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항우의 숨겨둔 보물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9. 6. 4.

글: 문재봉(文裁縫)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의 가암가도(柯巖街道)에 있는 항리촌(項里村)에는 항우의 숨겨진 보물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항우가 강동에서 거병하기 전날 항리촌에 12면금라(十二面金)를 묻어두었는데, 이 12면금라를 찾으면 마을의 동쪽 초만산(草灣山)에 새겨둔 신비한 부호를 해석할 수 있고, 그 부호를 해석하면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찌기 어떤 사람이 자신이 보물이 숨겨진 곳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높은 가격에 팔겠다고 제시한 적도 있고, 어떤 사람은 여러가지 서로 다른 해독방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12면금라의 가치는 도대체 얼마인지, 어디에 묻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1. 신비부호를 해석하는데 150만위안을 요구

 

2005년 여름, 절강 소흥 여유국(旅遊局, 관광국)의 부국장인 노석당(魯錫堂)은 편지를 몇 통 받았다. 모두 현지 시, 현의 관련지도자들이 전달해준 것이었고 모조리 한 사람이 보낸 것이었다. 그 사람은 편지에서 누구든지 150만위안을 내면, 그가 즉시 항리촌의 부호의 비밀을 풀어주겠으며, 이 150만위안은 자신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에 쓸 것이라고 하였다.

 

이 신비인의 면사를 벗기기 위하여, 노석당은 편지에 쓴 연락처로 상대방과 전화를 통해서 연락했다. 그는 그 사람이 말하는 하나하낭서 고문화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듣기에 그럴 듯해 보였따. 노석당은 그 이외에도 시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신비인'을 접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은 '신비인'의 신분을 노출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가치가 150만위안이 되는 비밀해독방법은 '신비부호'의 진실성에 대한 소문과 함께 현안이 되었다. 노석당은 사실을 확실히 파악하기 전에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비인'의 미친 소리에 대하여 노석당 및 소흥현의 여유국등 관련부서에서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노석당은 그러나 이렇게 말했다: "그가 150만위안을 달라고 한다고 해서 150만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거기에서 무슨 가치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러나,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뒷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만일 그저 신비부호를 해석하는데만 150만위안이라면, 그 부호를 따라가면 얼마나 큰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말일까?

 

초만산은 소흥의 유명한 경승지인 두무첨(豆霧尖)의 북록(北麓)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약 70미터이고 동서로 400미터의 길이이다. 산의 서쪽에는 새로 만든 항우묘가 있고, 산위에는 두터운 관목림으로 뒤덮여 있다. 그래서 산자락의 아래가 바로 항리촌이지만, 촌민들이 산에 오르는 경우는 드물다. "항우보물도"는 바로 인적이 드문 초만산의 한쪽 귀퉁이에 있다.

 

부호가 새겨진 돌맹이는 불규칙힌 5변형 돌이다. 대들보형태로 청회색이며 산허리에 있다. 마치 거대한 거북의 등껍질같다. 개략 5미터 길이인데 가장 넓은 곳이 3미터이고, 가장 좁은 곳이 1.5미터이다. 돌위에는 옅은 이끼가 끼어 있다. 소위 "항우보물도"는 바로 이 돌맹이에 새겨진 부호이다. 날카로운 것으로 새겼는데, 깊이는 7,8센티미터이고, 너비는 약 5센티미터이다. 새겨진 필획은 가로, 세로로 되어 있다. 몇 개의 크기사 서로 다른 구(矩)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부호의 양식은 오래되어 보이는데 전서도 아니고, 금문도 아니다. 전체 도형은 무슨 글자를 쓴 것같지는 않고 무슨 주택의 평면도와 같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체 부호의 표면은 이미 거칠어졌고, 필획의 변은 이미 매끄러워졌다.

 

만일 이 '보물도"가 항우가 남긴 것이라면, 최소한 2천여년간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왜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던 것일까? 현지 촌민의 말에 따르면, 초만산위의 신비부호는 항우가 남긴 "보물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당시 항우는 "보물도"를 몇 개의 돌맹이에 나누어 새겼는데, 이 "보물도"를 진짜 해독하려면 반드시 다른 "보물도"까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보물도들을 합쳐 보아야 비로소 비밀이 풀린다고 말한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보물도"는 도대체 몇 개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 항리촌의 촌민들도 아무도 모른다.

