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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홍군(紅軍)의 10대패전(十大敗戰)

by 중은우시 2020. 8. 8.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1. 제2차장사전역(第二次長沙戰役)

 

시간: 1930년 8월 30일부터 9월 12일까지

쌍방지휘관: (홍군) 모택동(毛澤東), 주덕(朱德), 팽덕회(彭德懷)

                (국군) 하건(何鍵), 나림(羅霖), 공병번(公秉藩), 전대균(錢大鈞)

쌍방병력: (홍군) 13개단

             (국군) 31개단

전투과정

- 1930년 7월 24일, 홍3군단이 기습하여 적군 근 3개단을 섬멸시킨다.

- 7월 28일, 장사성(長沙城)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적 4,5천명을 포로로 잡고, 각종 총기 3000여점을 노획한다. 기반가의 군용창고를 탈취하고, 체포된 혁명동지들을 석방했다.

- 8월 23일 홍1군단, 홍3군단이 유양 영화진에서 회합하고, 다시 장사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 이번 공격에 국군은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병력을 모아서 방어진을 구축한다. 홍군은 반달동안 포위공격하였으나, 부분적인 승리만 거두었을 뿐, 결국 함락시키지 못한다. 국군의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면서 홍군은 양식과 탄약이 떨어지고, 사상자가 많이 나오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모택동은 상급대표와 홍1방면군의 간부를 설득하여 철수하기로 하고, 감남(贛南, 강서성남부)근거지로 돌아온다

- 제2차공격은 국군의 엄밀한 방어로 결국 실패로 끝난다.

 

2. 감주전역(贛州戰役)

 

시간: 1932년 2월 4일부터 3월 7일까지

쌍방지휘관; (홍군) 이덕(李德), 박고(博古), 팽덕회

                (국군) 나탁영(羅卓英), 마곤(馬崑)

쌍방병력 (홍군) 홍1방면군, 1, 3, 5군단, 약 4만명

             (국군) 제3군34여, 지주무장부대, 경찰대, 상민자위단 합계 1만여명

             (국군지원군) 제11사, 14사, 2개독립여, 합계3만여명

전투과정

- 감주의 동, 서, 북 3면은 물이다. 오직 남쪽만 육지이다. 3개의 강이 회합하는 지역이다. 거꾸로된 Y자모양이다. 그리하여 쌓은 성벽이 아주 험준했다. 홍3군단과 홍7군이 주력으로 공격했는데, 여러번 공격했고, 구름사다리를 파고 올라가고, 폭파를 시도해보았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한다.

- 11사 사단장 나탁양을 3만여명의 원군을 이끌고 감주로 달려왔고, 수비병사들과 연락했다. 그후 홍군은 교전이 불리하여 어쩔 수 없이 철수한다.

- 홍군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고, 철수해야만 했다. 4명의 사단장급간부가 전사했다. 홍군의 무기는 누추하고 병력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감주성이 수비는 쉽고 공격은 어려우며, 교통이 편리하다. 국군이 지원을 보내기에 편리했다. 이덕등은 실제상황과 맞지 않게 지휘하다가 결국은 실패로 끝난다.

 

3. 홍호진지전(洪湖陣地戰)

 

시간 1932년 8월 24일부터 8월 31일까지

쌍방지휘관 (홍군) 하희(夏曦), 단덕창(段德昌)

               (국군) 서원천(徐源泉)

쌍방병력  (홍군) 홍7사, 경위사 및 지방부대

             (국군) 21개단을 4개종대로 나누고, 6개단을 예비대로 하였다. 그외에 5개사 2여가 견제업무를 담당했다.

전투과정

- 하희는 모험주의에서 소극적 방어로 전술을 바꾼다. 홍군에 소비에트구내에 보루를 구축하여 방어를 준비하도록 명령한다.

- 8월 20일 국민당군이 백묘(白廟) 서쪽 동형하(東荊河) 북안지역을 장악하여 직접적으로 상악서소비에트구의 기관소재지인 구가만(瞿家灣)을 위협한다. 하희는 홍7사, 경위사와 지방부대를 지휘하여 소비에트구에 보루를 짓고, 병력을 나누어 지킨다. 동형하 남안지역을 고수한다.

- 8월 24일 국민당의 좌익군(左翼軍)이 동형하 남안의 요점인 봉구(峰口)와 부장(府場)을 점령한다. 홍7사는 황급히 반격하나 실패한다. 31일, 좌이군은 신구취(新溝嘴), 양림관(楊林關)을 포위공격한다. 홍7사는 진지에 의탁하여 방어하지만 큰 손실을 입고 어쩔 수 없이 철수한다.

