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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대지진: 범죄행위가 만연하다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전강(錢鋼) 

 

1976년 7월 29일부터 8월 3일의 1주일동안 당산대지진의 폐허위에서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벌어졌다.

 

7월 28일, 당산인들이 먼저 직면한 것은 사망이고, 상처이다. 그러나, 사망의 위험이 막 지나간 뒤, 피가 나는 상처를 묶고나서 그들이 직면한 것은 배고픔과 추위였다.

 

어떤 사람은 돌연 자신이 맨몸이라는 것을 의식한다. 어떤 사랑는 돌연 목이 칼칼한 것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위장이 경련하는 것을 느낀다. 무너진 상점은 대지진으로 졸지에 여기저기 통조림, 의복이 여기저기 흩어져버렸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주웠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를 의식하게 되었다. 페허아래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시급한 물품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주저하면서 그 폐허로 걸어간다; 케이크가 묻혀 있는 식품점, 옷이 쌓여 있는 백화점, 요와 이불이 쌓여있는 여관....그들은 처음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우리가 빌리자!" 일부 사람들은 온갖방법을 써서 상점등의 직원을 찾고 그들이 폐어에서 찾아낸 종이와 펜으로 글자를 쓰고 지장을 찍어서 차용증을 남긴다.

 

나중에는 큰 비가 돌연 내렸다. 빗물에 흠뻑 젖은 사람들은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빗속에서 떨고 있던 상점의 직원들도 소리쳤다: "우의와 장화를 꺼내서 씁시다" 우의와 장화를 찾는 사람들이 폐허로 몰려들었다. 피묻은 발에 새 장화를 신고, 길가의 임시수용소에는 비닐로 천정을 만들어 비를 피했다.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먹을 것을 가져옵시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하게 된다.

 

천천히, 사람들은 마음 속에서 어떤 욕망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폐허에서 식품과 의복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한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제2차, 제3차 행동에 들어간다. 그들의 손은 구호물자 이외의 상품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3,5명, 수십명, 백명...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갈수록 빠른 걸음으로 폐허더미를 뛰어다녔다. 모든 사람의 손에는 갈수록 커지는 짐이 들린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빨리 가자. 사람들이 다 가져간다...." "빨리 가자. 물건이 곧 다 없어질 것이다." "발리 가져가자....." 당산에는 일종의 광분의 분위기가 연출되기 시작한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약국의 폐허에서 누군가 인삼, 녹용, 천마를 캐내고, 수산물가게의 폐허에서는 누군가 해삼, 새우, 말린 패주등을 가져갔다. 어떤 사람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백화점으로 뛰어 들어가 손목시계, 라디오, 옷감등을 가져갔다...그들은 거기에서 새 자전거도 끌고 나왔고, 새 재봉틀도 들고 나왔다. 길거리에 급히 뛰어다니는 사람들 중에 한 중년남자는 한 무더기의 카페트를 지고 가고 있었고, 한 젊은이는 한 무더기의 융선(絨線)을 안고 갔다. 그리고 한 여인은 심지어 한 상자의 건전지를 들고 갔다. 요란스러운 가운데, 어떤 사람은 한 노부인이 한 남자시신 앞에서 곡을 하면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다가 남자시신의 손에서 손목시계를 풀어서 가져갔다. 얼마후, 그녀는 다시 또 다른 남자시신 앞에서 다시 눈물을 흘리고 다시 "내 아들아"를 외치다가 손목시계를 풀어서 가져갔다. 이렇게 장소를 바꾸어 곡을 하면서 손목시계를 가져갔다. 십여곳을 바꾸어 다니다가 사람들에게 제지당한다.

 

1976년 8월 3일, 당산의 강탈붐은 최고조에 달한다. 무리를 이룬 교외지역의 농민들이 마차를 몰고 트렉터를 운전해서 호미, 톱, 괭이, 망치등을 들고...금을 캐는 것처럼 미친 듯이 당산으로 들어간다. 어떤 사람은 길가에서 소리쳤다: "척하댐이 곧 무너진다! 척하댐의 물이 곧 내려온다!" 놀란 사람들이 흩어지고나면 그들은 폐허 속의 재산을 모조리 약탈했다. 그들은 캐비넷, 상자를 열어 먼저 현금을 찾고, 이어서 돈나가는 의복과 물건을 찾았다.

