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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청나라의 매관매직제도

by 중은우시 2007. 5. 30.

청나라때 관직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과반(科班)으로 십년한창(十年寒窓, 십년간을 찬바람 들어오는 창에서 공부해서)을 거쳐 과거에 급제하면 바로 관직을 얻는 것이다.다른 한가지는 연반(捐班)으로 돈을 내고 관직을 사는 것이다. 누군가가 관직을 얻어서 조상을 빛내고 싶어한다면, 오로지 이 두 가지 방법뿐이다. 그렇다면, 청나라정부는 왜 이런 이상한 제도를 만들었을까? 황제가 멍청해서인가? 청나라는 성군이 많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황제가 멍청해서는 아니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들어온 이후, 중원의 백성들은 이 오랑캐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민족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은 것이다.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등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청나라정부가 가장 머리아팠던 것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배운 것이 많은 지식분자들이었다. 그들은 민족관념이 더욱 강했고, 대사를 도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천하를 얻었으므로, 천하를 안정시키고 싶어했고, 또한 오랫동안 통치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중원의 선비들을 미워했지만, 역시 중원의 선비들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국가를 다스리려면 그들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순된 심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이용해서 그들을 타격할 필요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게 선비를 탄압하는 것은 어떤 통치자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하의 선비들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격을 가해놓지 않으면 이후에 후환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연반이 출현한 것이다. 연반은 청나라 통치자들에게 세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첫째, 과반으로 관리에 등용되는 수량을 줄였다. 이는 사람들의 과거공부에 대한 열망을 감소시키고, 공부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우민통치가 가능하다.

 

둘째, 연반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재물의 양이 적지 않았다. 이것으로 통치자들은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연회를 배풀고, 궁궐을 짓거나, 군비로 써서 반란자들을 진압하는데 쓰거나, 영토를 확장하는데 쓸 수 있었다.

 

셋째, 연반하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두뇌를 활용할 수 있었다. 스스로 돈을 벌어 관직을 얻을 정도의 사람이면 경제관념은 확실한 사람이고, 돈을 잘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관리를 하면, 책벌레가 관리를 하는 것보다는 지방경제에 도움이 된다.

 

좋은 점이라는 청나라의 황제들이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나쁜 점도 점점 나라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득의만만하던 황제들이 생각도 못한 일이다.

 

먼저, 교육은 국가에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이를 강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약화시키게 되었으니, 우둔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연반제도는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우민정책은 백성을 우민화시킬 뿐아니라, 황제 자신도 우화된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아동적 심리가 우위를 점함에 따라, 스스로 겸손하고 공부하기 좋아했던 품격은 점차 중화민족에게서 사라져 갔다. 그리하여 스스로 문을 걸어잠그고 나중에 낙후되어 다른 민족에게 얻어맞게 된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또 다음으로, 연반제도는 중국민족에게 돈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돈을 위하여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중화문명고국이고 예의지국인데 왜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들이 이렇게 많아지게 되었는가? 적어도 청나라때의 황제가 약간의 기여는 한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