- 하희는 단순한 방어구상하에, 홍호소비에트구에서 국군과 대규모의 진지방어전을 결행한다. 적군은 수가 많고 아군은 수가 적으므로 결국 실패한다. 비록 일부 부대가 포위망을 뚫었지만, 홍호소비에트구는 결국 실패로 끝난다.

 

4. 신집결전(新集決戰)

 

시간 1932년 8월 22일에서 9월 6일까지

쌍방지휘관 (홍군) 장국도(張國濤), 서향전(徐向前), 진창호(陳昌浩)

               (국군) 호종남(胡宗南), 유제시(兪濟時), 탕은백(湯恩伯), 이묵암(李默庵)

쌍방병력    (홍군) 홍4방면군, 주력 4.5만명

                (국군) 9개종대, 2개총예비대 합계 24개사와 6개여, 합계 30만명. 그리고 4개 항공대

전투과정

- 국군은 '종심배비(縱深配備), 병렬추진(幷列推進), 보보위영(步步爲營), 변진변초(邊進邊剿)"의 전법을 취한다. 제1단계로 호북성 황안(지금의 홍안), 칠리평과 하남성 신집(지금의 신현), 상성등 요지를 점령하고, 홍4방면군을 악예(하남,호북)경계로 쫓아낸다; 제2단계로 동서에서 협공하여, 금가채를 중심으로 하는 환서(안휘서부)지역을 점령한다. 다시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 홍군과 결전을 벌인다.

- 장국도의 지휘하에, 홍4방면군의 주력은 2차에 걸쳐 마성을 포위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한다. 근 1달의 시간을 소비한다. 그리하여 부대는 극도로 피로해지고 소모된다. 그후 다시 풍수역지구, 칠리평에서 2번에 걸쳐 국군과 정면으로 전투를 벌인다. 적군 5천여명을 섬멸했지만, 국면을 전환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홍군도 많은 사상자를 낸다.

- 8월 22일, 국민당군 제2종대는 단수강 일대의 험준한 지역을 우회하여 제1종대와 합친다. 그리고 악예완소비에트구의 정치중심지인 신집을 공격한다. 장국도의 명령하에, 홍군은 진지저격전을 벌인다. 5일간 격전을 벌였고, 제2종대 2천여명을 섬멸하여 공방이 뒤바뀌게 만들었다.

- 9월 6일, 국민당군 제1, 제6종대가 각각 북쪽과 남쪽에서 홍4방면군의 측후방으로 공격한다. 그리고 제2종대와 함께 삼면에서 합공한다. 홍4방면군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황안, 마성지구로 옮겨간다.

- 장국도는 기계적으로 진지전을 펼친다. 국군과 소모전을 펼쳤고, 홍군의 사상자가 아주 많이 발생한다. 근거지를 지킬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제25, 제27사 및 독립여단을 소비에트구에 남겨서 계속 투쟁하도록 하고, 홍4방면군의 본부는 제10, 제11, 제12, 제73사 및 소공국제단(少共國際團) 2만여명이 천섬(사천, 섬서)지구로 옮겨간다.

 

5. 칠리평위공전(七里坪圍攻戰)

 

시간: 1933년 5월 2일에서 6월 13일까지

쌍방지휘관 (홍군) 오환선(吳煥先), 서해동(徐海東)

               (국군) 정동국(鄭洞國)

쌍방병력    (홍군) 홍25군 1.1만명

               (국군) 제13사 3개단, 6천여명, 지원군 제89사 7천여명

전투과정

- 중공 악예환성위(악은 호북, 예는 하남, 환은 안휘)의 지시하에, 홍25군은 공격경험과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고, 수비하는 적을 포위공격하고, 지원군을 차단하는 역량도 결핍되어 있었으며, 보급도 곤란한 상황하에서, 칠리평에 주둔하는 국군13사단에 대한 포위공격을 실시한다.

- 4일부터 11일까지, 홍군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여러번 견고하게 방어진지를 구축한 적군의 앞까지 그리고 고지까지 용맹하게 진격한다. 그러나 국군의 진지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또한 국군에 중대한 사상자도 발생시키지 못한다.

- 전투개시 10일후, 홍군은 양식이 끊어지고, 보급은 어려웠다. 6월 중순이 되자, 홍군은 피동적인 입장이 돈다. 여러 날동안 식량이 없고, 장기간 노숙하다보니 질병이 만연했다. 국군은 그 기회를 틈타 군대를 이동시켜, 근거지주심구역으로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성위는 할 수없이 칠리평위공전을 포기하고, 6월 13일 저녁, 전군에 철수명령을 내린다.

