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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오커우 비서방 멸망기(五道口秘书帮覆灭记)

by 중은우시 2024. 4. 24.

글: 중서ABC

베이징시 하이덴구 우다오커우를 돌아다니려면 사람들은 두 군데는 반드시 가보아야 한다.

하나는 줄을 서서 "우다오커우대추케익(枣糕)"을 먹어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기한 랜드마크건축물을 쳐다보는 것이다. 밀물처럼 계속 밀려오는 사람들 틈에서 항상 누군가 고개를 들면서 입가에 '우다오커우'라는 말을 읍조리게 된다. 사람들은 거기에 다른 곳은 비견할 수 없는 이름을 붙여준다: "금융황포(金融黄埔, 황포는 황포군관학교로 중국의 유명한 장군들을 배출한 사관학교임)"

그렇다. 이 신기한 건축물은 바로 청화대학우다오커우금융학원(清华大学五道口金融学院)의 강의동이다.

"우다오커우"라는 지명은 금융권내에서 아주 유명하다. 많은 재경계통의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곳이다. 일찌기 이곳을 졸업한 사람들은 나중에 거의 모두 중국금융계에서 풍운을 질타하는 거물이 되었다.

우다오커우금융학원의 전신은 중극증권계의 대부 류홍루(刘鸿儒)가 1980년에 창립한 중국인민은행연구생부(中国人民银行研究生部)이다. 2012년 청화대학과 합병하여, 청화대학우다오커우금융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성립때부터, 이 학원은 확실히 국내외의 최우수금융교육자원을 끌어모은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고급금융인재를 배양하는 중요기지가 된다.

그러나, 다른 기구들과 마찬가지로, 이 금융학원출신자들 중에는 약간 특이한 경우도 나타나게 된다.

  1. 우다오커우비서방

반부패의 폭풍이 금융계통을 휩쓸고 있을 때, 처벌대상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전 중국은행행장 류렌거(刘连舸)와 전 절강성 부성장 주총쥬(朱从玖)는 '비서방'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최우선 조사대상이 된다.

금융계통에서 "비서방"은 아주 유명하다. 주총쥬, 류롄거를 제외하고 전 중국증감회주석조리 장위쥔(张育军), 전 정다투자집단(证大投资集团) 동사장 다이즈캉(戴志康), 전 중국인보집단(中国人保集团) 동사장 뤄시(罗熹)...등등.

이들은 그 유명한 "우다오커우85학번"이다. 동문의 수량도 가장 많다. 세월을 거치면서 부침을 겪지만, 많은 사람들은 중국금융계의 각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다.

그들은 류홍루가 증권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기간동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금융감독권내에서 "비서방"은 합종연횡의 중요역량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들의 존재로 인하여, 우다오커우85학번은 역대학생들 중에서 뛰어난 사람도 많지만, 사건도 많은 학번이 된다.

2. 금융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85학번 비서방

1992년 10월, 중앙은행 부행장 류홍루가 중국증감회의 초대 주석이 된다. 그는 폴리빌딩(保利大厦)의 두 개층을 빌려 사무실로 삼고, 사무경비를 빌려와서, 중국증권관리감독의 기초를 닦는다.

1년후, 85학번으로 인민은행연구부를 졸업한 대학원생들은 류홍루에 의해 증권감독관리위원회로 불려와서 일을 하게 된다. 10여년후, 이들은 중국금융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명성을 크게 떨친다.

인민은행연구생부 85학번은 비교적 특수한 학번이다. 당시 원래 60명을 뽑으려고 했는데, 시험을 치르고 나서 살펴보니 우다오커우에 입학신청한 수험생들의 성적은 다른 대학보다 훨씬 높았다. 만일 원래의 계획대로 뽑는다면, 당시의 수험생들은 상당부분 다른 학교로 가야 했다.

류홍루가 지닌 고위간부로서의 장기적인 안목이 이때 빛을 발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정원을 늘려준다. 나중에 교육주관부서의 승인을 받아 30명을 추가로 뽑게 된 것이다. 증원을 통하여 우다오커우로 오게 된 사람중에는 작년에 낙마한 금융계의 첫번째 호랑이이며 전 중국은행 동사장 류롄거도 들어 있다. 동기들 중에서 저장성 부성장 주총쥬, 2015년 낙마한 증감회주석조리 장위쥔, 2022년 불법자금모집으로 형을 받은 정다투자집단 동사장 다이즈캉, 금년2월 면직된 전 인보집단 동사장 뤄시등이 있다.

