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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몽제국(元蒙帝國): 중국역사상 제2차 서방천학(西方天學)의 중국유입

by 중은우시 2017. 2. 19.

글: 강효원(江曉原)


사마르칸트에서 구처기(丘處機)의 천학교류


징기스칸은 대제국을 건립하였다. 그의 사후 몇몇 아들은 각각 칸국을 건립했다. 이들 칸국은 실제로 독립된 것이다. 다만 그들은 명목상의 종주국이 있었다. 바로 쿠빌라이가 중국에 걸립한 원제국이다. 이 몇 개의 칸국은 징기스칸의 자손이 건립한 것이므로, 그들간에는 밀접하게 왕래했다. 이 유라시아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은 당연히 천학을 교류할 많은 기회를 가져온다.


하나의 사례를 보도록 하자. 구처기는 김용 소설에 나오는 인물중 하나이다. 그러나 역사상 확실히 그런 사람이 있었다(1148-1227). 그는 확실히 도사이다. 징기스칸으로부터 예우를 받았기 대문에, 명을 받아 징기스칸에게 가서 도에 대하여 얘기를 한다. 구처기의 수행제자는 <장춘진인서유기>를 써서 그가 서쪽으로 징기스칸을 만나러갔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중 한 곳에는 중앙아시아에서 현지의 천학자와 최근의 일식에 대하여 토론한 것을 기록해 두었고, 토론의 구체적인 부분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구처기는 1221년 사마르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다. 그는 이 도시에서 현지의 천문학자와 이해 오월에 발생한 일편식(日偏食, 양력 5월 23일), <장춘진인서유기> 권상에는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미사간(邪米思干,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그때 역법을 계산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스승(구처기를 가리킴)은 오월 초하루(朔)에 일식의 일에 관하여 물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진시(辰時)에 일식이 육푼(六分)에 이르렀다. 스승이 말하기를: 전에 육국하(陸局河)에 있을 때 오각(午刻)에 식기(食旣, 일식이 최대로 진행된 상태)에 이르렀다. 다시 서남으로 금산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시에 칠푼(七分)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세 곳에서 본 것이 각각 다르다....지금 생각하니, 식기를 보고 있을 때, 곁에 있는 사람은 천리 먼 곳에 있었다. 마치 부채로 등을 가리는 것처럼 부채그림자가 미치는 곳에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그 곁에서 점점 멀어질 수록 빛도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다.


구처기는 이때 이미 73세의 고령이었다. 만리 먼 길을 가면서도 천문학 문제를 살펴보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보면 그가 이 분야에 흥미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지리적 위치가 다르면 일식의 정도가 다른 것을 해석하고 비유한 것은 정확하다.


구처기는 사마르칸트에서 현지의 천학가들과 교류했는데,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150년이후, 이 땅은 신흥 테무르왕조이 수도가 된다. 울루베그(Ulugh Beg)가 즉위할 때, 이곳에는 거대한 규모의 천문대가 세워진다(1420년). 울루 베그는 친히 이 일을 주재하고, 관측을 통하여 <울루베그천문표>를 작성한다. 거기에는 서방천문학사상 프톨레마이오스이후 천여년만에 나온 최초의 독립적 항성표(恒星表)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마게스트>에 항성표를 기록했고, 그후 서방의 항성표는 도두 이 표의 기초 위에 약간의 오차를 교정하는 정도였고 독립된 관측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마르칸트 현지에는 오랫동안 아주 강하게 천문학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천문학에서, 잃식을 예측하는 것은 아주 수준높은 기술을 필요로 했다. 중국의 고대인들은 비록 고대그리스처럼 정밀한 천문학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방법으로 상당하 높은 정밀도로 일식을 예측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배경으로 보면, 당시 중앙아시아의 천학가들이 사용한 천문학 도구는 고대그리스의 방법을 위주로 했다.


유럽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수백년간 암흑시대라 일컬어진다. 기실 이 시대는 절대로 암흑이 아니었다. 다만 문화는 확실히 후퇴했다. 7세기 아랍제국이 흥성하면서, 몇 개의 강성한 제국이 건립된다. 제국의 우두머리는 학술활동을 스폰서하기를 좋아했다. 돈을 내서 일부 저명한 학자를 먹여살린다. 유럽에서 가져온 많은 그리스 원고를 아랍어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천학에서 사용한 천문학도구는 기본적으로 모두 그리스의 천문학이다. 이 기초 위에서 일부 민족풍격에 맞도록 수정한다. 방법은 모두 비슷했다. 그래서 구처기가 사마르칸트에서 현지 천문학자와 교류하면서 추산할 때 그가 사용한 것은 중국식 방법일 것이다. 중앙아시아 천학가가 사용한 것은 아랍인들이 번역하고 수정한 그리스방법일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거의 공통점이 없다.


중앙아시아 천학가가 가져다준 아랍천문관측기기


원세조 쿠빌라이가 중국전역을 통일한 후, 원왕조를 건립하고 명목상으로 종주국이 된다. 그래서 다른 그의 형제칸국과의 사이에 교류가 비교적 많았다. 위에 언급한 구처기의 예는 아마도 민간활동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 마련한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마련한 것으로 비교적 유명한 것은 자말앗딘이 가져온 7개의 천문관측기기이다.