- 이 전투로 13000명의 부대원은 6000명으로 격감한다. 홍25군의 전투력은 크게 약화된다. 근거지도 파괴된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았고, 다시 한번 저조(低潮)한 상태로 빠져든다.

 

6. 광창전역(廣昌戰役)

 

시간 1934년 4월 10일부터 4월 27일까지

쌍방지휘관 (홍군) 이덕, 박고, 팽덕회

                (국군) 진성(陳誠), 고축동(顧祝同)

쌍방병력 (홍군) 홍1방면군 1,3,5,9군단 합계 9개사, 근 3만명

             (국군) 국군중로군 11개사, 1개포병여, 10만명

전투과정

- 이덕등은 유연성없는 작전방침을 취하여, 적군이 보루를 쌓고,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상황하에서, 홍군에도 보루를 쌓아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군이 보루로 전진하면 단거리내에서 적에게 돌격하도록 한다. 이 전술은 적군을 살상할 수는 있는데, 적군이 후퇴하고 나면 섬멸할 수가 없었고, 무기도 획득할 수 없으며, 포로를 얻을 수도 없었다. 그저 적군과 소모전을 벌이는 것이다.

- 국군은 우강(旴江)을 따라 광창을 향해 진격했다. 홍군은 지형에 의지하여, 견고하지 못한 보루를 쌓아 막아야 했다. 비행기와 대포가 지원하는 상황하에서 국군은 진격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홍군의 사상자가 많았다. 할 수 없이 후퇴해야 했다. 4월 18일부터, 국군은 강서 균문령을 공격하고, 홍군은 견고한 진지를 사수했다. 국군이 여러번 돌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그후 주변부대가 증원을 오고 공군이 지원한다. 며칠 후 균문령도 함락된다.

- 유연하지 못한 진지전으로 홍군은 5천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구축해놓은 흙으로 된 보루는 국군의 비행기와 포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실패한다. 이번 실패후, 중앙홍군은 더 이상 적군의 겹겹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없게 된다.

 

7. 상강전역(湘江戰役)

 

시간 1934년 11월 27일에서 12월 1일까지

쌍방지휘관 (홍군) 이덕, 박고

                (국군) 백숭희(白崇禧), 설악(薛岳), 하건(何鍵)

쌍방병력  (홍군) 홍1방면군 6.4만명

              (국군) 16개사 합계 77개단, 근 20만명. 계군(桂軍) 5개사, 4만여명

전투과정

- 홍1, 홍3군단이 계군의 공격에 격파당하고, 계북(귀주북부)으로 들어간다.

- 27일 선두부대 홍2, 홍4사가 각각 상강을 일부 건너, 각산포에서 계수까지의 30킬로미터의 상강양안의 나루를 장악한다. 다만 후속부대의 물자가 너무 많고, 도로가 좁아서, 행동이 느렸다. 그리하여 나루까지 도착하지 못한다.

- 그후 며칠간 부대는 나루에서 혈전을 벌이며 군위종대를 엄호하여 강을 건넌다. 추격병과 계군의 협공하에 혈전이 벌어진다.

- 홍군은 상강을 돌파했지만 5군단, 소공국제사, 8군단, 9군단의 손실이 엄중했다. 전체군이 3만여명을 잃는다. 대부분의 물자로 잃어버렸다.

 

8. 담가교전역(譚家僑戰役)

 

시간 1934년 12월 24일

쌍방지휘관 (홍군) 방지민(方志敏), 심회주(尋淮洲), 악소화(樂少華), 유주서(劉疇西), 속유(粟裕)

               (국군) 유제시, 유진화(劉鎭華), 왕요무(王耀武)

쌍방병력   (홍군) 홍10군단의 홍19사, 홍20사, 홍21사

              (국군) 21개단을 4개종대로 나누고, 6개단은 에비대로 한다. 그외에 5개사 2여가 견제임무를 수행한다.

전투과정

- 1934년11월 24일 방지민의 지휘하에 환남(안휘남부)으로 전진한다. 12월초에 안휘 휴녕일대에 도착한다.18일 탕구에서 심회주이 홍19사와 회합한다. 탕구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한 후, 홍군은 계속하여 고죽계로 전진한다. 이어서 담가교로 출발했다. 도중에 국군중로추격군 왕요무부대가 추격해온다는 것을 알았다홍군과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그리하여 오니관에서 매복기습을 하기로 결정한다.