 

마을의 호사가가 "보물도"의 다른 부분을 찾으려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유일하게 발견된 것은 바로 초만산의 그 조각들이다.

 

그렇다면, 12면금라는 또 뭐란 말인가?

 

2. 항우가 거병할 때 금라를 주조하다.

 

항우(기원전232년-기원전202년)의 이름은 적(籍)이고, 자는 우(羽)이며, 진하상(秦下湘, 지금의 강소성 숙천 숙성구) 사람이다.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하며, 양초9군을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그의 조부인 항연(項燕)은 초나라의 명장이다. 일찌기 항우는 숙부인 항량(項梁)을 따라 진나라에 반대하는 의거에 가담한다. 항량이 진나라군대에 피살된 후, 항우는 거병한 군사를 이끌고 계속하여 반진활동을 벌였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는 유방과 천하를 다투는데, 홍문연에서 항우는 '아보(亞父)" 범증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을 풀어준다. 결국 항우는 유방의 대장군 한신에게 해하에서 패하고, 오강에서 자결한다.

 

<<사기. 항우본기>>에 따르면, 항우는 숙부 항량이 범죄를 저질러, 두 사람이 함께 오중으로 피난가고, 한동안 회계일대(즉, 소흥)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항리촌의 일대에서 은거하였고, 현지 촌민들의 비호를 받았따. 그후 그들은 몰래 실력을 키워, 병력을 모으고, 말을 구입하여, 금방 8천의 강동자제들이 부근에서 훈련을 하게 된다. 12면금라를 주조하고 밤낮으로 훈련을 계속했다. 거병전날, 항우는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사병들에게 산위에 밤을 새워 12면금라를 묻도록 지시했다.

 

소흥 현지에서 최근이 출판된 감호시리즈총서에서는 항우와 항우보물의 전설에 대하여 더욱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다. 책에서 이렇게 썼다: "반진활동을 위하여, 항우와 숙부 항량은 항리 일대에서 구귀족자제 8천여명을 모집하고, 12면금동라를 가지고 전투를 훈련시키고 무술을 익히게 했다. 이 12면금동라는 정교하게 만들어서 아주 멋있었다. 각각 80%의 황금과 20%의 황동을 합하여 만든 것이다. 라(鑼, 징)는 바퀴만큼 컸고, 소리가 크고 맑았다. 뒤에는 12생초도(生肖圖)가 주조되어 있어서 가격이 엄청난 것이었다. 시간은 금방 흘렀고, 항우는 항리의 백성들과 헤어질 때가 되었따. 그는 12면금동라를 항리에 남겨두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사병들에게 깊은 밤에 항리 초만산부근에 구덩이를 파서 12면금동라를 묻게 한다. 그 후에 초만산에는 부호를 새긴다. 만일 누구든지 이 글자를 해득하면, 가치가 적지 않은 12면금동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소흥현이 월국문화박물관에 있는 <<강희회계현지>>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항량, 항적은 회계의 우두머리 은통을 죽이고, 회계에서 거병한다. 여기서 말한 회계는 바로 소흥부근이며, 항적은 바로 항우를 가리킨다. 2000년전에 항우와 그의 숙부 항량은 회계현의 두령 은통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마을의 몇몇 노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항리촌의 명칭은 항우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이뿐아니라, 항리촌에는 항우묘도 건설되어 있다. 현지백성들은 그를 항우보살이라고 부른다. 이 습속은 이미 몇백년간 전해내려오는 것이다. 항우를 위하여 사묘를 짓는 것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여러가지 이런 현상들을 보면, 항리촌과 서초패왕 항우간에는 역사적인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차바퀴처럼 큰 12면금라는 도대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을까?

 

1973년이래로 섬서 진시황 병마용갱에서 대량의 전차가 출토되었는데, 일부 전차의 차바퀴는 직경이 1.4미터가량이다. 만일 '라'가 차바퀴만했다고 한다면, 항우가 당시에 12면금라를 묻었다는 것인데, 하나가 직경 1.4미터라고 한다면 지금으로 치더라도 적지 않은 크기이다.

 

동라는 중앙부분이 약간 높고, 그 크기나 두께 및 면적비례로 동라의 소리가 높고 낮음이 정해진다. 당시 항우는 12면금라를 만들어 군대를 훈련시키는데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진나라말기에 동라의 제조수준에 대하여는 의문을 표시한다.

