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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진(解縉)의 죽음

by 중은우시 2010. 3. 30.

글: 신공무기(申公无忌)

 

1941년, 모택동은 연안에서 글을 하나 썼는데, 제목이 <<우리를 개조하는 학습>>이다. 글에는 모택동이 글을 하나 인용했는데,

 

장상노위(墻上蘆葦)

두중각경근저천(頭重脚輕根底淺)

산간죽순(山間竹筍)

취첨피후복중공(嘴尖皮厚腹中空)

 

담장위의 갈대는

머리는 무겁고, 다리는 가벼우며, 뿌리는 얕다

산중의 죽순은

입은 뾰족하고 가죽은 두꺼우며 배는 텅비었다.

 

모택동은 이 글을 통하여 '화려하나 실속이 없고, 취약하여 단단하지 못한 사람"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며 내가 천하제일이라는 사람"을 비판했다.

 

이 유명한 대련는 명나라때의 유명한 대학자이며 <<영락대전>>의 총편집자인 해진이 쓴 것이다. 이 대련은 해진의 비범한 문재를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 대련으로 인하여 결국 그는 비명에 죽는다. 역사의 이 부분을 읽을 때면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문인이 소인을 만나면 왕왕 정치적 비극이 탄생한다.

 

해진에 대하여 정사에도 기록이 많다. 야사에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진은 1369년에 태어나서, 1415년에 사망한다. 명사에 <<해진전>>이 있는데, 그의 자는 대신(大紳)이고, 길수(吉水) 사람이다." "해진은 어려서 영민하여, 홍무21년에 진사가 되고, 중서서길사의 직을 받았다. 황제가 총애하여 항상 황제를 곁에서 모셨다." 이 내용을 보면, 해진은 어려서부터 명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해진은 5살때, 부친이 가르쳐준 책을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7살때 글을 쓰고, 시를 시었는데 아주 노련했다고 한다; 10살때, 하루에 수천자를 읽었는데,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12살때, 사서오경을 다 읽고 그 뜻과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홍무20년(1387년) 강서향시에 참가하여 1위로 합격한다(解元); 다음 해, 회시(會試)에 제7로 합경한다. 정시(廷試)에 그는 형인 해륜(解綸), 자형인 황금화(黃金華)와 함께 진사에 오르고, 서길사(庶吉士)가 된다. 해진이 처음에 관직에 나갔을 때는 항상 주원장의 곁에 있었다. 주원장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대와는 의리로는 군신이지만,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이를 보면 해진이 관직에 일찍 나갔다는 점과 주원장으로부터 아주 중시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금이래로 문인이 관리로 나가면 절대로 도리를 지나치게 주장해서도 안되고, 재주에 지나치게 의지해서도 안된다. 더더구나 오만해서는 안된다. 당년명월선생(<<명왕조의 그 일들>>이라는 책의 저자)은 아마도 해진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나보다. 그의 베스트셀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런 착각에 빠져있을 것이다. 해진은 정치적 투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이 점에 대하여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해진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사학계에는 네 문구의 아주 공정한 평가가 있다: 학식연박(學識淵博). 재화횡일(才華橫溢), 위인경직(爲人耿直), 강정불아(剛正不阿). 이것은 확실한 것같다. 이로 인하여 그의 일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이치대로라면, 해진은 주원장을 모시는데 있어서, '의리로는 군신이나 은혜로는 부자같았다' 이런 관계는 가희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해진은 문학적 재능은 출중했지만, 관료로서의 처세는 노련하지 못했다. 주원장도 '아는 것은 모두 말했다" 이것을 보면 그는 아직 젊고 약간은 유치한 점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태조황제(주원장)에게 만언서를 올려, 하고싶은 말을 강개하여 다 했다. 이 글은 <<해진전>>에도 옮겨적어놓고 있다. 읽어보면, 글에서 불경한 내용이 많이 보인다. 오래지 않아, 해진은 다시 <<태평십책>>을 써서 주원장에게 치국의 방책을 올린다. 주원장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황제는 그가 재주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글, 이런 내용에 대하여 주원장이 좋아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얼마후, 주원장은 자잘한 일을 구실로 하여, 해진을 책망하고 그를 강서도감찰어사로 좌천시킨다. 그를 자신의 곁에서 쫓아낸 것이다. 아마도, 해진은 경계심이 발동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해진은 멍청한 일을 계속 저질렀다. 예를 들어, 그는 낭중 왕국용을 대신하여 상소를 올려서, 한국공 이선장이 억울하다고 말한다. 이런 글은 주원장이라면 한눈에 알아본다. 주원장은 공신을 많이 죽였고, 이선장까지 죽였다. 그는 정치적인 심계를 가슴속에 품고 있는데, 어찌 해진이 끼어들게 허용하겠는가? 주원장은 해진의 부친을 남경으로 불러서 이렇게 말한다: "대기만성이다. 너의 아들이 집으로 돌아갔다가...10년후에 다시 나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 한마디 말로써 22살의 해진은 집으로 짐싸들고 돌아가야했다. 한꺼번에 10년의 휴가를 보낸 것이다.

