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의 힘을 빌어 황제 혹은 그 후계자를 제거하는 것은 예로부터 자주 쓰이던 수법이다. 자신의 손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명성에 전혀 누가 되지 않으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니, 황제 혹은 후계자들이 즐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유왕은 요녀 포사(褒姒)에 빠져 태자 의구(宜臼)와 생모 신후(申后)를 폐위시키고, 포사 소생의 백복(伯服)을 새로이 태자로 삼고, 포사를 왕후로 삼는다. 의구는 모친 신후와 함께 신국(申國)으로 도망친다. 딸과 외손자가 당한 일에 분노한 신후(申侯)는 증국(鄫國)과 연합하고, 주왕조와 오랫동안 싸워온 적국인 견융(犬戎)을 설득하여 연합군으로 주유왕의 호경(鎬京)을 공격한다. 견융은 경성의 부녀와 재물을 마음대로 가지라는 유혹에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재물과 부녀를 약탈한다. 이 때 주유왕과 백복은 도망치다가 여산(驪山)의 아래에서 죽고, 포사는 견융에 끌려가나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의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발목을 잡던 주유왕, 포사 그리고 백복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고 여러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니 그가 주평왕(周平王)이다. 다만 수도인 호경이 폐허로 바뀌어 낙양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동주(東周)시대에 주왕실은 힘이 약해서 제후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중국역사가들 중에는 주평왕 의구를 중국최초의 매국노라 부른다.
흉노의 두만선우(頭曼單于)가 태자 묵돌(冒頓, 모돈)에 대하여 한 조치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두만선우가 사랑하는 어씨(瘀氏)와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두만선우는 그 아들을 태자로 하여 선우의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다. 그리하여, 두만선우는 태자 묵돌을 월지(月氏)에 인질로 보낸다. 태자를 인질로 보낸다는 것은 상호우의와 신뢰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만선우는 묵돌을 인질로 보낸 며칠 후에 바로 월지를 공격한다. 그 의도는 월지로 하여금 두만선우의 배신에 분노하여 묵돌을 죽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묵돌은 요행히 도망쳐 나와 부친 두만선우를 죽이고, 선우에 오를 수 있었다.
서진(西晋)이 팔왕지란으로 혼란이 극에 달하여 나라가 나라같지 않게 되었을 때 흉노족인 전조(前趙)의 유총(劉聰)은 311년 대군을 보내어 낙양을 함락시키고 진회제(晋懷帝) 사마치(司馬熾)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때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의 두번째 황후인 양헌용(羊獻容)은 유총의 양자 유요(劉曜)에게 포로로 잡혀간다. 사마치는 유총에게 갖은 굴욕을 받다가 313년 독살당하고, 양헌용은 318년 유요가 황제에 오를 때 황후로 되어 5번 황후에서 폐위되고 6번 황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운다. 그런데, 이처럼 황제와 황후가 포로로 잡혀가는 국치를 겪고 왕조가 멸망하려는 순간에도, 각지에 수만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있는 사마씨 왕들은 아무도 황제나 황후를 구하여 국치를 씻으려 하지 않는다. 그 중 태자인 진왕 사마업(司馬鄴)은 장안에서 그 소식을 듣자 바로 황제에 올라 진민제(晋愍帝)가 되어, 대사면령을 내리며 연호를 고치고, 백관들에 작위를 내린다. 마치 태평성세의 천자인 것처럼…..그리고, 낭야왕 사마예는 강동에서 왕도(王導), 왕돈(王敦)등 왕씨집안의 도움을 받아 기반을 다지고, 진나라의 귀족들이 하나둘 남하하면서 진왕조의 정치중심은 점점 사마예쪽으로 넘어간다. 그러던중 316년 유총은 유요를 파견하여 장안을 공격하고, 진민제 사마업은 식량이 끊어지면서 12월 결국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그런데, 이때 사마예는 ‘북벌’의 기치를 든다. 그 목적은 천하의 인심을 얻어 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것과 유총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진민제 사마업을 살해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사마예의 그 이후 행적을 보면 ‘북벌’을 실제 진행하여 흉노, 선비, 저, 갈, 강을 중원에서 몰아낼 생각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결국 진민제 사마업은 318년 2월 유총에게 살해당한다.
북송의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가 여진족이 금(金)에 포로로 잡혀가고, 강왕 조구(趙構)는 남경응천부에서 즉위하여 송고종이 되니 역사에서 남송으로 불리는 왕조가 시작된다. 송고종은 비교적 수완이 고명했다. 즉위초기 북벌을 외치며 금의 영토할양과 칭신등 요구를 전혀 들어주지 않는다. 금나라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면, 송휘종, 송흠종을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황위는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송휘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지극한 효자의 모습을 보이며 사신을 보내어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악비가 주선진대첩을 거두고 북상하여 직도황룡부(直搗黃龍府)하여 송휘종, 송흠종을 맞이해 오겠다며 북상하자, 송고종은 황급히 십이도금패(十二道金牌)를 보내어 악비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을 붙여 죽여버린다. 송고종에게 살아있는 송흠종이 돌아오는 것은 절대로 막아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명나라 경태제 주기옥의 수완도 결코 송고종에 뒤지지는 않았다. 토목보의 변으로 형인 명영종 주기진이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우겸등의 종용하에 황제위에 오르며, 명영종에게는 태상황의 봉호를 올린다. 그리고 외적을 막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병사들을 모집하여 에센(也先)의 오이라트군을 막으며, 오이라트군이 명영종을 돌려주는 대가로 요구하는 조건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대로 각지의 근왕군에게 명영종을 포로로 잡고 있는 에센의 군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에센은 군사적으로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명나라와의 교역이 끊김에 따라 생활이 힘들어진 백성들의 원성도 높아지는 바람에 결국 ‘호시’를 여는 정도의 조건으로 명영종을 돌려보내게 된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경태제가 곤란하게 된다. 결국 그는 명영종을 남궁에 연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을 보면 경태제가 에센에 항거한 것은 결국 유총이 진회제, 진민제를 죽인 이야기를 재연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센은 오랑캐로 중국의 역사를 몰랐다. 만일 그가 명영종을 죽여주었더라면, 아마도 경태제는 그에게 ‘호시’를 열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큰 선물을 주었을 것이다. 에센이 명영종을 죽였라면 경태제로서는 형을 연금시켰다는 오명도 뒤집어쓰지 않았을 것이고, 남궁에 연금되어 있는 명영종이 복벽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저 송고종처럼 명영종의 시신을 맞이하며 한바탕 쇼를 벌인 후, 걱정없이 황제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에센과 경태제 두 사람 모두에게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