 

당시 공법으로서 1.4미터까지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1.4미터의 동라라면 개략 150-160근이 되는데, 만일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이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동라를 주조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동라의 원시가공공법은 철추로 두드려서 만드는 것이다. 현대화된 생산공법에서는 공기추를 보편적으로 사용하지만, 현재의 동라직뎡도 최대한 1.5미터 정도까지 가공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전문가들은 진나라말기의 기술수준으로는 동라의 직경이 기껏해야 70-80센티미터를 넘지 못했을 것으로 본다.

 

항우가 12면금라를 묻었다는 전설에서 현대의 전문가들이 가장 회의적인 것은 제작공법이 아니라, 금의 함유량이다. 일찌기 춘추전국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은 홍동(紅銅)와 주석을 가지고 향동(響銅)을 만들어 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증후기편종은 바로 향동으로 주조해서 만든 것이다. 동라가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구리와 주석을 합금가공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배합비율은 구리가 77.5%, 주석이 22.5%이다. 이 배합비율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다. 만일 80%의 금과 20%의 동으로 만들었다면 그 금라는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고, 아주 무를 것이다.

 

황금의 경도는 아주 낮아서, 금함유량이 80%에 이른다면, 동라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것은 병사를 훈련시킬 때 신호를 보내는 기능은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서초패왕이 당시에 항리촌의 백성들에게 남긴 것이 금라가 아니고, 12면금라는 직경이 1미터에 미치지 못하는 동라라는 말인가?

 

만일 라가 아니라면, 당시 항우는 무엇으로 군사훈련의 신호를 삼았을까? 중국고대에 이런 말이 있다: 격고명금(擊鼓鳴金). 부대를 지휘하는데 두 가지 신호형 악기는 부대에게 앞으로 전진하고 돌격하라고 할 때는 북을 쓰고, 철수하라고 할 때는 금을 쓴다. 현재 알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금이라는 것은 순우(錞于)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순우는 금라와 차이가 너무나 크다. 왜 전설에서 항우가 묻은 보물이 12면금라라고 하는 것일까? 순우라고 하지 않고. 음악연구의 전문가들은 그 비밀을 이렇게 풀었다.

 

생각해보라, 현재 백성들은 고고학적 지식이 전혀 없으니, 순우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만일 이 이야기가 구전으로 현대까지 내려왔다면, 아주 손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꾼은 소래를 내는 악기으 이름을 순우가 아니라 금라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전설에서의 '라'는 실은 '라(징)'처럼 소리를 내는 악기 즉 순우를 가리키는 것이지, 오늘날의 '라'는 아닌 것이다.

 

이런 결과는 예상을 벗어난다. 서초패왕 항우가 당시 초만산에 보물을 묻고 보물도를 그렸다면, 그것은 12면금라가 아니라 그저 12면청동순우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설이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그 보물도에 대한 해석방법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것이 1장의 완전한 보물도라는데 의심을 품는다. 산위에는 또 다른 한 장 또는 몇 장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 보물도에는 무슨 오묘한 점이 담겨 있을까?

 

3. 중구난방의 보물해석

 

2천년이래로, 사람들이 산위에서 이 부호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도 그 뜻을 푼 사람은 없다. 명말청초에 소흥의 유명한 학자인 장대는 일찌기 초만산에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부호의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장대는 명나라의 문학가이고 관료집안출신이다. 만년에는 가난해져서, 산 속에 숨어살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술을 계속했던 사람이다. 장대의 일생은 명리에 담백했었다. 그의 취미는 여러가지여서, 심미적인 취미가 있었다. 산과 물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고, 원림배치등을 잘 알았다. 음악도 알고, 금을 타고 곡을 짓기도 했다. 차를 즐기면서 차도에도 조예가 깊었다. 수장을 좋아하고, 감상수준도 아주 높았다. 희곡에도 정통하였다. 이같은 큰 학문을 가지고, 식견을 지닌 인물도 풀지 못한 것을 보면 그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가 남겨준 보물은 역사로 돌아가서 답을 찾아야 한다. 항우가 항리촌에 온 적이 있는가? <<사기. 항우본기>>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 "항량(항우의 숙부)가 사람을 죽여, 적(항우)와 함께 오중으로 원수를 피해서 숨었다. 진시황이 회계에 놀러 와서 절강을 건넜다. 항량과 항우는 함께 보았다. 항적이 말했다: '그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겠다' 항량은 그의 입을 막고는 '헛소리 하지 말라. 집안이 다 죽는다.'"

