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도도(木圖圖)
명나라말기 비교적 유명한 고위장수들은 모두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번왕(四藩王)이다. 즉,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그 다음으로 조대수(祖大壽), 홍승주(洪承疇)가 있고, 속순공(續順公) 심지상(沈志祥), 의왕(義王) 손가망(孫可望), 맹교방(孟喬芳)이 있다.
그 외에도 액부(額駙) 이영방(李永芳), 마광원(馬光遠), 손득공(孫得功), 김려(金礪), 포승선(鮑承先), 조택윤(祖澤潤), 조택부(祖澤溥), 조택홍(祖澤洪), 조가법(祖可法), 조택원(祖澤遠), 장존인(張存仁), 이국영(李國英), 유무원(劉武元), 진금(陳錦), 유방명(劉芳名), 좌몽경(左夢庚), 전웅(田雄), 마득공(馬得功), 장천록(張天祿), 허정국(許定國), 유량좌(劉良佐), 조지룡(趙之龍)이 있다.
이들은 모두 원래 명나라에서 최소한 참장(參將)이상의 고위장수이며 청나라에 투항한 후 1품의 고위직까지 올라갔으며 모두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들이다. 여기에서 한명 한명 소개하지는 않겠다.
그렇다면, 왜 명나라의 장수들은 청나라에 이렇게 많이 투항했을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왜 스스로 왕에 오르지 않고 오히려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을까? 그들의 수중에는 많은 권리와 병마가 있었는데...
영마라말기 명나라조정의 장수들이 청나라에 투항한 원인을 한 마디로 하자면,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정권과 만청정권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기실 명나라말기 장수들이 청나라에 투항한 것은 부득이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원인은 대체로 아래의 몇 가지 방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병력을 비교해보면 천양지차가 있다. 명나라말기 명나라조정의 장수들이 청나라에 대규모로 투항하기 시작한 것은 주로 청나라군대가 북경을 점령하고 점점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갈 때부터이다. 당시 하북, 산동, 산서등지의 명나라장두들은 대부분 이미 이자성(李自成)의 대순군(大順軍)에 투항했었다. 이제 전투력이 대순군보다 더욱 강한 만주관병을 만났고, 이자성은 군대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다보니 각 성들은 고립무원이 되었다. 만일 성을 굳게 지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이는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었다. 만일 스스로의 목숨이라도 보전하려면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청나라초기의 정책이 인심을 얻었고, 대순정권과 남명조정은 엉망이었다. 도르곤이 막 산해관을 넘어왔을 때 공성의 난이도를 너무나 쉽게 보았다. 연도의 군민들에게 일률적으로 체두변발을 하도록 명령하여 강렬한 반발을 불러온다. 만주족정권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북경을 정멸한 후에는 즉시 이런 민족압박정책을 중지한다. 그리고 명을 내려, "천하의 신민은 옛난처럼 머리를 기르고 스스로 편한대로 하라." "명나라식의 머리와 복장을 하고 원래의 관복을 입고 일처리를 하라" 그리하여 상당히 많은 정도로 명나라장수들의 반감을 완화시킨다. 동시에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대거 명나라장수들을 회유한다. 명나라의 관리이건 농민정권의 관리이건, 청나라에 투항하기만 하면 관직을 원직에 그대로 두고 심지어 관직을 올려주고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순군은 계속 패퇴하여 거의 북방지역의 통치를 포기했다. 추장조향(追贓助餉)으로 관료들을 착취함에 따라 관료와 사대부의 지지도 잃었다. 남명의 홍광정권은 내부권력다툼이 극심했고, 고토를 수복하겠다는 것은 그저 표면적인 것이고 병졸 한명 내보내지 못했다. 이는 명나라장수들로 하여금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순국하거나 투항하거나.
셋째, 황제는 강퍅자용(剛愎自用)하여 누가 좋은 사람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억울한 사건이 빈발한다. 특히 장수들은 모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자가 드물었다.
넷째, 전략이 혼란스러웠다. 요동에 대한 전략이 명나라정권때 이리저리 오락가락했다. 대외전략조차도 안정적이지 못하다보니, 장수들은 더더구나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지를 몰랐다.
다섯째, 경제가 붕괴되었다. 비록 만청이 요역과 부세를 낮춰준다는 기치를 내걸어 민심을 얻고 있었지만, 명나라의 세금정책은 실제로 청나라보다 낮았다. 특히 상업세가 그러했다. 이는 명나라정부로 하여금 쓸 돈이 없게 만들었다. 돈이 없으니 싸울 수가 없었다.
여섯째, 천시(天時)가 불리했다. 당시는 바로 소빙하기였다. 그리하여 농업생산이 대폭 감소된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차도 보장되지 못했다. 그러니 국가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저항강도로 보면, 남장이 북방볻 강했는데, 큰 원인은 바로 남방 사람들은 그래도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청은 완전히 약탈에 의지하여 자신의 수요를 채웠다. 전체 화북평원은 비록 천재는 가벼웠지만, 천재+인화가 있었다.
그리고, 왜 스스로 왕에 오르지 않았는지에 관하여는 명나라황실 내부의 투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성(異姓)에까지 돌아갈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장수들은 실질적으로 지방에서 할거하고 있었다.
기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명나라말기의 장수들 중에서 일부 지방깡패출신의 깡패장수라든지 호부견자(虎父犬子)의 2세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청나라에 투항하는 걸 원치 않았다. 오히려 어쩔 수 없이 청나라조정과 타협을 한 것이다. 체두변발하지 않고 옷을 바꿔입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투항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왕조가 정권이 안정된 후 다시 체두변발과 만주복식을 강제하려 하자 각지의 관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