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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臥薪嘗膽): 역사적 사실인가?

by 중은우시 2009. 8. 1.

글: 문재봉(文裁縫)

 

구천(句踐)은 춘추시대 오월쟁패의 최종승리자이다. 이 장기간의 제후쟁패에서 월왕 구천은 백절불굴의 의지와 인욕부중의 인내로 최종승리를 얻어낸다. 그 과정에서 후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와신상담"의 고사이다. 그러나, 월왕구천이 정말 와신상담하였는지에 대하여는 학설이 엇갈린다. 어떤 사람은 와신상담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와신"은 있었지만, "상담"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실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설마 이 천고에 전해내려온 제왕이 분발하여 강국으로 성장한 이야기가 그저 사람들을 속여온 거짓말에 불과했단 말인가?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춘추시기에 오월간의 원한은 뿌리깊었다. 기원전 496년, 오왕 합려가 군대를 이끌고 월나라를 공격하나, 오히려 월나라에 패배한다. 합려는 패배하여 도망치던 중에 사망한다. 그의 아들인 부차가 즉위한 후, 시시때때로 자신을 일깨웠고, 국치를 잊지 않았다.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그는 오자서와 백비를 중용한다. 대규모로 병사를 훈련시키며 2,3년간의 세심한 준비를 거쳐, 부차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월나라를 공격한다. 월왕 구천도 군대를 이끌고 맞이하나, 대패한다. 구천은 남은 5천의 병마를 이끌고 회계로 도망간다. 그런데 오나라에 포위를 당해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월왕은 어쩔 수 없이 문종(文種)을 사신으로 보내어 오나라와 화의를 맺는다. 화의의 결과 구천부부는 오나라왕의 노비가 된다. 월왕 구천은 군주의 존귀한 신분으로 이런 지경에 처하였지만, 굴욕을 참고 오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기원전 492년, 구천은 국가를 문종과 일부 대신들에게 넘겨서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처와 범려를 데리고 오나라로 가서 노비생활을 한다. 부차는 그를 모욕주기 위하여, 그를 합려의 묘가 있는 곁에 작은 돌집을 지어 살게 했다. 구천은 매일 묘를 지키고, 말을 먹이며, 똥을 치우고, 청소를 했다. 이 모든 것을 아주 성심성의껏 처리했고, 전혀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고, 전혀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다. 부차가 말을 타고 문을 나설 때면, 그는 말을 끌고 나가서, 공손하게 고삐를 바쳤다. 심지어 성심성의껏 부차의 말을 끌고 시정을 지나갔다. 이렇게 되니 일부러 그를 난감하게 만들려던 부차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 한번은, 부차가 병이 들었는데, 그가 문병을 와서는 부차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변기통을 열고 부차가 막 싼 대변을 맛보기까지 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문질상분(問疾嘗糞)"이다. 구천이 3년동안 인욕부중하여 결국 부차의 신임을 얻었다. 부차는 구천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복종했다고 생각하여, 그를 귀국하도록 허용했다. 이렇게 보내주자, 구천은 동산재기의 기회를 붙잡았다.

 

귀국후의 구천은 더이상 남의 하인역할을 하던 구천이 아니었다. 그는 복수를 하고 한을 풀겠다고 맹세했다. 몇년동안의 인욕부중은 이 날을 위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하여, 그는 저녁이면 섶에서 잠을 자고, 천정에는 쓴 쓸개를 달아놓고, 서있거나 앉아있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이 쓸개의 쓴 맛을 보았다. 이를 통하여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수십년의 노력과 배양을 거쳐, 그는 결국 오나라에 승리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와신상담"의 내력이다. 다만, 사실이 과연 그러했을까? 구천은 "와신"과 "상담"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통하여 자신을 격려했을까?

 