 

항리촌에서 <<사기>>를 읽어본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사기>>에서 말하는 진시황이 회계를 유람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회계산을 말한다. 우리 마을은 회계산에서 10킬로미터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사기>>에서 항우가 진시황이 회계산에 유람온 것을 보았다고 한다면, 항우는 우리 마을에서 생활했다고 볼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다만 저명한 역사지리학자이자 복다대학 교수인 갈검웅은 이렇게 지적한다: "항우가 소흥 항리촌에서 생활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갈교수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사기>>에서 언급한 '회계'는 소흥의 회계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회계군'을 가리킨다. 이 군은 주로 지금의 강소남부와 절강 대부분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도 항우가 항리촌에서 거주했었다는 주장을 뒤집기에는 부족하다. 갈교수는 추가로 이렇게 해석한다: "당시 항우는 숙부를 따라서 '오중'에 피난해 있었다. 이 '오중'은 지금의 강소 소주일대이다. 소주는 전국시대의 초나라 속지이다. 그곳에는 초나라의 옛사람들이 많이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초나라대장군의 후대인 항우도 소주지역으로 피난간 것이다. 그리고 초나라의 옛사람들은 당시에 소주지역에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성안에 살고 있고, 항우와 항량이 의거군을 모집했을 때, 자연히 그들도 함께 한 것이다. 즉 소주지역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절강의 항리촌과 같은 궁벽진 마을까지 가서 병사를 모으고 말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비부호는 민간전설에서 추측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과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때는 민간전설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 때도 있다. 어떤 때는 전설이 아무런 근거없는 것이 아닐 때도 있다. 그저 적절히 해석하면 된다.

 

보물도의 부호에 근거하여, 이미 어떤 사람은 몇 마디로 정리하고, 보물도의 비밀을 풀었다고 말한다: "묘전묘후삼각전두삼안교두삼차로구십이면금동라(廟前廟後三角田頭三眼橋頭三路口十二面金銅羅)" 그렇다면, 이 위치는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항우문화를 여러해동안 연구했던 한 촌민은 산위의 주변을 살펴본 후에 최종적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항우가 당시 묻은 보물은 아마도 항리촌 입구의 지금은 말라버린 우물아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우물은 이미 메워져서 도로가 되었다.

 

이 촌민은 '묘전묘후'라는 말에 주목한다. 이것은 바로 보물이 항우묘의 전후에 있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삼각전두'라는 것은 항우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각의 밭이 있다고 한다; '삼안교두'라는 것은 처음에 어려웠지만, 마을을 돌아다녀보고는 '3개의 눈'을 가진 다리를 발견했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항리촌의 노인이 마을앞의 작은 냇가의 항우묘 부근에 3개의 구멍을 지닌 작은 다리가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나중에 도로를 새로 닦을 때 구멍 1개를 없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안교두'라는 말도 해석이 된다. 그것은 바로 항우묘의 곁에 있는 현재는 2개의 구멍만 남은 작은 석판교인 것이다. 다리아래에는 바닥이 보이는 맑은 냇물이 흐른다. 여기서 말하는 '삼차로구'는 더욱 찾기 쉽다. 바로 석판교 부근에 세갈래길이 있는 것이다. 현재는 2미터 너비의 시멘트도로가 되어 마을을 관통하고 있다.

 

그는 해석구절에 근거하여 보물을 숨긴 장소는 마을입구 시멘트도로의 주택지역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현지를 파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은 그저 추측일 뿐이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 촌민은 그가 1980년대에 길가에 집을 지을 때 1미터 깊이로 바닥을 팠었지만 금라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항리촌의 촌민들은 항우보물에 대하여 싫증도 내지 않고 얘기해왔다. 그러나 보물이 숨겨진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 알려진 후에도 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길가에 가서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신비부호가 새겨진 돌맹이는 아직도 초만산에 조용히 누워 있다. 그것이 지키는 것은 아마도 무슨 보물이 아니라. 보물과 관련된 신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