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주가웅(朱家雄)
만력제(萬歷帝)의 다음으로, 황위를 승계한 명광종(明光宗) 주상락(朱常洛)은 일대명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궁중음모 "홍환안(紅丸案)"에 휘말려 죽는다. 그 후에 황위를 승계한 것은 바로 소위 "목수황제" 명희종(明熹宗)이다. 명희종 주유교(朱由校)를 "목수황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가 학식이 없고, 나라를 다스릴 줄 모르고, 그저 목수일을 좋아하고 목수기술이 뒤어났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 통치자들이 고의로 그에게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붙져준 것이다. 그 목적은 전왕조의 황제를 폄하함으로써 만주족황제의 '영명'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만청의 황제뿐아니라 역대 왕조의 다른 황제들도 만일 그의 부족한 점이나 약한 점을 빌미로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여준다면, 모두 불명예스럽게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명희종이 목수일을 좋아한 것은 그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의 문맹에 가까운 사람에게 있어서 매일 술이나 마시거나 계집질로 하루종일 보내지 않은 것만해도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당당한 일국의 군주로서 명희종은 왜 교육도 받지 못했을까? 그 원인을 추적해보면, 만력황제의 편애때문이다. 당초에, 만력제는 주상순(朱常洵)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것은 조상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입적입장(立嫡立長)"의 원칙에 어긋나서 신하들 대부분의 반대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쌍방은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황제와 대신들은 서로 상대방을 설복시키지 못했다. 나중에 만력제가 타협을 하고, 황장자 주상락을 태자로 세운다. 그러나, 만력제는 여러해동안 주상락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주상락의 아들인 주유교에 대하여도 만력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유교의 교육문제는 계속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16살이 될 때까지. 그는 당연히 받았어야할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따. 1620년, 만력제가 사망할 때, 주유교는 비로소 황태손에 봉해진다. 이때 그는 마침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주유교의 부친인 명광종 주상락이 황제가 된지 1달만에 사망해 버린다. 아직 태자에 정식 책봉되지도 못했던 주유교는 할 수 없이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비록 이때의 주유교도 박학다식한 내각대신들을 불러서 공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초급교육을 받을 가장 좋은 연령이 넘어버렸고, 각종 정무로 그는 골치가 아팠다. 게다가 그는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비록 하느님앞에 사람은 평등하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의 천성이나 자질은 각자 서로 다르고 차이도 크다. 주유교의 천부적 재능은 손쓰는 재주가 좋다는데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모조리 목수일에 집중된다. 명나라말기의 가구는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돈있는 사람은 모두 고급가구가 최고유행상품이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목수일을 잘 하는 민간의 기술자들(도공, 목수 포함)이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IT엘리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로서, 유행을 추구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이렇게 하여, 주유교는 목수일에 빠진 것이다.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고 황제가 되었으니, 주유교 자신에게 있어서이건, 아니면 대명왕조에 있어서이건 이는 당연히 비극이다. 그러나, 중국의 기나긴 봉건황제제도가 해체되기 전(혹은 황제가 실권을 가지지 못하는 입헌군주제가 확립될 때까지)에는 이는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명나라의 조화는 조정대신들의 지혜와 황제측근의 사람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운이 좋으면, 명나라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고, 운이 좋지 않으면, 명나라는 더 빨리 망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주유교가 믿었던 사람은 본명이 이진충인 위충현이었다. 위충현에 대하여는 역사적으로 이미 판단이 끝났다.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여기서 더 자세히 말하지는 않기로 한다. 강조할 점이라면, 위충현은 명나라의 패망에 주요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문맹으로 국가일에 전혀 흥미가 없었던 명희종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누가 그를 교육시키지 않았는가? 이렇게 말하자면 뿌리는 결국 만력제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후세사가들이 "명나라의 멸망은 실제로 만력때문이다"라고 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명희종때는 아마도 명나라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을지도 모르겠다.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명희종이 주요한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목수황제 주유교가 좋은 일은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유교는 자신의 황후인 장언(張嫣)과 애정이 깊었을 뿐아니라, 그녀를 아주 존중했다. 그녀의 말을 아주 잘 들어주었다. 위충현이 몇번이나 그녀를 모해하려고 했으나, 주유교는 입장을 확실히 해서 장언을 옹호했다. 또한 그는 동생 주유검(朱由檢)의 교육문제를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자신이 계통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데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되자마자 자신보다 5살어린 동생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제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준다. 아마도 주유교가 황후와 동생 주유검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적인 보호와 신임을 보였기 때문에, 대명왕조는 그의 손에서 일찌감치 절단나지 않은 것이다. 그 이후 17년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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