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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중국의 국호(國號)

by 중은우시 2006. 6. 2.

이등휘 : 1991년 6월 국민당혁명실천연구원의 발언

 

"모택동에게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국호를 고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여전히 중화민국이라고 불렀다면, 우리는 아주 골치아팠을 것이다"

 

이오(李敖) : 2004년 10월 27일 봉황위성TV <<이오유화설(李敖有話說)>> 168집

 

1965년, 모택동주석은 프랑스 신문가지 마쟈르를 접견했다. 그가 후회하는 하나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바로 1949년에 중화민국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고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였다. 만일 49년에 국호를 고치지 않았더라면 많은 골치아픈 일들을 덜 수 있었고,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유엔문제, 대만정부문제등등.

 

그렇다면 왜 국호를 고쳤는가? 당시 모든 사람들이 투표로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하려고 할 때, 모주석의 곁에 앉아 있던 주선배(周善培, 절강 제기현 사람)가 모주석의 옆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일 국호를 고치지 않는다면, 태조고황제(太朝高皇帝)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은 중화민국이라는 낡은 이름을 버린 것이다. 그런데 16년후에 모주석은 후회했다.

 

황염배일기(黃炎培日記) 1949년 9월 25일자.

 

밤, 모주석의 거처인 이년당에서 소위원회토론....연호는 서기(1949)로 바꾼다. 그러나 민국(38)을 쓰는 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황염배일기 1949년 9월 26일자.

 

낮, 주은래, 임백거는 육국반점으로 식사를 요청했다. 인민정협문건중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용어 뒤에 원고에 들어 있는 "(약칭 중화민국)"이라는 말을 삭제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토론했다.

 

(이 날의 육국반점의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장원제, 하향응, 주치상(이름은 선배, 자는 치상), 부정일, 마인초, 서특립, 오옥장, 장란, 간옥개, 진숙통, 심균유, 진가경, 사도미당, 임백거, 장유선, 곽말약, 모순, 차향침등이었다.

 

먼저 발언한 황염배, 하향응은 "중화민국"이라는 약칭을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번째로 주치상이 발언한 이후부터 분위기가 역전되어 약칭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우위를 점한다)

 

사도병학 : <<사도미당노인의 만년>>

 

다음은 청나라 진사인 주치상이었다. 그는 전해지는 바로는 신해혁명후에 38년간을 은거해있었고, 평생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공산당과 모택동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약칭을 쓰는 것을 반대한다. 무슨 중화민국이냐, 이것은 국가와 백성에 해를 끼친 나라이다.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아무런 호감도 가지고 있지 않은 명칭이다. 20여년동안 장개석에 의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 주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쓰자는 것이고, 두번의 혁명이 서로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표시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