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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河南省)의 성회(省會)는 왜 개봉(開封)에서 정주(鄭州)로 바뀌었을까?

by 중은우시 2025. 4. 5.

글: 번화만리(繁華萬里)

1954년 9월, 하남성의 성회는 개봉시에서 정주시로 옮겼다. 1950년대의 성회가 이전된 도시는 개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보정시(保定市, 하북성), 안경시(安慶市, 안휘성), 치치하얼시(齊齊哈爾市, 흑룡강성)등이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하남성의 성회변천을 얘기해보기로 하자. 원나라때부터 개봉성은 계속하여 하남성의 성회도시였고, 수백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1954년 왜 정주로 옮기게 되었을까?

먼저, 개봉의 전성기를 보도록 하자. 개봉은 팔조고도(八朝古都)로서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8개의 정권과 왕조가 개봉을 수도로 삼았다. 심지어 명나라가 건립된 초기에 개봉은 명나라의 "북경(北京)"이었다. 1279년, 원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전국강역의 면적이 광활한 점에 비추어 전국을 10개의 행성(行省)으로 나눈다. 예를 들어, 감숙행성, 호광행성등등. 당시 개봉은 하남강북행성(河南江北行省)의 성회였다.

원나라때부터, 개봉의 성회지위는 확립된다. 그후, 명나라, 청나라때 개봉은 계속 하남성의 성회도시였다. 시간으로 계산하면, 수백년에 이른다. 개봉이 장기간 하남성의 성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의 분명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내하항운(內河航運)의 허브였다. 철로가 아직 나타나기 전에, 내하항운은 내륙각성간의 주요한 운수방식중 하나였다. 개봉을 예로 들면, 전성기때 4개의 강이 성을 휘감아 흘렀다. 현재 정주가 철로의 허브역할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

현재까지도 개봉경내에는 저명한 "운량하(運糧河)"가 있다. 당연히 지금은 유적지에 불과하다. 하도가 무너지고, 강물이 끊기고, 황하가 물길을 바꾸면서 개봉의 내하항운의 우세는 점차 상실되어버린다. 이와 동시에 2가지 문제가 나타나서 개봉을 장기간 괴롭히게 된다. 첫째, 개봉 주위의 많은 토지는 염분화문제가 나타난다. 그리고 황사가 쉽게 발생하게 된다. 둘째, 황하의 개봉구간은 지상현하(地上縣河, 강물이 땅바닥보다 높이 흐르는 것)현상이 나타나서, 자주 제방이 붕괴되어 범람한다. 이는 중원대지에 아주 큰 위협이 된다.

명나라통치조기, 주원장은 개봉의 '북경'지위를 포기한다. 그중 아주 큰 이유는 바로 황하의 개봉구간이 몇년내에 여러 차례 붕괴되어 범람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던 상황하에서, 성내의 다른 도시들이 개봉의 성회지위를 위협하지는 못했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개봉은 강력한 적수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정주이다.

오랫동안 정주는 하남성의 직예주(直隸州)였다. 개봉부(開封府)에 예속된 산하의 산주(散州)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통치말기, 저명한 경한철로(京漢鐵路, 북경-무한)가 개설되기 시작한다. 경한철로의 원래 계획은 개봉부를 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공사량이 너무 많아졌다. 게다가 황하의 개봉구간은 너무 넓었고, 토지가 연약한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리하여 경한철로는 서쪽으로 옮겨서 건설하게 되면서, 정주 경내를 지나게 되고, 역을 건설하게 된다. 기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주는 여전히 개봉의 성회지위를 위협할 수 없었다.

1928년, 농해철로(隴海鐵路, 난주-연운항)가 경한철로와 정주에서 교차하게 된다. 정주의 교통지위는 급격히 상승된다. 일거에 북방지역의 가장 중요한 철로허브도시가 된다. 1928년, 정주시가 건립된다. 같은 해 <정부설계도(鄭埠設計圖)>가 나온다. 시지역의 설계인구는 총 25만가량이고, 중심은 인민공원부근이었다. 이때부터 정주는 근대도시로 발전한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정주시의 비농업인구는 이미 60%이상에 이른다.

1928년의 통계에 따르면, 정주시의 시내인구는 8만여명에 달했고, 도시면적은 5평방킬로미터가 된다. 하남성은 전후로 <신정주시건설계획대강14조>, <정주시18년년도건설계획대강초안>을 내놓는다. 이렇게 정주시의 발전을 추진한다. 통계에 따르면, 1930년까지, 정주시에 등기된 대형상점이 2000여개에 이른다. 당시 상업이 얼마나 번영했는지 알 수 있는 바이다.

1930년대에 정주에서는 계속 대형, 중형기업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예풍사창(豫豊紗廠)등이다. 통계에 따르면, 3,40년대에 정주시내에 모두 10여개의 영화관이 있었다. 이는 정주의 당시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3,40년대에 이르러 정주는 이미 개봉시와 성회지위를 다툴 기본여건을 갖추게 된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전쟁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개봉, 정주등지가 차례로 일본군에 함락당한다.

1944년, 일본은 "중원성(中原省)"을 설치할 계획을 세운다. 중원성의 성회도시는 정주이다. 이를 보면, 당시의 개봉은 확실히 계속하여 성회를 맡는 것이 부적절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투항하면서, "중원성"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해방전쟁시기, 각 방면의 요소로 하남성의 이전문제는 잠시 논의에서 제외된다. 1949년이후, 전쟁이 기본적으로 끝나면서, 전국각지는 전후복구, 경제발전단계로 접어든다.

이 시기에 개봉은 교통이 불편하고, 토양이 염분화되는 등 각종문제가 더욱 크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부 원로들의 회고에 따르면, 하남성회를 개봉에서 정주로 이전하는 것은 1950년경에 이미 확정되었다. 단지 이전하기 전에 여러 방면의 준비가 필요했었다. 1950년대초기, 미래의 성회도시건설을 둘러싸고, 정주시는 각방면의 투입과 설계를 마친다. 예를 들어, 열발전소의 건립, 6대 국면창(國棉廠)의 건립, 도시도로의 재설계등등의 작업을 진행한다.

1954년까지, 각방면의 준비업무가 기본적으로 끝난다. 당시의 문건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남성회인 개봉은 전체 성의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전체 성을 지도하는 업무를 하는데 불편하다. 정주는 중원교통의 허브로서, 전체 성의 경제중심이고, 미래의 발전전만도 크다. 만일 성회를 정주시로 이전하면, 전체 성 내지 두 개도시의 발전에 크게 유익할 것이다." 결국 1954년 9월, 하남성의 성회도시는 정식으로 개봉에서 정주로 이전된다.

개봉, 낙양(洛陽), 안양(安陽)등 전통역사도시들과 비교하면, 정주도 자신의 약점이 있고, 자신의 장점이 있다. 어쨌든, 인문역사, 역사고적, 명인사적등의 면을 보면 낙양, 개봉이 훨씬 우세하다. 그러나, 1954년 정주는 자신의 여러 방면의 우세를 가지고 계속 발전해왔따. 도시구조나 경제총량이나 모두 크게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