 

해진이 강서의 길수 고향집으로 돌아가서, 글을 쓰는데 전념했더라면, 아마도 그의 인생궤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진은 정치적인 포부를 지닌 문인이었다. 홍무31년(1398년), 주원장이 병사하자, 해진은 문상을 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남경에 돌아온다. 기회를 보아 다시 관직에 오르고자 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나라를 위하여 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인생이상이었다. 다만, 건문제는 해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건문제는 그를 멀리 하주(감숙성 난주부근)으로 쫓아보낸다. 만일 예부시랑 동륜이 해진을 위하여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서북지방에 계속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그의 재능은 황사의 가운데에서 썩어갔을 것이다. 건문4년, 해진은 남경으로 되돌아와서 한림대조를 맡는다. 인생에서 얻고 잃는 것은 변증법적이다. 좋고 나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정난의 초기에 해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왕 주체의 편에 선다. 영락원년(1403년), 주체가 등극하여 영락제가 되는데, 해진은 바로 중용된다. 주체가 해진을 알게 된 것은 만언서부터라고 한다. 그의 문재를 중시하였다. 주체는 해진을 한림시독에 앉히고, 황준, 양사기등을 문연각에서 주요정무에 참여하게 한다. 주체가 해진에게 시킨 첫번째 임무는 바로 <<태조실록>>을 쓰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체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특히 그의 신세내력(예를 들어 마황후의 소생인지 아닌지 등), 태조황제의 그에 대한 평가, 황제위를 빼앗은 행위, 이런 것들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나중에 해진은 다시 명을 받아 <<영락대전>>을 편찬한다. '우주의 광대함을 포괄하고, 고금의 이동을 모두 모았다" 이것은 세계문화사상 가장 먼저 편찬되고, 가장 규모가 크고, 내용이 가장 풍부한 백과사전이다. 이 시기는 해진의 인생에서 가장 휘황한 시기였다. 주체는 해진을 더할 나위없이 신임했다. 그는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천하는 하루도 내가 없으면 안되지만, 나는 하루도 해진이 없으면 안된다."

 

명사에는 이렇게 말한다: "해진은 어려서 조정에 나오고, 재주가 높았고, 일을 함에 곧바르고, 표리가 같았다" 이것은 그의 일관된 풍격이다. 그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관료로서의 처세는 그와 함께 관직에 있었던 양사기 등에 비하여 한참 모자랐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해진을 망친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태자지위를 놓고 싸우는데서 졌다고 말한다. 그는 그저 예교를 기준으로 직언한 것이다. 그래서 한왕 주고후에게 밉보였다. 당시 주체는 장남 주고치와 차남 주고후를 놓고 누구를 태자로 앉힐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주고후를 좋아했다. 장남 주고치는 용모가 좋지 않았고, 다리도 좋지 않았다. 주고후는 정반대였다. 영웅스러운 풍모와 튼튼하기도 하고 정치적인 수완도 있었다. 그러나, 해진은 사람을 정확하게 보았다. 그는 주고치는 인후하지만 주고후는 독랄하다고 보았다. 이 점은 주씨형제의 외삼촌인 서달의 아들 서수조의 평가이기도 하다. 서수조가 보기에, 주고후는 장래 부친에 대해서라도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은 그의 말이 옳았다. 해진은 주체에게 두 가지를 말한다. 결국 이것으로 태자 주고치의 지위가 확정된다. 그는 주체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황장자는 인효하고 천하의 마음이 그에게 있다." 또한 "좋은 성손(聖孫, 장손자) 가 있다" 자고이래로 적장자를 세우는 것은 정통이다. 해진의 행위는 모두 신하로서의 본분이다. 이것으로 추단하자면, 그가 태자에게 도박을 걸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것은 해진의 역사적 공적이다. 그는 주체가 정확한 선택을 하도록 도와준 것일 뿐이다. 이로 인하여 명나라는 "인선지치"라는 태평성대를 맞이한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주고치와 그의 아들은 모두 좋은 황제였다는 것이다.

