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