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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역사상의 "태종(太宗)": 모두 "내로부정(來路不正)"한 황제들이다

by 중은우시 2020. 10. 26.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중국 수천년의 왕조사에서 묘호(廟號)는 아주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묘호"와 "시호(諡號)"는 모두 어느 정도에서 황제일생의 공과시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다만 후세의 황제는 시호의 수가 늘어나서, 자손들이 조상을 위하여 시호를 정할 때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기 어려워졌다. 다만 '묘호'는 '시호'를 대체하여 황제에 대한 개관정론(蓋官定論)의 중요한 근거이다.

 

가장 원시적인 묘호는 상(商)나라때 건립된다. 당시에는 단지, "태(太)", "고(高)", "세(世)", "중(中)"의 4종이었다. 그리고, "조유공이종유덕(祖有功而宗有德)", 조는 공이 있는 황제에게, 종은 덕이 있는 황제에게 붙인다는 기준으로 조종의 묘호를 정했다. 나중에 왕조가 계속되면서 더 많은 묘호가 나타난다. 관례에 따라, 매 왕조의 개국지군은 일반적으로 "태조(太祖)"라 칭하고, 두번째 황제는 "태종(太宗)"이라 칭한다. 다만, 필자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영명신무하건 혼용무능하건, "태종"들의 황위는 어느 정도 '내로부정(來路不正, 황제에 오르는 방식이 바르지 않았다)'는 혐의가 있다.

 

먼저 한(漢)나라를 보자. 우리가 잘 아는 한문제(漢文帝), 한무제(漢武帝)는 모두 '시호'이다. 이는 한왕조가 '묘호'에 대하여 아주 엄격하였기 때문이다. 서한의 11명 황제 중에서 오직 4명만이 묘호를 받았다. '문경지치(文景之治)'의 한경제 조차도 묘호가 없다. 듣기에 좀 낯선 "한태종(漢太宗)"은 기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문제 유항(劉恒)이다. 한무제의 묘호는 한세종(漢世宗)이다. '세(世)'의 의미는 진정한 통서(統緖)가 이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세상을 연다는 뜻이다.

 

왜 한태종의 즉위가 '합법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가? 원래 한왕조의 개국황제 유방은 8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가 죽은 후 적장자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이 즉위한다. 한혜제가 죽은 후, 여후가 권력을 전횡하고, 전후소제를 괴뢰황제로 내세우며 조정을 8년이나 장악한다. 여후가 죽은 후, 유방을 따라다니던 태위 주발, 승상 진평이 여씨일족의 '제여지란'을 진압하고 유항을 맞이하여, 황제에 앉힌다. 한태종은 그리하여 대통을 이은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가장 유명한 '태종'일 것이다. 비록 그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고, 대당의 태평성세인 정관지치를 열기면, 그가 일으킨 현무문사변은 그의 공적과 마찬가지로 지울 수가 없다. 이세민은 적자이지만 적장자가 아니다. 황태자 이건성이 엄연히 앞에 있었다. 만일 그가 현무문사변을 일으켜 선발제인하지 않았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가한(天可汗)'은 목숨을 보전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사치였을 것이다.

 

송태조 조광윤은 '황포가신'과 '배주석병권'을 통하여 황위에 오르고, 정권을 공고히 한다. 다만, 그의 말년, 역시 하나의 유명한 이야기가 발생한다. '촉영부성'이라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몸이 좋지 않던 조광윤은 둘째동생 조광의를 궁으로 불러 술을 마시고 같이 잤다. 그 와중에 급사한다. 조광의는 다음 날 황제에 오르고 송태종이 된다. 그는 등극후, 유일한 동생 조연미와 조광윤의 두 아들이 모두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만일 송태종의 '막수유'와 당태종의 '선하수위강'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명태종의 행위는 '명창(明搶)'이라고 할 수 있다. 명태종은 바로 이름도 유명한 주체(朱棣)이다. 그는 조카 건문제가 이미 등극한 후에 공공연히 '정난지역'을 일으킨다.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3년의 시간을 들여 그는 마침내 남경을 점령하고, 강산을 빼앗는다. 전임황제 주윤문은 행방불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