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6년에 남명정권의 홍광제(弘光帝)와 융무제(隆武帝)가 줄줄이 망하자, 계왕(桂王) 주유랑(朱由瑯)이 뒤를 이어 광동의 조경(肇慶)에서 등극하니, 그가 바로 영력제(永歷帝)이다. 그는 나중에 대서군(大西軍, 장헌충을 따르던 부대)의 수령인 이정국(李定國)의 도움을 받아 곤명으로 옮겨간다. 1659년 청나라군대가 곤명을 함락시키자 영력제는 다시 도망치는데, 이번에는 버마로 도망친다.
버마로 도망치게 된데에는 영력제의 권신(權臣, 권력을 잡은 신하)인 마길상(馬吉翔)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마길상은 간계와 아부로 이정국의 환심을 샀다. 곤명이 함락되기 전에 조정대신의 대부분은 사천으로 갈 것을 주장하였고 영력제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마길상은 일단 사천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정국은 원종제(袁宗第), 학영충(郝永忠)등 대순군(大順軍, 이자성을 따르던 부대)의 장수들과 권력을 나눠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정국의 심복과 협의하여 이정국에게 서쪽으로 철군하도록 설득한다. 이리하여 영력제는 부득이 버마국경까지 철수한다. 마길상은 버마국경으로 들어가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밤중에 병사들을 획책하여 영력제를 핍박하여 버바국경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마길상의 주도하에 그날 밤 밤이 깊은 틈을 ㅏ서 병사들은 대거 노략질을 하고, 놀란 영력제는 급히 강을 건너 버마국경으로 들어간다. 버마관문에 도착하자, 버마군사들은 근 2천명이 영력제를 따라 버마로 피난하는 것을 알고, 병기를 버려야 입국을 허용하겠다고 한다. 영력제가 동의함에 따라, 이들은 쉽게 무장해제된 채로 버마에 들어간다.
영력제와 그의 부하들은 갖은 고생을 겪어가며 버마의 수도 아와(阿瓦)에 도착한다. 그들은 사람을 버마국왕에게 보내어 협의한다. 그러나, 버마국왕은 망국조정의 사신을 접견해주지 않고, 그저 한인을 파견하여 소식만 전달하였다. 나중에 영력제와 그 부하들의 감시에 편하게 하기 위하여, 버마국왕은 아와성에서 강을 사이에 둔 건너편에 대나무로 성을 만든 후 영력제와 신하들이 거주하도록 하였다.
잠시 거주할 곳이 생기기는 했지만, 영력제와 그 신하들에게는 남의 밑에서 사는 생활이 되었다. 그러나, 호화생활에 익숙했던 남명의 신하들은 옛 버릇을 고치지 못하였고, 편안함만 추구하고, 진취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시 버마백성들은 영력제와 신하들이 거주한 곳으로 와서 무역을 했는데, 적지 않은 남명의 관리들은 버마의 부녀들을 희롱하였고, 이는 버마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조정대신들까지 이 정도 도덕수준이면, 중국의 운세는 이미 다 했다는 것이다. 영력제를 따라 버마로 들어온 신하들은 향락을 누렸고, 전혀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역력제의 조정은 이로써 궁박한 신세에 처하였고, 언제 멸망할지는 시간문제로 되어 버린 것이다.
순치18년(1661년) 5월 23일, 버마국왕의 동생인 망백(莽白)이 정변을 일으켰고, 버마국왕을 죽이고 스스로 국왕이 되었다. 신왕은 사자를 보내어 영력제에게 축하예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때의 영력제는 이미 그럴듯한 선물을 준비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변이 옳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하례를 바치지 아니하였다. 이로 인하여 망백의 분노를 샀다.
망백은 영력제와 그 신하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영력제에게 강을 건너와서 일을 논의하자고 통보한다. 쌍방의 관계가 긴장된 것으로 인하여, 남명의 문무관리들은 두려움에 감히 강을 건너가지 못한다. 버마국왕은 다시 사람을 파견해서, 이번에 오는 것은 그저 버마국왕이 여러 신하를 초청하여 함께 술을 마시고 맹세하기 위한 것이며, 쌍방의 신뢰를 증강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하여, 영력제의 군신들은 모두 진퇴유곡에 빠진다. 버마측의 지원하에, 마길상은 검국공 목천파와 함게 갈 것을 제안한다. 목(沐)씨는 대대로 운남을 지켰고, 명나라 서남변경의 각국에서 비교적 중시되던 인물이었다. 마길상은 목천파가 함께 있으면 의외의 사건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마길상 및 다른 대소과료는 맹서를 위한 장소로 갔다. 문무관리가 맹서지점에 도착하자마자 버마병사의 습격을 받았다. 속아서 그 곳으로 갔던 관리들은 모두 위난을 당했고, 스스로 버마로 들어와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마길상도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
버마군은 이어서 영력제의 주소지로 들이닥쳐, 영력제, 태후, 황후, 태자등 25명을 한 작은 집에 몰아넣는다. 영력제의 유, 양의 두 귀인, 길왕과 비첩등 백여명은 모두 목을 매어 자결했다. 영력제가 자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버마국왕은 또 사람을 보내어 위무했고, 일부 생활용품을 보내주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구차한 생명을 부지했다. 이 사건후에 영력제는 아무도 곁에 없게 되었고, 영력조정이라는 것도 실제로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영력제가 버마에 머무는 것은 역시 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1660년, 오삼계가 여러차례 청나라조정에 상소를 올려 버마로 진격하여 토벌할 것을 건의한다. 청나라조정은 오삼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팔기병을 북경에서 운남으로 보내고, 오삼계와 함께 버마로 진격하여 영력제를 체포하고자 한다.
청나라 정권이 점차 안정되자, 버마정부도 남명의 망명정권을 남겨두어 중국의 실제통치자에게 미움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이정국등 명나라 장수들은 영력제를 다시 모셔오기 위하여, 버마측의 군사들과 계속 마주하고 있었고, 청나라병사들도 국경을 넘어와서 영력제를 넘겨달라고 하였다. 이로써 버마정부는 본국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순치18년(1661년) 정월 초6일, 버마국왕은 사신을 운남으로 보내어, 영력제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청나라에 이정국을 함께 포위공격하자고 제안한다. 오삼계는 즉시 버마측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새 버마국왕은 실제로 영력제를 청나라조정과 협상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순치18년(1661) 8월 24일, 오삼계는 병사를 이끌고 곤명에서 두 길로 나누어 서진한다. 오래지 않아, 청나라군대는 버마수도에 가까워졌고, 버마국왕은 사람을 보내어 영력제와 그의 신하들을 청나라군대에 넘겨준다. 오삼계는 바로 버마국경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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