1999년, 주총쥬는 상하이증권거래소 부총경리로 간다. 그리고 1년후에는 총경리가 된다. 당시 그는 겨우 35세였다. 상하이증권거래소 역사상 가장 젊은 총경리가 된 것이다.

주총쥬는 상하이증권거래소에서 꼬박 8년간이나 총경리를 지낸다. 2008년, 주총쥬는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와 중국증감회 주석조리의 직위를 맡는다. 2012년, 47세의 주총쥬는 증감회주석조리의 위치에서 낙하산으로 저장성 부성장으로 내려간다.

주총쥬가 맡았던 상하이증권거래소 총경리의 직위후임자는 마찬가지로 증권계의 대부 류홍루의 '비서방' 동문인 장위쥔이었다.

그는 선전증권거래소가 1995년 거래량이 미미할 때 선전증권거래소를 중국의 양대거래소로서의 지위를 갖도록 기초를 쌓았다; 또한 2000년에는 선전증권거래소가 잠정적으로 상장을 중지하고, 스스로의 포지셔닝을 찾기 위해 방황하기도 했다; 또한 2007년에서 2008년까지 증권시장이 미쳐있을 때, 선전거래소는 이기간동안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고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2008년 2월, 장위쥔은 정식으로 상하이증권거래소 총경리로 부임한다.

장위진에게는 두 가지 명성이 있었다. 첫째는 학식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는 2014년에 <금융위기와 개혁>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널리 호평을 받았다.

둘째는 그는 농후한 강호스타일을 지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는 말에 따르면, 증권업체와 회의를 진행할 때 그는 자주 의자에 반쯤 몸을 눕히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사람들을 억누르는 기세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류롄거는 그의 다른 두 동문처럼 증권계통에서 일하지는 않았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인민은행에서 20년간 근무한다. 그후 수출입은행과 중국은행으로 가고, 중국은행의 최고경영자가 된다.

3. 2015년 주식사태로 무너진 장위쥔, 결국 감옥에서 병사하다.

장위쥔의 증권감독관료로서의 생애는 2015년 주식시장의 파동이 발생하면서 끝나게 된다.

장위쥔은 책에서 이렇게 썼다: 매번 금융위기는 그후 일련의 개혁을 불러오게 된다. 가장 중대한 개혁은 왕왕 가장 엄중한 위기이후에 찾아온다.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2015년 중국에서는 거대한 영향을 미친 주식사태가 벌어진다. 그후 장위쥔과 그의 이익관계자들은 주식사태의 관련자로 큰 이익을 얻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는 자원과 정보를 이용하여, 주식시장 부양과정에서 그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중앙기율검사위가 2017년 7월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장위쥔은 "산을 끼고 산을 이용해서 산다(靠山吃山)" "자본시장질서를 교란시켰고, 증권관리감독부문의 이미지를 해쳤다."

2015년초, 상하이와 선전의 양대주식지수가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레버리지자금으로 유동성위기가 오고, 시장은 공황상태하에서 폭락하며, 시장은 완전히 망가진다. 2015년 6월부터 8월까지, 근 2달의 기간동안 상하이종합지수는 30%이상 폭락한다.

당시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주석을 맡고 있던 샤오강(肖钢)은 2019년 주식사태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2015년 주식시장위기는 본질적으로 거품이 붕괴되는 과정이었다. "당시 이미 레버리지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증권업체의 자금조달문제를 조사한 바 있다. 그러나, 과감하지 못했고, 호황정서가 남아 있었다."

2015년 4월 17일, 증권감독관리위원회의 대변인은 이런 말을 한다. 증감회주석조리 장위쥔이 4월 16일 중국증권업협회에서 개최한 증권회사의 신용거래업무상황보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증권회사의 신용거래업무를 시작한지 5년동안 규모가 신속히 발전하고, 운영이 양호하며, 리스크는 대체로 통제되고 있다.

그때 주식시장의 이상현상이 나타났을 때, 장위쥔은 "주식사태해결 총지휘관"이었다. 그는 여러번 공개적으로 주식시장을 안정시키겠다고 말하고, 증권업체, 기금등 업계내 고위직들을 소집하여 해결책을 연구했다. 결정된 주식사태해결방안중 여러 증권업체들은 반드시 자체자금으로 주식시장을 부양시켜야 한다는 것이 있었다.

2015년 8월에도 장위쥔은 여전히 시장안정좌담회와 증권업체리스크통제대회등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1달후인 9월 16일 중앙기율검사위는 중국증감회주석조리 장위쥔은 엄중한 기율위반으로 조직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통보하게 된다.

