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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화타)

화타(華佗)는 실존인물일까?

by 중은우시 2012. 1. 8.

글: 주휘(朱輝)

 

신의 화타에 관하여 역사상 계속하여 논쟁이 있어왔다. 도대체 화타라는 사람이 존재했던가? 화타는 중국인인가, 인도인인가, 페르시아인인가?

 

사실 이럴 유형의 논쟁을 통하여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정리할 수 있다. 중국의 신선은 대부분 범인의 신분을 지닌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종규(鍾馗), 장과로(張果老), 여동빈(呂洞賓)....이들은 일찌기 어느 시대에 존재했었던 신선의 '육신'은 그저 이들을 담은 물건에 불과하다. 후세인들이 그들의 '육신'을 연구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은 그저 신선이 된 그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마찬가지 이치로, 신의 화타는 이미 중의(中醫)분야에서 신이 되었다. 일찌기 동한 말기에 존재한 '육신'의 화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역사상 개략 '화타'라고 불리는 인물이 확실히 존재했었던 것같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따지자면, 안휘성 호주시 초성구의 사람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화씨집안이 원래 현지의 명문집안인데, 화타가 출생할 때는 이미 집안이 기울었다. 그래도 여전히 학문이 있는 그들이 왜 이름은 기괴한 글자를 골랐을까? "타(佗)"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글자이다. '지다. 싣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부친이 그가 중임을 맡을 것을 기대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중국고대에 문인들의 활약이 많았다. 이는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문자자료가 다른 문명고국보다 훨씬 많다는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인들은 자주 경계를 넘어 역사, 의학분야에 들어가는데,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망치는 경우가 많다. 화타에 대한 지나친 과장은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후한서.화타전>에서는 화타를 이렇게 묘사한다: "나이가 백세인데도 여전히 장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신선이라고 여겼다." 어떤 사료에서는 화타의 나이가 백오륙십세가 되어서까지 육십세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신기한 이야기는 오히려 화타에 대한 기재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장수를 한 것 이외에 화타의 출신입화의 외과수술도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현재의 상식대로라면, 동한말기에 내장수술을 하였다는데 믿기 어렵다. 날카로운 도끼로 두개골을 열어서 수술을 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다. 고대에는 화학실험으로 혈액형을 알 수도 없어, 수혈을 할 수 없는데, 외과수술중에 피를 흘리면 어떻게 피를 보충할지? 날카로운 도끼로 두개골을 열려면 그 힘은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산소호흡기도 없고, 심장박동기도 없으므로, 수술성공가능성은 거의 0일 것이다.

 

"네가 믿든 안믿든 나는 믿는다." 화타의 신기한 외과수술에 대하여 많은 중의들은 믿고 있다. 그들은 화타가 혼자 공부해서 이런 절세의술을 익혔다고 본다. 그의 외과수술능력은 아마도 몇개의 버전을 지나면서 현대를 넘어선 수준까지 올라간다. 그는 마비산이라는 약을 수술전에 먹여서 마취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침구로 지혈을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수술후에는 신기한 중초약으로 감염을 예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화타이후, 중의의 외과수술수준은 크게 퇴보한다. 그것은 화타가 죽기 전에 필생의 의술 정화를 담은 <청낭경>을 옥졸에게 남겼는데, 옥졸은 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화타의 <청낭경>은 불에 타버리고, 중의는 대폭 후퇴된다.

 

화타는 사부가 없었다. 완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익힌 것이다. 그렇다면, 그후 기나긴 일천여년동안, 왜 다시는 화타같은 중의의 외과고수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지금 일부 중의의 해석은 봉건예교의 속박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는 분위기하에서, 배를 갈라서 여는 것은 절대로 불효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타가 당시 여러번의 인체해부를 해보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복잡한 인체구조릉 장악하고, 대뇌의 구조를 장악했을까? 봉건시대에, 그는 어떻게 하여 해부할 수 있는 시신을 마련했을까? 사회여론의 압력은 없었을가?

 

화타의 의술은 여러 곳에서 과장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천백년이래로, 여러 중의종사자들에게도 의심을 받았다. 진인각 선생은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화타의 사적은 실제로 인도신의 기역(耆役)의 이야기이다. 화타와 동시대인인 '조충칭상(曹沖稱象)"이야기도 인도불교전설에서 왔다. 진인각의 이런 주장은 일정한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과 관련되는 일이면 문학성이 진실성보다 크다. 역사상 확실히 화타라고 불리는 명의는 존재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를 신의로 받든다. 그리고 여기여 여러가지 양념을 치듯이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러다보니, 갈수록 사람같지 않게 된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니, 오히려 화타가 원래 존재했었던가, 허구의 인물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