 

사서의 평가에 따르면, 주고후는 원래 무뢰배였다. 그가 해치기로 마음 먹은 사람이 있으면 아무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태자가 정해지자" "주고후는 해진을 깊이 미워한다" 원한은 이로써 맺어진 것이다. 주고후의 해진에 대한 한은 더할 나위없이 강했다. 그래하여 그는 자신의 재주를 다하여 해진을 모함하고 박해한다. 두 가지 일이 주고후에 의하여 고발된다: 하나는 소위 "설금중어(泄禁中語)"이다. 해진은 내각의 사람이다 자연히 적지 않은 일을 알고 있다. 황제가 가장 기피하는 일은 기밀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지금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금기를 범하는 것일 것이다. 당조직에서 논의한 일을 개인적으로 누설한다면 그것은 기율을 위반한 일이다. 다만, 주고후가 말한 해진의 누설사건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같다. 둘째, 소위 정시독권불공(廷試讀卷不公)"이다. 해진은 두번이나 회시를 주재한 적이 있는데, 한번은 영락2년이고, 다른 한번은 영락4년이다. 그가 답안을 읽는데 공정하지 못했다는 것은 영락2년의 회시에서이다. 왜냐하면 그때 뽑은 장원, 방안, 탐화(1위, 2위,3위)가 모두 강서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모두 인재였다. 현명한 사람을 추천할 때는 가까운 사람이라고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가 영락4년에 불공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야사에는 다른 해석을 한다. 그때의 회시때는 하늘의 불로 공원을 태웠다. 즉, 벼락이 쳐서 화재가 나고 시험장소가 불에 타버린다. 시험생들의 답안지도 불에 탔다. 다만, 이것은 그가 불공정했다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나쁜 말을 많이 듣게 되면, 결국 믿게 되는 것이다. 해진은 광서포정사참의로 좌천된다. 사람도 없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는 글을 올린다. 주체는 그의 행선지를 아예 교지(월남)으로 바꾸어 버린다. 멀리 보낸 것이다.

 

여기서 끝이 났다면, 해진에게는 재기의 기회가 있었다. 어쨌든 태자 주고치는 해진을 아주 높이 평가했으니까. 태자 곁에서 일하던 양부도 바로 금의위의 감옥에 십년이나 갇혀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래노 나중에 주고치가 등극하자 마침내 햇볕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해진에게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영락8년(1410년), 해진은 명을 받아 북경으로 들어와서 업무보고를 한다. 그러나, 그가 북경에 도착하자, 주체는 이미 대군을 이끌고 막북으로 가버렸다. 황제가 없으니, 해진은 당연히 조정으로 들어가서 유수감국의 직위에 있던 태자 주고치를 만난다. 이런 일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정상적인 일이다. 황제가 없으면 감국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당연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태자와 해진의 교분은 문인들이 서로 사귀는 수준이다. 그런데, 주고후는 이를 빌미로 영락제에게 고발장을 쓴다. 해진이 사적으로 태자를 만났고, '신하의 예의를 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영락제가 돌아온 후 마침 한 가지 일이 생긴다. 그리하여 태자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 바람에 금의위를 시켜 해진을 월남에서 체포해와서 감옥에 가두게 한다.