장위쥔이 조사받는다고 선언되기 전날, 중신증권(中信证券)의 전 총경리 청보밍(程博明)등 여러명의 중신증권 관련자들이 내무자거래혐의, 내부자정보누설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중신증권은 당시 주식사태해결의 '국가팀'의 주력이었다. 중신증권을 책임지고 있는 청보밍은 장위쥔의 동문사제였다.

장위쥔이 조사를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15년 10월 23일, 국신증권 총재 천홍차오(陈鸿桥)가 자택에서 자살한다. 천홍차오는 일찌기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선전증권거래소 부총경리를 지냈고, 장위쥔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선전증권거래소의 총경리를 지냈다. 즉, 천홍차오는 장위쥔의 부하로 6년이상 같이 일을 했던 것이다.

2017년 7월, 중공중앙의 비준을 받아, 중공중앙기율검사위는 장위쥔의 엄중한 기율위반문제에 대해 입건심사를 진행했다. 관방통보에 따르면, 장위쥔은 정치기율과 조직기율을 엄중하게 위반하고, 조직심사에 대항하며, 규정에 따라 개인의 관련사항을 보고하지 않았다; 자본시장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증권관리감독기관의 이미지를 해쳤으며, 엄중하게 당의 기율을 위반하여, 성질이 악랄하고, 상황이 엄중하다. <중국공산당기율처분조례>등 관련규정에 따라 장위쥔에게 당적박탈처분을 내린다; 공직박탈처분을 내린다; 기율위반소득을 몰수한다; 관련범죄단서 및 관련재물은 사법기관으로 이송하여 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한다.

2021년 8월, 여러 정보원을 교차검증해보면, 장위쥔은 췌장암으로 병사했고, 향년 58세이다. 그 이전에 온라인에서 장위쥔에 대한 마지막 관방통보는 여전히 4년전에 머물러 있다. 2017년 9월 15일 최고인민검찰원이 법에 따라 장위쥔에 대하여 뇌물수수혐의로 입건수사를 시행하며 강제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직 공표되지 않고 있다. 이를 보면, 사망전에도 장위쥔은 여전히 수사를 받는 단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여자를 좋아한 류롄거는 4명의 부인과 결혼하고, 준며느리까지 부인으로 삼았다.

2023년 10월 7일, 중공중앙의 비준을 받아, 중앙기율검사위, 국가감독위는 중국은행주식유한공사 전 당위서기, 동사장 류롄거의 엄중한 기율위반, 법률위반문제에 대하여 입건조사를 진행했다.

반년여전인 3월 31일 62세의 류롄거는 2023년 낙마한 부부장급(차관급) 금융계의 '첫번째 호랑이'가 되었다. 반년이후, 그는 당적을 박탈당하고, 20대 당대표자격도 취소되었다.

10월 7일에 공표된 공고에는 류롄거에게 "8가지 죄"의 혐의가 있다. 그는 또 한명의 금융계통의 낙마자가 되었다. 그는 중대한 금융리스크를 조성하고, 사적으로 금지된 서적을 가지고 입국했으며, 규정을 위반하여 선물을 받았고, 사적 클럽하우스를 드나들었으며, 스키와 관광접대를 받았고, 장기적으로 관리대상의 차량을 빌려쓰고, 개인적으로 간부를 발탁, 기용했으며, 규정을 위반하여 기업을 차리고, 도덕적으로 퇴폐했으며, 가풍이 바르지 못하고, 거액의 뇌물을 수수했다.

류롄거가 낙마한 후, 항간에 가장 널리 퍼진 소문은 그가 풍류적이었다는 것이다. 31년전, 저명한 영화 <Damage>에는 유명한 영화배우 제레미 아이언스와 쥘리에트 비노슈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중년남자가 자기아들의 여자친구와 사랑에 빠져 결국 집안도 망하고 사람들도 망가지는 비극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래 그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재연되었다. 그리고 류롄거는 바로 그런 장면에서의 "남자주인공"이었다.

그는 첫번째 부인때문에 쾌속승진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둔 후에는 조강지처를 버렸고, 금융기관의 고관으로 있을 때 미녀부하를 방으로 불러들여, 신속히 두번째, 세번째 부인으로 취한다. 마지막에는 준며느리까지 부인으로 들인다.

5. 가장 부유한 성장 주십억(朱十亿)

주총쥬는 항간에 "십억성장"으로 불렸다.

