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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두(二里頭)가 중국최초의 문명인가?

by 중은우시 2009. 11. 18.

글: 장강단적(長江短笛)

 

중화문명5천년이라는 말은 외국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을 뿐아니라, 우리 자신도 계속 자신이 없어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상주(商周)이후의 4천년의 문명사에 대한 고고학적 증명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최초의 문명은 상(商)문명이다. 기원전1500년경부터 시작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3500년전의 일이다. 장소는 현재의 하남(河南)성 안양(安陽)일대이다. 중국의 문명근원탐색작업은 중화문명이 어디 때부터 시작했는지를 찾는 동시에, 어느 곳에서 기원했는지, 그리고 그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찾는 것이다.

 

금년 8월 21일에 출판된 미국 <<사이언스>>지는 표지에서 소개하면서, 중화문명의 기원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보도했다. 수출에서 내수로 전환한 이 제품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민족자부심, 문화우월감과 역사유구감이 다시 한번 얘기거리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문명사에 있어서 혼자서 좋아하고, 혼자서 즐기는 경향이 있다. 중국사학자들은 모두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짝사랑을 하며, 역사학에서의 '대약진'을 노렸다. 그러나 한 마디 말은 나로 하여금 5천년 중화문명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이 동요하게 만들었다. 중국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제(李濟)는 이렇게 말했다: "은허(殷墟)의 갑골문(甲骨文)은 아주 성숙되었다. 문자형성기에서 문자성숙기로 접어들려면 적어도 천년의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은허의 정교한 청동기제작기업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상나라를 중화문명의 기원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흰수염을 가진 노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다.

 

상나라의 이전에 분명히 더 조기의 문명이 있을 것이다. 8년간의 탐색을 거쳐 하남성 언사(偃師)의 이리두라는 중원의 요지 낙양평원에 있는 보통마을의 이름인데, 보리밭으로 덮여앴는 땅 아래에 최초의 '중국'이 숨겨져 있었다.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는 더욱 조기의 문명이다. 최초의 중국의 원형이다. 이곳에서 두 개의 비슷한 단어가 나와서, 우리의 눈을 어지럽힌다. 바로 문화와 문명이다. 문명은 분명히 문화이지만, 문화는 반드시 문명이 아니다. 문화(culture)는 석기시대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석기시대 특히 신석기시대(금석병용기시대를 포함)의 원시부락인류유적을 말한다. 그러나 문명(civilization)은 청동기시대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인류문명이 청동기시대에 들어간 이후의 국가단계이다.

 

문명형성의 표지는 고금중외에서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물질형태의 표지로는 도시, 문자, 청동기 및 예기(禮器)이다. 사회형태의 측면에서는 사회분업, 계급분화와 국가, 왕조가 포함된다. 이리두는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성숙한 문명을 보여준다. 그곳은 최소한 5개의 최초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지금까지 확인된 중국최초의 왕조도성유적지이고, 중국최초의 대형궁전군이며, 최초의 '자금성'이고, 최초의 청동예기군과 청동기작업방이 있고, 최초의 도시주간선도로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왕조문화가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각종 유가예제에 관하여 이리두에서 모두 그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두에서 출토된 삼족주작(三足酒爵)은 상나라때 출토된 주작의 모양과 대체로 일치한다. 귀족묘장에서 출토된 청동기, 악기, 옥예기는 독특한 예악문명을 구성하고 있다. 바로 화하초기문명의 특징이 나타난다.

 

문자는 인류가 문명시대에 진입하였다는 중요한 표지이다. 그러나, 이이두에서 문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부호는 그저 도기와 골기에서 나타날 뿐이다. 그들이 문자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지금까지 갑골문과 같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이리두의 왕조를 어디로 귀속시킬지는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이다. 과거에 문자로 실증되지 아니하였던 하나라가 바로 문자가 없기 때문에 결론이 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두는 실증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추론은 나왔다. 고고학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도, 이리두문화시기에 중국은 이미 문명시대에 돌입했다고 인정한다. 다만, 이리두에서 드러난것은 상당히 성숙한 문명(아쉽게도 문자는 증명되지 않았지만)이다. 분명히 상당히 긴 발전과정을 거쳐서 도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최초의 중국이전에는 또 어떤 상태였을까? 고고학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하나 또 하나의 중대한 발견, 한번 또 한번의 증명으로 이리두문화보다 더욱 오래되고 더욱 발달된 문명형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번 미국 <<사이언스>>지에서 공개된 자료를 보면 한가지 중요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고대의 중화문명은 "만천성두(滿天星斗)"이고, 유일하게 '황하요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00여년전의 요서 능원, 객좌, 건평의 세 도시접경지역에는 대형 제단, 여신묘와 적석총 군락이 있다. 이는 중화5천년문명의 서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몽고자치구 적봉시에는 8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오한기흥륭와유적지가 있다; 하남성 무양현 북무도진 서남에는 가호라는 수역이 있는데, 이곳에서 9천년된 2공골적(二孔骨笛)을 발굴했다; 더욱 영향이 큰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내지 5300년간의 양저문화이다. 아쉽게도, 이들 발견은 문화유적의 특징을 보유하고 있을 뿐, 문명유적으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어떤 역사학자는 강조한다.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국가, 문명, 사유제등등의 개념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그것은 역사연구 특히 사회진화방면의 연구에서 비교하는데에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는 일부 고유의 개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방(邦), 성(城), 국(國), 씨(氏), 성(姓)등등이 그것이다. 문명기원의 토론과 표현에서 아마도 이런 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유리할 것이다. 문명근원탐색작업은 아마도 중국학자들에게 중국특색을 지닌 문명에 관한 표현체계를 형성하게 해준다면, 이것은 세계문명기원연구에 커다란 공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일찌기 어떤 학자가 "이리두"가 중국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최초의 문명이라는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였다. 이리두 도시유적복원도는 원래 몇 개의 풀로 만든 집에 불과하다. 표준적인 원시촌락을 위대한 하왕조의 도성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고고현장에서 파낸 몇 개의 갱은 '궁전기초'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현장에서 기와 한장 발견되지 않았다. 고고현장에서 발견된 몇 개의 진흙을 쌓은 것은 원시부락이 주거를 만들 때 쓰는 원시기술로 속칭 "간타루(幹打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구리지꺼기, 대량의 석기, 골기! 이것은 신석시시대 씨족부락의 유적이다.

 

어떤 학자는 문제는 '하왕조'가 존재하였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대량의 증거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증거라면, 시간적으로 '하왕조'를 바로 이어서 나타난 상왕조의 갑골문과 청동기명문에서 전왕조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의 정부문건이나 기록에 그들의 전왕조에 관한 여하한 상황도 기록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왕조와 같은 최초문명에서 이런 상황이 나타났다는 것은 결국 그 앞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후자라면 민족자괴감이고 전자라면 민족자부심인가? 왜 긍정적인 관점의 자료가 외국의 잡지에 실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인민일보>>에 소개되는가? 관방의 외국숭배인가, 민간의 외국선호인가? 원래 우리 본국인들이 우리 본국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외국인들과 동일한 액세스권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왜 부정적인 관점의 글은 인터넷에서만 전파될 수 있는가? 역사연구에서 주관적인 색채를 띄거나 역사허무주의의 색채를 띄면 안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