자말앗딘은 중앙아시아인일 것이다. 쿠빌라이가 그를 불러서 그에게 원왕조의 황실천학기구를 책임지게 한다. 자말앗딘은 7개의 아랍천문기기를 가져오는데, 이 7건의 천문기기는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비록 실물이 전해져 내려오지는 않지만, 이것은 아랍인들이 천문관측에 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사.천문지>에 따르면, 7건의 천문관측기기는 다음과 같다:


1. Dhatu al-halag-i 중국어로는 혼천의(混天儀)이다. 고대그리스의 경전적인 천문관측기기이다.

2. Dhatu sh-shu balai 중국어로는 측험주천성요지기(測驗周天星曜之器)이다. 중외학자들은 모두 이를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마게스트>에서 말한 '장척(長尺, Organon parallacticon으로 본다.

3. Rukhamah-i-mu wajja. 중국어로는 춘추분귀영당(春秋分影堂)이다. 춘분, 추분의 정확한 시각을 계산하는 기기이다. 하나의 밀폐된 건물을 지어서 지붕의 정동에서 서방을 향하여 틈을 하나 만든다.

4. Ruhkamah-i-mustawiya. 중국어로 동하지귀영당(冬夏至影堂) 동지, 하지의 정확한 시각을 계산하는 기기이다. 위의 기기와 비슷학 건물의 정남에서 북쪽을 향하여 틈을 하나 만든다.

5. Kura-i-sama. 중국어로 혼천도(渾天圖)이다. 이는 중국과 서방 고대에 모두 가지고 있던 천구의(天球儀)이다.

6. Kura-i-ard. 중국어로 지리지(地理志)이다. 즉 지구의(地球儀)이다.  

7. al-Ustulab. 중국어로 정주야시각지기(定晝夜時刻之器)이다. 중세기 아랍세계와 유렵에서 모두 아주 유행하였던 성반(星盤, astrobabe)이다. 


이중 두 개의 귀영당은 일종의 건축물이다. 자말앗딘이 건물을 가지고 온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는 그저 건축물의 설계수치를 가져왔을 뿐이고, 중국에 도착한 후에 새로 짓게 된다.


곽수경 천학기기의 배후에는 아랍의 영향이 있을까?


곽수경(郭守敬)은 원나라때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이다. 그는 <수시력(授時曆)을 편제했다. 그리고 많은 천문기기도 만들었다. 곽수경의 천문기기와 아랍의 기기 사이에는 아마도 모종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왜냐하면 원나라는 아주 기이했다. 두 개의 사천대(司天臺)가 있었다. 문서를 보면, 하나는 "회회사천대(回回司天臺)로 불리고, 다른 하나는 "한아사천대(漢兒司天臺)"라고 불리웠다. 한아사천대는 중국전통의 천학기구이다. 회회사천대는 이슬람의 천학기구이다. 그들은 같은 상급기관인 비서감(秘書監)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능은 같다. 단지 사용하는 도구가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추측해볼 수 있다. 이 두 개의 사천대는 모종의 경쟁상태에 처해 있음을...


곽수경이 만든 기기는 표면적으로 보면 중국식이다. 예를 들어, 곽수겅이 "간의(簡儀)"를 만든 적이 있는데, 기실, "간의"는 서방기기의 형향을 받았다. 단지 이 점을 곽수경이 말한 적이 없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기 자체에서 알아차릴 수가 있다.


중국과 유럽의 천문기기가 가지는 하나의 차이는 바로 중국인은 적도(赤道)를 기준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유럽인은 황도(黃道)를 기준으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기에는 그저 좌표 선택의 차이일 뿐이지만, 이 두 개의 좌표는 이론적으로 등가이다. 황도에서 적도를 추산해 낼 수도 있고, 적도에서 황도를 추산해낼 수도 있다. 다만, 유럽인들은 습관적으로 하나의 기기로 하나의 데이타를 관측한다. 심지어 하나의 데이타 중에서 경도와 위도를 각각 하나의 기기를 가지고 관측해낸다.  예를 들어, 황도의 경도 혹은 황도의 위도만 관측한다.중국인들은 하나의 기기로 동시에 여러가지 데이타를 관측하기를 좋아한다. 이렇게 동시에 여러 좌표를 관측할 수 있는 천문기기의 구조는 더욱 복잡해진다. 구조가 복잡한 기기는 운행을 기록하는데 골치아플 뿐아니라, 제조하고 설치하여 사용하는 것도 골치아프다. 그래서 곽수경의 "간의"는 바로 환조를 나누어서 하나의 환조가 하나의 좌표를 관측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기실 아랍천문학에서 전래되어 온 규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곽수경에게는 또 하나의 유명한 천문기기 "고표(高表"가 있다. 하남성 등봉(登封)에 몇층 건물 높이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나의 기기를 몇층 건물높이의 건축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아랍의 스타일이다. 아랍의 여러 천문관측기기는 모두 이렇게 생겼다. 하나의 전면벽을 만들 거나, 심지어 하나의 건물을 만든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귀영당이다. 이런 아랍의 대형 기기 스타일은 현재 인도의 한 지방에서 아직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인도가 이슬람천문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곽수경의 "고표"는 비록 형상이 안전히 중국식이지만, 대형화의 아이디어는 아랍에서 온 것이다. 이전에 중국인은 이런 거대한 기기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북송의 "수운의상대(水運儀象臺)"는 실물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문헌기록의 크기로 보면 몇층 높이이다. 다만 그것은 많은 기기와 장치의 조합이고, 개별 기기는 그렇게 큰 것이 없었다. 그래서 대형화된 "고표" 및 표 앞에 있는 지상의 "양천척(量天尺)"은 모두 곽수경이 최소한 아랍인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