2023년 11월 7일 저녁, 중앙기율검사위,국가감독위의 웹사이트에는 전 저장성 정협부주석 주총쥬가 "쌍개(双开 관직과 당직을 박탈당함)"되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근 1주일후에, 주총쥬는 수뢰험의로 체포된다.

통보에 따르면, 주총쥬는 이상과 신념을 상실하고, 초심과 사명을 배신하며, 당중앙의 대정방침과 중대바임에 함부로 이견을 토로하며, 소집단을 만들고 정치생태를 파괴했으며, 사적으로 금지된 서적을 반입하여 장기간 읽고, 조직의 심사에 대항했다; 중앙의 팔항규정정신을 무시하고, 여러번 공정한 공무집행에 영향을 줄 연회와 관광접대를 받았다; 조직원칙을 잃고, 규정에 따라 개인의 관련사항을 보고하지 않았으며, 규정에 위반하여 친척과 타인들을 채용하고, 승진시키는등 이익을 취했다; 규정에 위반한 선물을 수수하고, 배우자가 규정에 위반하여 관할지역내에서 경영활동에 종사하는 것에 대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시정조치를 하지 않았다; 직권을 이용하여 친척에게 부정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도록 하였다; 공공재를 사적으로 썼으며, 규정에 위반하여 시장경제활동과 사법집행활동에 간여하였다; 도덕이 퇴락하고, 법준수의식이 박약하며, 탐욕이 무한했다. 금융계에서 일하면서 금융계로 먹고 살았다. 직무상의 편의를 이용하여 회사상장, 융자대출등 방면에서 이익을 취했고, 거액의 뇌물을 수수했다.

주총쥬는 중국인민은행의 금융관리사(金融管理司, 사는 우리나라의 '국'에 해당함)에서 4년간 일했다. 나중에 증감회 판공실에서 일한다. 1997년 9월 주총쥬는 지방으로 내려가 선전증권감독판공실 전원으로 일한다. 1999년, 주총쥬는 상하이증권거래소 부총경리가 된다.

다음 해, 나이 겨우 35살의 주총쥬는 상하이증권거래소에서 역사상 가장 젊은 총경리가 된다.

2012년, 47세의 주총쥬는 증감회주석조리의 위치에서 저장성 부성장이 되어 낙하산으로 내려간다. 그는 가장 젊은 금융부성장이 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부성장에서 10년간이나 지내게 된다. 유사이래 재직기간이 가장 긴 금융부성장이 된 것이다. 그후 시종 단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외부에서는 주총쥬에게 크게 기대를 걸었고, 사람들은 그가 철완을 휘둘러 저장의 민간대출의 난상을 해결해주길 바랬다.

2018년 저장성을 포함한 전국의 여러 곳에서 2026년의 E주바오(E租宝), 콰이루(快鹿)사건에 이어 다시 한번 사태가 터진다.

저장상의 차오건투자(草根投资), 웨이다이왕(微贷网)등 여러개의 대형 P2P들이 연이어 부도난다. 사건관련금액이 600억위안에 이르는 원저우 뤼안의 루씨(卢氏)형제는 야반도주한다. 그리하여 P2P업계는 지뢰를 맞은 것같았고, 저장성의 성회도시 항저우는 "뢰도(雷都)"로 놀림받았다.

이는 금융보급을 주창하던 주총쥬에게 비난이 쏟아지게 만들었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웨이제(韦杰)가 실제지배하는 진청집단(金诚集团)은 PE, 신탁라이센스를 얻었는데, 그 배후에는 주총쥬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사건이 터진 후 진청집단이 투자자들에게 끼친 손실은 750억위안에 이르렀고, 무수한 장쑤, 저장의 부호들이 돈을 날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당시 저장성이 브레이크를 가장 늦게 밟아서, 결과가 가장 엄중했다고 말한다. 금융을 주관하는 부성장인 주총쥬는 직무유기의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2022년 주총쥬는 돌연 부성장의 직위를 내려놓고, 정협부주석이 된다. 이제 그의 관료로서의 앞날은 어둡다고 할 수 있다.

재신보도에 따르면, 주총쥬가 더 이상 승진하지 못했던 주요한 원인은 바로 집안에 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주총쥬는 여러 해동안 증감회와 저장성의 고위간부들 중에서 공개된 '돈많은 사람'이고, '조직에 신고한 재산이 근 10억위안에 이르렀다' 그는 현지의 항간에서 '주십억'으로 불렸다.