<<좌전(左傳)>>과 <<국어(國語)>>는 현존하는 최초의 오월쟁패 및 구천의 사적에 대한 역사전적이다. 그리고 당시와 비교적 가깝고, 거기에 기록된 사실은 비교적 믿을만하다. 그래서 비교적 높은 참고가치가 있다. 다만, 이 두 권의 사적에는 모두 월왕구천의 와신상담의 행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보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서한(西漢)에 이르러, 사마천이 <<사기. 월왕구천세가>>에 이런 내용을 실었다: "오왕이 월왕을 용서하고, 월왕 구천이 나라로 돌아왔다. 그 자신의 몸을 힘들게 하고,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하여, 쓸개를 자리에 두고는 앉고 누울때마다 쓸개를 바라보았다. 음식을 먹을 때도 쓸개를 맛보았다." 사마천의 말은 아주 명확했다. 구천은 확실히 "상담"의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와신"은? 사마천의 글에는 "몸을 힘들게 하고(苦身)"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가리키는 것이 "와신"인가? 사마천은 여기에 대하여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동한(東漢)때, 원강, 오평이 지은 <<월절서>>, 조엽이 지은 <<오월춘추>>가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비록 춘추시대 오월 두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데, 그들은 진나라이전의 역사를 기초로, 소설가의 황당한 상상을 덧붙였다. <<월절서>>는 "와신", "상담"이 모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월춘추>>의 <<구천귀국외전>>에도 그저 월왕구천이 "쓸개를 집 밖에 걸어놓고 드나들 때마다 맛을 보았고, 입으로 항상 맛보았다"고 적었을 뿐, "와신"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가장 먼저 "와신", "상담"이라는 두 단어를 묶어서 쓴 사람은 소동파이다. 그는 <<의손권답조조서>>라는 장난섞인 서신에서, 손권이 일찌기 "와신상담"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와신상담"을 구천에게 쓰고, 널리 전파되게 된 것은 문학작품들 때문이다. 명나라말기에 전기극본 <<완사기>>에는 양진어가 월왕구천의 "와신" "상담"에 대하여 대거 묘사를 하게 된다. 청나라초기, 오승권은 <<강감역지록>>에 "구천이 월나라로 돌아간 후, 생각을 항상 하기 위하여, 와신상담했다" 나중에 명나라말기의 작가인 풍몽룡은 그가 간행한 역사소설 <<동주열국지>>에서 여러번 구천이 "와신상담"했다는 이야기를 언급했다. 바로 이들 문학작품의 묘사로 월왕구천이 "와신상담"했다는 이야기가 사방으로 퍼져갔던 것이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진실성에 대하여는 고증이 필요하다.

 

어떤 학자들은 동한때의 <<오월춘추>>에 나오는 <<구천귀국외전>>에 월왕구천이 "와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글에는 월왕구천이 당시에 "고신초사, 야이계일, 용료공지이목와(苦身焦思, 夜以繼日, 用蓼攻之以目臥)"라고 적고 있는데, "료"는 청나라때 마서진이 "요신(蓼薪)" 쓴 야채라고 하였다. 상무인서관에서 출판한 <<고한어상용자자전>>(1998년판)에서의 해석은 "식물명. 종류가 아주 많다. 맛이 맵다. 힘든 것을 비유하는데 쓴다" 이를 보면, 구천은 많은 "요신"을 준비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의 의지를 갈고닦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천귀국외전>>의 말뜻은 분명해진다. 그때 구천은 생각에 잠기고 고민을 많이 했으며, 밤낮으로 생각했다. 눈이 아주 피로해져서 잠이 오려고 하면 그는 '요신'으로 자신을 자극했다. 이를 통하여 참고 극곱하며 잠을 자지 않았다. "와신" "상담"은 각각 시각과 미각상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를 보면, 후인들이 "와신"을 딱딱한 섶의 위에서 자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오월춘추>>의 뜻을 곡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와신"은 눈에 고통을 가하는 것이지,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결론은 비록 후인들이 이 단어의 뜻을 오해하기는 하였지만, 구천은 확실히 "와신상담"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마천이 쓴 "고신"이라는 것과 약간의 관련이 있는 것같다. 여러가지 사료와 요인들을 종합하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같다: 그는 아마도 깊은 밤에 피로할 때면, "요신"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는데 썼다. 그리고 아마도 그 풀위에서 잠을 약간 잤을 것이다. 깨어나면 다시 일을 했다. 다만 이런 것은 그저 가설일 뿐이다.

 

이렇게 보자면, 구천의 "상담"은 확실히 존재했던 것이다. <<사기>>와 <<오월춘추>>등 사서에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구천의 "와신"에 대하여는 후세인들이 고인들의 기록을 오해한 것이다. 여기서 "와신"은 섶위에 누워서 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초를 이용하여 자신의 눈을 자극시킴으로써 잠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와신"도 존재하기는 했다. 사실상, 구천을 연구하는데 와신상담이 있었느냐 아니냐, 사서에 기록된 "와신"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와신"이냐 아니냐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구천의 견인불발(堅忍不拔), 백절불굴의 정신이다. 바로 이런 정신때문에 구천은 오나라를 이길 수 있었다. 월왕구천이 인욕부중, 와신상담한 이야기는 역대 중국인들에게는 영웅의 모범이었고, 후대의 문인의사들이 공로를 세우도록 격려했다. 그것이 바로 구천이 후세인들에게 남겨준 고귀한 정신적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