 

7월 28일, 당산의 길거리에는 경찰이 있었다. 그들은 웃도리를 벗고,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깨에 맨 총만이 그들의 신분을 말해주었다. 약탈붐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권총을 휘두르며 길거리를 막았다. 공안부는 지진후에 즉시 치안전문가를 당산으로 파견해서, 국면을 통제하고자 했다. 하북성과 당산시의 항진구재지휘부는 갈수록 심해지는 약탈을 제지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조직할 수 있는 최대의 역량은 겨우 민병이었다. 중국인민은행 당산지행의 폐허에서, 한 무리의 맨발 맨몸의 민병이 출현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은 총신이 깨진 소총을 들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거의 원을 이루어, 밤낮으로 이 현금과 예금장부가 묻혀있는 곳을 지켰다. 이 폐허로 접근하려 한 사람도 있었으나, 아무도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관련부서에서는 선포한다. 전체 당산의 모든 은행, 예금출장소의 장부는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200여만근의 식량이 보관된 서북정양고(西北井糧庫)의 공기도 극도록 긴장되었다. 민병은 실탄을 장전하고, 무너진 담장에서 밤을 새워 순찰을 돌았다. 양고 당지부는 이렇게 결정한다: 상부의 명령을 받기 전에는 한톨의 양식도 내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은행페허의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처엄, 양고를 둘러싼 기민(飢民)들도 감히 경계선을 넘어오지는 않았다. 양고지부서기 왕수삼(王守森)은 누군가 몰래 의논하는 소리를 듣는다: 국고는 뚫고 들어갈 수 없다. 이곳은 상잠과 같지 않다. 양고에 들어가는 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건 죽을 죄이다."

 

그러나 어쨌든 대담한 사람은 있는 법이고 따지러 오는 사람이 있다. 개란(開欒)의 광부 한 명은 이렇게 왕수삼에게 물었다: "지진에도 죽지 않았는데, 설마 우리가 굶어죽어야 겠는가? 우리 집에는 80노모가 있는데 먹을 것이 떨어졌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왕수삼은 설명을 했다: "양고의 야식은 구재지휘부가 명령을 내린 후, 계획에 따라 분배될 것이다. 양식이 이것뿐인데, 만일 혼란이 발생하면 분명 어떤 사람은 많이 쌓아둘 것이고, 어떤 사람은 굶어죽을 것이다. 너희 집에 어르신이 있지만, 우리는 전체 당산의 어르신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 광부는 화를 벌컥 냈다: "가자! 나를 따라 가자. 우리 지휘부로 가자." 항진구재지휘부의 낡은 시내버스 속에서 당산시인민무장부 부정위 한민용(韓敏用)은 무우자르듯이 말한다. "양고가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는 차 안의 비스킷 한 통을 가리키며, 그 노동자에게 말했다: "너는 저걸 가지고 가라!"

 

이때 각 상점의 폐허는 여전히 혼란상태였다. 사람들이 은행금고는 감히 건드리지 못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상점의 금고는 뜯었다. 사람들이 양고는 건드리지 못했지만, 식량가게의 식량은 털었다. 심지어 군대의 트럭까지도 빼앗아서 훔친 물건을 날랐다.

 

아무도 첫번째 총성이 어디서 났는지를 말하지 못한다. 다만, 갈수록 많은 총성 속에서, "이미 경고총성이 아니다", "물건을 약탈하는 사람은 총으로 쏘아죽인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소산에서 신시구시장에서, 사람들은 민병이 소아죽인 약탈자의 시체를 보았다. 이런 상태가 근 1주간 지속된다. 중국인민해방군 당산군분구의 한 자료를 보면, 지진시기에 당산의 민병이 회수한 약탈물자의 합계는: 양식 670,000여근, 의복 67,695건, 포필(布匹) 145,915척, 손목시계 1,149개, 말린패주, 5,180근, 현금 16,600위안....민병이 체포한 '범죄분자'는 모두 1800여명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 숫자를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산이 지진후에 이런 1주일간의 소동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진실로 존재했었다. 이것은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