상하이에서 일하는 동안, 당시 집값은 싸고, 급여는 아주많아서, 여러 개의 부동산에 투자했었다. 상하이의 빌라가 2000년초에는 수십만, 수백만이었는데, 나중에는 억이 넘는 경우도 통상적이었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은 그의 재산축적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다. 그가 증감회에서 고위직무를 담당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해야할 점은 주총쥬의 처가 수입이 비교적 높은 PE업계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업계인사에 따르면, 주총쥬는 체제내의 관리이면서 이렇게 많은 재산을 보유하게 된 것은 그의 처의 직업 및 그가 관장하는 업무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본다. 확실히 외부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못할 점은 주총쥬가 간 곳마다 금융계의 간부들은 속속 낙마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19년 8월, 원저우에서 금융개혁의 맹장인 원저우은행 전행장 우화(吴华); 일찌기 저상은행(浙商银行) 부행장을 맡았던 장장궁(张长弓), 전 저장국국장, 상하이국국장이던 한이(韩沂), 저상은행 전 동사장 선런캉(沈仁康)

더 이전에는 예를 들어 증감회의 부주석 왕이(王益), 야오강(姚刚), 통다오츠(童道驰), 전 국금증권 동사장 레이보(雷波), 전 증감회 발행감독관리부처장 리즈링(李志玲), 투자자보호국 국장 리량(李量), 증감회 발행심사위원 펑샤오슈(冯小树), 전 발행부 부주임 왕종청(王宗成)과 3처 처장 류슈판(刘书帆), 산동국 국장 쉬티에(徐铁), 펑허녠(冯鹤年), 전 충칭국 국장 마오비화(毛毕华), 전 투자자보호국 1급순시원 쩡창홍(曾长虹), 전 상하이국 판공실 부주임 주이(朱毅)등

6. 중국역사상의 "사야정치(师爷政治)"

비서방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정치현상이다. 중국고대에는 이를 "사야정치"라고 불렀다.

막우(幕友), 또는 막객(幕客), 막빈(幕宾), 막료(幕僚)라고 불리며, 속칭 사야(师爷)이다. 고대에는 중앙 혹은 지방관리를 도와 정치적인 기획을 하고, 조사연구를 하고, 연락접대를 하며, 문서서무를 처리하거나 심지어 간부자제의 교육을 담당했던 인원을 말한다. 이를 보면, 막우를 막우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막후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관료사회에서, 기껏해야 관리의 조수, 참모 및 업무원이고, 상사의 수권을 받지 않으면 손안에 쥐고 있는 권력이 전혀 없게 된다.

그러나, 고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인치를 시행하는 전통사회에서, 지위, 신분, 권력운용매커니즘등 여러 요소에 기반하여, 막우들은 왕왕 고위관료의 권세를 같이 누렸고, 무대에 올라가서 직접 지휘하며, "권력도야(权力倒爷)" 혹은 "이장궤()"가 되었다. 이는 실로 현재의 "비서정치"와 닮아 있다.

고대의 "사야정치"는 개략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사야는 구체적인 정무에 참여하여, 관리의 권력을 대신 행사하고, 실질적으로 주공의 화신 혹은 대변인이 된다;

둘째, 사야는 권력과 금전거래에 참여한다. 관리와 이익공동체를 결성하고, 실질적으로 주공의 브로커 혹은 이익대리인이 된다.

셋째, 사야는 실로 관료로 승진하는데 지름길이었다. 적지 않은 사야들은 고위관료를 위해 계책을 내고, 인정을 받아 이를 기반으로 관료가 되어 요직을 점거한다. 그리고 주공과 상호 호응하면서 정치적 판도를 확대하고, 파벌을 형성한다.

넷째, 사야집단은 왕왕 엄청난 정치, 경제 및 사회자원을 확보하고, 일처리가 민첩하여 관료사회의 규칙이나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중에 장악한 공권력과 발언권을 활용하여 풍운을 불어일으킬 수 있다.

다섯째, 사야는 관리와는 직책한계는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야들의 행위는 관리감독을 받지 않는다. 그리하여 동료들은 왕왕 '개를 때리려먼 주인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 사야들의 월권행위에 대하여고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관여할 수도 없었다.

확실히 '사야정치'는 전통정치체제의 약한 고리이다. 이는 역대 선비들이 많이 몰린 이유이기도 하다. 진한시기의 상서대(尚书台)는 순수한 문서처리를 담당하는 비서기구였는데, 남북조시기에는 권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상서성(尚书省)으로 된다. 그동안 대권을 좌지우지하면서 흥풍작랑(兴风作浪)했는데, 그들은 바로 붓자루를 쥐고 있던 것은 사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