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영고탑(寧古塔) : 청나라때의 유배지

중은우시 2007. 6. 25. 19:17

 

 

 

인생천리여만리(人生千里與萬里)

암연소혼별이이(然銷魂別而已)

군독하위지어차(君獨何爲至於此)

산비산혜수비수(山非山兮水非水)

생비생혜사비사(生非生兮死非死)

......

수환지종독서시(受患只從讀書始)

군불견오계자(君不見吳季子)

 

인생의 천리 만리를

슬프고 가슴아프게 이별할 뿐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산도 산이 아니고, 물도 물이 아닌 곳으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곳이 아닌 곳으로

.....

모든 화는 글을 읽은데서 시작한 것이니

그대는 오계자를 보지 못하는가?

 

이 <<비가증오계자(悲歌贈吳季子)>>라는 시는 청나라초기의 유명시인인 오매촌(吳梅村)이 친구인 오한사(吳漢槎)에게 준 것이다. 오한사는 당시 바로 영고탑(寧古塔)으로 유배가는 때였다. 오한사는 '천당'이라고 불리우는 소주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재주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난세에 태어나서 명나라황실이 무너지면서, 순치15년(1658년)에 강남과거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강남의 선비들과 함께 40대의 곤장을 맞고 영고탑으로 유배가게 된 것이다. 다음 해 윤3월 초3일, 오한사는 홑옷을 입고 길을 떠나 북경을 떠나 변방으로 간다. 성경(심양), 선창(길림)을 지나 6월 21일에 송화강을 건너고, 7월 11일에 영고탑에 도착한다. 북경에서 영고탑까지 산넘고 물건너면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4개월여를 간 것이다. 이후 그는 그 곳에서 23년간 머물렀다. 나중에 강희20년(1681년)에 납란용약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살아서 돌아온다.

 

사실, 영고탑은 탑(塔)은 아니다. 성(城)의 이름이다. 이것은 청나라 초기에 관외로 유배보내던 장소이다. 영고탑은 구성과 신성이 있는데, 구성은 지금의 흑룡강성 안녕현(安寧縣) 서해림하(西海臨河)의 남안에 있는 구가진(舊街鎭)이다. 신성은 강희5년(1655년)에 지금의 흑룡강성 안녕현의 성이다. 원래는 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있던 자리이고, 지금의 영안 동경성과는 3.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영고탑은 변방지역에 속하는데, 옛날에 이곳은 환경도 열악하고, 기후도 이상하며, 풀과 나무가 자라지도 않고, 오곡이 자라지도 않아서 죄인들을 유배시켜두기에 적합했었다. 탑이 아니면서 이름에 탑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은 왜 그런 것인가? 사실 청황실의 먼 조상에게 형제가 여섯 명이 이 곳에 살았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바로 만주어로 "영고"가 여섯이라는 뜻이고 "탑"이 개(個)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원래 영고탑은 "여섯개" "여섯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영고탑은 원래 만주족의 발원지이다. 영고탑을 유배지로 정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징벌과 개전을 위한 것이다. 죄를 지은 자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서 고생하면서 관외로 가서 스스로 일을 하면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는 청황족의 발원지임을 고려한 것이다. 이곳에서 죄를 지은 만주족과 한족 관리들로 하여금 소말과 같이 일을 하게 해서 이 지역을 개발하고,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조상들의 영예를 빛내게 하려는 의미도 있다.

 

지금의 지리관념으로 보자면, 영고탑은 아주 먼 황무지에 속하지는 않는다. 북경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산해관을 나서서 심양, 장춘을 지나 하얼빈에 도착한 후, 빈수선열차를 갈아타고 목당강시를 거쳐 영안(경박호에 관광을 가려는 사람은 대부분 영안을 거친다)으로 가면 바로 영고탑이다. 조금 편안하게 일정을 짠다고 하더라도 이틀이면 충분히 갔다 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3000년전의 오한사는 이 곳을 4개월간 걸어왔다. 그때의 영고탑은 더욱 멀고 황량한 곳이며, 인적이 드문 곳이었으리라. 우리가 요즘 보는 청나라 역사극에서 황제가 일단 "영고탑으로 유배보내라"는 말이 떨어지면, 죄인은 처연하게 바닥에 엎드리는데, 이로써도 당시 영고탑에 유배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영고탑은 청나라때 유배를 보내는 가장 유명한 곳 중의 하나이다. 청나라때 유배는 유방(流放), 적술(謫戌), 발견(發譴), 충군(充軍)이라고 불렀는데, 비록 약간씩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죄인이나 그의 가족을 변방지역에 보내어 관병의 노비로 삼는 것이다. 유배보내는 곳은 주로 동북지방과 신강지역이었다.

 

청나라때 영고탑으로 유배온 명문귀족들도 적지 않았다. 순치12년(1655년)에는 이과부급사관 팽장경, 일등자작 허이안은 도르곤의 명예회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사형을 받는데, 황제가 그들이 조정에 공이 있었음을 감안하여, 사형을 면제하고 영고탑에 유배를 보낸다. 강희제때는 대명세의 <<남산집>>사건, 방효표의 <<진검기문>>사건이 발생하여 삼,사백명이 연루된다. 여기에는 강희제의 심복부하인 강소순무 장백행, 유명인사인 방포가 포함되어 있다. 강희제는 환갑연이 가까운 점을 고려하여 대명세만 사형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영고탑에 유배보낸다. 이외에 청나라 통치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일어난, 삼번의 난, 강희후기의 후계자싸움, 옹정연간의 연갱요, 융과다사건등에 연루된 사람들도 대량으로 이 곳에 유배를 왔다. 강희시대의 시인 정개(丁介)는 이런 시를 남겼다.

 

남국가인다새북(南國佳人多塞北)

중원명사반요양(中原名士半遼陽)

 

남국의 미인은 새북으로 많이 왔고,

중원의 명사들도 절반은 요양에 와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