 

해진은 감옥에서 5년을 보냈다. 다만, 그는 양부처럼 행운이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기강(紀綱)이라는 금의위두목을 상대해야 했다. 이 자는 해진에게 원한이 있었다. 이 글의 제일 앞부분에 쓴 그 대련은 바로 해진이 기강을 풍자한 말이다. 그리고 그는 기강이 첩을 들이는 것에 대하여도 조롱한 적이 있다: "일명대교이소교(一名大喬二小喬), 삼촌금련사촌요(三寸金蓮四寸腰), 매득오육칠포분(買得五六七包粉), 타분팔구십분요(打扮八九十分妖)" 기강은 산동성 임읍 숙안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무예가 아주 뛰어났다. 그는 글도 조금 읽었다. 그가 글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는 당시 영락제가 반란을 일으킬 때 자원해서 투신했다. 이때부터 기강은 주체의 막료로 친위군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락제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다. 주체가 등극한 후, 기강은 금의위의 도지휘첨사가 된다. 기강이라는 사람은 제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면서, 궤계가 많았고, 권력욕에 눈이 멀었으며, 사람들을 무수히 해쳤따. 그러므로, 정직한 해진은 여러번 기강을 탄핵한다. 이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이제 해진이 기강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자명하다. 당연히 이 기강도 나중에 끝이 좋지는 않았다. 그는 권력이 너무 강했고, 그러다보니 득의망형(得意忘形)했다. 나중에 능지처사를 당한다. 당연히 받을 죄를 받은 것이다.

 

명사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십삼년, 금의위 장수 기강이 황상에게 죄수의 명단을 올렸다. 황제가 해진의 성명을 보고 말했다: 해진이 아직도 살아있는가?"전해지는 바로는, 이해 정월십삼일, 기강은 주체에게 금의위 감옥에 같여 있는 인원의 명단을 올렸는데, 주체가 한번 훑어보고는 한 마디 한다. 해진이 아직 살아있다고. 기강은 바로 그의 뜻을 눈치챈다. 이 역사를 읽으면 일반적으로 해진을 죽인 것이 주체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생각해봤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금의위 감옥에는 많은 사람이 갇혀 있었다. 황제에게 보여주려고 서류를 만들어도 엄청난 두께였을 것이다. 왜 주체는 해진의 이름만 언급했을까? 여기에 한가지 상황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기강이 명단을 보낼 때, 고의로 해진의 이름을 앞에 놓고 황제의 눈앞에 들이밀었을 것이다.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강이 이런 기회에 개인적인 원한을 푼 것이라는 것이다. 가능성이 아주 많다. 둘째는 한왕 주고후가 기강을 시켜서 한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고후는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이 백열화된 때였다. 그래서 태자의 심복이라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의 상황에 대하여 명사에는 한 마디가 기록되어 있다: "기강은 마침내 해진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눈 속에 묻어버렸다" 당시의 상황은 충분히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기강은 사람을 시켜 해진에게 술을 먹게 한다. 그는 해진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았다. 얼마후 해진이 취해버린다. 취한 다음에 기강은 사람을 시켜 멍석으로 해진을 말아버린다. 그리고 성밖의 산언덕에 놓아둔다. 밤이고 눈이 휘날렸다. 해진은 이렇게 산채로 얼어죽은 것이다. 당시 나이가 47세였다.

 

명인종 주고치가 즉위한 후, 해진의 옛날 상소문을 들고 신하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해진이 미쳤다고 하지만, 그가 쓴 글을 보면, 모두 제대로된 의견이다. 미친 것이 아니었다." <<해진전>>에도 이렇게 결론짓는다: "나중에 주고후는 반란을 일으켜 주살당한다. 안남이 여러번 반란을 일으킨다. 관리를 설치한 후 얼마되지 않아 다시 포기한다. 모든 것이 해진이 말한 것처럼 되었다." 해진이 했던 말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해진이 죽은 후, 처음에는 강서성 길수현 인수향에 묻힌다. 가정연간에 당시의 지현인 나황상은 강둑이 무너지면 해진의 묘까지 영향을 받을까봐, 해진의 묘를 현성의 동문밖의 동산정으로 옮기게 한다. 지금 이 곳은 강서 길수현 기상국의 부지 한 귀퉁이이다. 그런데, 이 역사명인의 묘는 비록 성급중점보호문화재이기는 하지만, 연대가 오래되고 수리하지 않아서, 잡초가 무성하고, 묘비의 글자도 이미 알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