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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의 <<맹자>> 삭제사건

by 중은우시 2008. 11. 11.

글: 황파(黃波)

 

명태조 주원장이 맹자를 삭제한 사건은 중국문화사상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아성(亞聖)으로서, 맹자의 인기는 아주 높다. 사상에서는 약간의 원시민주주의의 원소를 지니고 있다. 그는 무원칙적으로 신민의 군왕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지도 않았고, 반대로 악법은 법이 아니다, 폭군은 군주가 아니다. 악법과 폭군에 대하여는 인민에게 반항할 권리가 있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 "군주가 큰 잘못을 하면 간해야 한다. 반복해도 듣지 않으면, 바꾸어야 한다" "한 사내 주(紂)를 주살했다는 말을 들었어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군주가 신하를 초개처럼 보면, 신하도 군주를 원수처럼 본다" ....이 모든 것은 중국사상사에서 빛나는 명언이다. 역대의 제왕은 이런 말을 들을 때 분명히 마음이 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못들은척 못본척 했다. 왜냐하면 맹자가 얘기한 것은 폭군이 군주가 아니라는 것이지만, 나는 명군성주(明君聖主)가 아닌가? 왜 그런 말에 신경써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주원장은 달랐다. 그는 <<맹자>>를 읽다가, "군주가 신하를 초개처럼 여기면, 신하도 군주를 원수처럼 여긴다"는 구절을 읽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노했다. 이게 어디 신민이 할 수 있는 말인가? 황제가 노하자 결과는 심각했다. 맹자는 천여년이상 공묘에서 공자의 옆에 앉아서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쫓겨나고 만다. 전당(錢唐)이라는 한 선비가 의연히 상소를 올려서, 황제가 아성인 맹자를 쫓아내는데 반대하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나는 아성을 위하여 죽겠노라. 죽어도 영광이다" 주원장은 그제서야 약간 냉정해진다. 전당을 처벌하지 않고, 오래지 않아 맹자를 공자묘에 모시도록 원상회복시킨다. 그러나, 그래도 남은 한을 다 풀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맹자>>의 일부를 삭제시킨다. 그리하여 위에서 언급한 뛰어난 명언들이 삭제되게 된다. 맹자의 원문에서 85조를 삭제하고, 겨우 100여조를 남겨둔다. 그렇게 하여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든다. 그리고 과거시험에서 삭제된 조문을 가지고 문제를 낼 수 없도록 한다.

 

주원장은 왜 맹자를 삭제시켰을까? 맹자를 삭제시킨 배후의 심리는 무엇일까?

 

필자가 보기로, 주원장이 맹자에 대하여 강렬한 불만을 가지고, 맹자의 구절을 삭제한 조치는 바로 그가 극력 일종의 "신도통(新道統)"을 건립하려한 표지로 보인다.

 

중국역사를 읽어보면, 항상 이상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 전통사회는 "군주가 신하에게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부득이 죽어야 한다" 군왕의 폭정하에 그 때의 사람들은 존엄이 없고, 매일 고개를 숙이고 기운이 없으며, 특히 자존심에서 민감한 문인들이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구시대의 선비들은 자기가 그렇게 멍청하게 산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같다. 직접 높디높은 군왕을 대면하더라도, 그들은 항상 그렇게 비천하고 가련한 얼굴을 하지 않았었다. 주장해야 할 것은 주장해야 했고, 심지어 죽기를 각오하고 주장했다. 더욱 이상한 점은, 이들 군권을 무시하는 미치광이들이 어떤 사람은 곤장을 맞고, 어떤 사람은 살륙당하고, 심지어 멸문멸족의 화를 당하기도 하지만, 민간에서는 즉, 요즘 말하는 사회여론에서는 공공연히 그들을 찬양했다. 군권은 그들의 육체를 탄압하고 소멸시킬 수는 있었찌만, 패해도 오히려 영광이고,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중국의 선비들은 힘줄이 질겼다. 그들은 고집스럽게, 세속권력인 "치통(治統)"를 대표하는 것은 군주이지만, 의식형태의 "도통(道統)"을 대표하는 것은 우리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치통"과 "도통"의 분할현상은 주원장을 분노하게 하였다. 그는 자신만만했고, "치통"과 "도통"을 합일시키고자 하였따. 주원장이 맹자를 삭제한 것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렇게 국가기관을 장악하고 생사여탈권을 장악하고 욕심이 팽창한 자의 광망(狂妄)이었다. 그는 그 개인의 군왕과 신민간의 관계를 기준으로 "신도통"을 건립하고자 했다. 이런 "신도통"의 요점은 바로 "악법도 법이다", "폭군도 군주다"라는 것이다. "법"과 "군주"의 절대권위는 절대 의심될 수 없고, 더더구나 반항해서는 안된다. 반항을 허용하지 않을 뿐아니라, 소극적으로 회피하여 은사(隱士)가 되는 자유도 없다. 공자가 독서인은 천하에 도가 없을 때는 은사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주원장은 '안맞으면 죽인다" 이런 소극적인 자유마저도 없애버린 것이다.

 

이로부터, 주원장은 더 이상 세속정권의 국왕에 만족하지 않고, '교주(敎主)'가 되고자 했다. 그는 백성의 사상에 대한 통제에 아무런 빈틈이 없도록 하였다. 그의 명령은 정치, 경제, 군사영역에 미칠 뿐아니라, 백성의 생활방식에도 미쳤다. 예를 들어, 복식, 식기, 거처, 왕래칭호, 혼례,장사의 예의풍속도 모두 관여하고 관리감독했다. 예를 들어, 그는 특별히 일종의 속두발(束頭髮)이라는 망건(網巾)을 만들었고, "만발개제(萬髮皆齊, 모든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한다)"는 "만법개제(萬法皆齊, 모든 법을 가지런히 한다)"와 발음이 같다는 것으로 인하여, 이것이 독재자의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천하에 반포하여 모든 백성이 그 망건을 쓰도록 한다; 또 그는 전국시대의 종횡가에 불만을 품고, 학교에서 <<전국책>>을 낭독하지 못하도록 했다...

 

유학자와 도통을 두고 다투면 주원장이 성공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가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에 이르러 강희는 더욱 심했다. 그는 직접 선언한다: "도통도 여기 있고, 치통도 여기 있다" 이때부터 황제만이 최대의 이론가, 사상가이며 성지가 바로 모든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표준이 된다. 전통유학은 군권지상의 토통에 철저히 전복된다. "국왕이 곧 교주이다" "권력이 곧 진리이다"는 국면이 정식으로 형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