-12월 23일 저녁 방지민부대는 오니관에서 담가교에 이르는 도로의 양편에 매복한다. 홍19사는 북쪽에서 도로의 우측에 배치한다. 홍20, 21사는 남쪽에서 도로의 좌측에 배치된다. 홍군의 지형선택은 좋지 못했다. 국군은 도로를 점거해서 위에서 아래로 향했고, 홍군은 적군을 향하여 돌진하면 위를 보면서 공격해야 했다. 다음으로 견제부대와 돌격부대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량을 집중하지 못했다.

- 24일 오전 10시, 국군 선두부대가 매복지점으로 들어왔다. 홍군은 협력이 잘 되지 않아서 너무 일찍 공격을 개시한다. 그리하여 목표가 드러났다. 그외에 군단지휘관이 지휘를 잘 하지 못해서 병력배치가 엉망이었다. 3개사간의 협조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군은 병력을 집중했고, 왕요무는 지휘를 잘했다. 홍10군단 각 사의 접합부를 돌파했고, 결국 기습은 실패로 끝난다.

- 기습전은 왕요무의 반격에 궤멸된다. 19사의 사장 심회주가 전사하고, 홍7군단 정위 악소화, 정치부주임 유영(劉英)등 사단장급이상의 간부가 8명 부상을 입는다. 87단의 단장 황영특(黃英特)은 전사했고, 부대원도 절반이상을 잃는다.

- 방지민부대는 적군을 없애고 자신을 보충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오히려 처지는 더욱 열악해진다. 1달후, 홍군은 다시 한번 포위되고 대부분 궤멸한다. 오직 속유가 소수의 부대원을 이끌고 포위망을 벗어나 계속 유격전을 견지했다.

 

9. 백장관결전(百丈關決戰)

 

시간 1935년 11월 13일부터 11월 21일까지

쌍방지휘관 (홍군) 장국도, 진창호, 서향전

               (국군) 유상(劉湘), 왕찬서(王纘緖), 당식준(唐式遵), 이가옥(李家鈺)

쌍방병력   (홍군) 홍4방면군 8만명

              (국군) 천군(川軍) 79여개단, 20만명

전투과정

- 1935년 9월하순, 장국도는 홍4방면군을 이끌고 남하한다.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천군 8, 9여를 궤멸시킨다. 부대는 연속작전을 펼치면서 성도를 향해 진격한다. 11월 20일, 이미 대도하(大渡河) 동쪽, 청의강(靑衣江) 이북, 무공(懋功)이남이 광대한 지역을 점령한다.

- 유상은 자신의 지반을 지키기 위해, 급히 주력 왕찬서, 당식준등의 부대와 이가옥의 부대로 하여금 명산. 협문관, 태화장, 석비강에 결집하여 홍군을 공격하게 한다. 이곳은 성도로 통하는 요지이다.

- 11월 13일, 홍군 15개단의 병력이 오가구에서 주가장, 태화장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16일 백장진을 점령하고, 적군 6개여의 반격을 물리친다. 그후 천군 10여개여가 비행기와 대포의 엄호하에 반격을 개시한다.

- 7일밤낮의 전투를 거쳐, 비록 천군 1만5000여명을 섬멸했지만, 홍군도 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주력이 무너졌고, 주진지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21일 백장으로 후퇴한다.

- 2개월여의 작전에서 적군 4만여명을 섬멸했고, 2대의 비행기를 격추시켰으며 1개의 포병여단에 타격을 가했지만, 정면으로 천군과 대결하면서 홍군은 병력, 무기에서 모두 열세였다. 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안정적인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몇달간 전전하다가 1936년 4월, 병력 8만명은 4만명으로 줄었다. 남하작전은 철저히 실패로 끝난다.

 

10. 예가영자위공전(倪家營子圍攻戰)

 

시간 1937년 2월

쌍방지휘관 (홍군) 장국도, 진창호, 서향전

               (국군) 마보방(馬步芳), 마보청(馬步靑), 마원해(馬元海)

쌍방병력  (홍군) 홍군서로군 1만여명

              (국군) 마가군제100사, 경비제1여, 제2여, 기병5사, 근 3만명

전투과정

- 1937년 2월 참혹한 사상자를 낸 서로군의 잔여부대 1만여명은 예가영자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마가군의 포위공격을 받는다. 격전을 벌였고, 겨우 소수만이 포위망을 뚫었다.

- 1937년 1월 서로군은 마가군의 추격을 벗어났고, 따라오던 마가군 1개단을 섬멸시킨다. 원래 동쪽으로 가서 섬북(섬서북부)으로 가려 했으나, 진창호가 우겨서 다시 예가영자로 돌아간다. 이 결정으로 결국 서로군은 전멸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