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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eris: 중국에 정착한 한국전쟁 미군포로

by 중은우시 2009. 7. 1.

글: 왕염(王琰)

 

한국전쟁때, 중국인민지원군은 참전한지 얼마되지 않아 수천수만의 "유엔군" 포로를 붙잡았다. 그리하여, 지원군은 조선북부의 벽동(碧洞)에 대규모의 포로수용소를 건설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끝났다. 미국대통령 트루먼이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는데, 전쟁포로들에게 "90일의 냉각기"를 부여하여, 자기나라로 귀국하던지, 전쟁소재국에 남던지, 어느 교전국으로 가든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21명의 중국군대에 붙잡힌 미군포로와 1명의 영국군포로는 본국귀환을 거절하고 중국에 남아서 거주할 것을 선택했다. 이 사건은 바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고,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이 22명의 전쟁포로가 공산당에 "세뇌"당한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이후 이 22명의 전쟁포로는 차례로 귀국했다. 어떤 사람은 제3국으로 이주했다. 다만, 제임스 죠지 베네리스(James George Veneris, 중국명 溫納瑞斯)라는 미국전쟁포로만은 중국에 남았고, 산동성 제남시에서 50년을 생활했다. 중국사람들은 그를 "노온(老溫)"이라고 불렀다. 2004년, 베네리스는 산동성 제남시에서 사망한다.

 

제임스 죠지 베네리스는 1922년 3월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의 반더그리프트라는 작은 마을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어려서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왔고, 부친은 석탄광산노동자와 청소부를 지냈다. 베네리스는 장남이었고, 아래로 세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1929년, 미국에 대공황이 발생하고, 온 가족은 부친 한 사람의 급여로 생활했다. 경제적으로 아주 힘들어지자, 장남인 베네리스는 어쩔 수 없이 중고등학교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집안 살림에 보태야 했다. 고교졸업후, 집안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베네리스는 여러 주를 돌아다녔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군대에 들어간다.

 

1940년 8월, 베네리스는 미국 육군의 보병이 되어, 처음에는 파나마, 컬럼비아등 라틴아메리가국가에 주둔했다. 진주만사건이 발발한 후에 그는 부대를 따라 뉴기니, 필리핀, 인도네시아등의 국가로 갔고, 전쟁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남태평양의 어느 작은 섬에서는 일본군의 18개월간의 포격에도 불구하고 포병인 베네리스는 용감하게 싸웠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베네리스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미국은 다시 경제위기에 빠진다. 생활이 아주 곤란하게 되자, 1950년 9월, 베네리스는 다시 군대에 들어간다. 2개월후 그는 한국으로 간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베네리스는 다른 미군들과 함께 38선 이북의 평양지구에 보내어진다. 1950년 11월 28일, 미군은 "성탄절총공세"를 벌인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유엔군과 남한 이승만군대를 미리 예정한 지구로 유인하여 포위한 후 제2차전투를 개시한다. 어느 깊은 밤, 베네리스는 사방에서 총성과 포성이 들으면서 잠에서 깼고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지원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는 벽동의 제5포로수용소로 보내어진다. 이때는 베네리스가 한국에 온지 겨우 1달쯤 되었을 때였다.

 

베네리스는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그의 전쟁포로생활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굴욕적이거나, 욕을 먹거나 체벌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오히려, 쾌락과 우애가 가득했다고 말한다. 지원군은 전쟁포로들에게 노동을 시키지도 않았고, 주머니수색을 하지도 않았다. 금시계등 귀중품은 관리자가 통일적으로 등기관리했고, 귀환시에 반환해주었다. 잘못을 저지른 포로에 대하여도 관리자들은 욕을 하거나 때리지 않았고, 교육적인 방법을 썼다. 가장 심한 경우에는 감금을 했는데, 1주일을 넘기지 않았다. 베네레스는 자신의 전쟁포로생활을 '굴욕'이 아니라 인생의 '해방'이었다고 말한다. 전쟁포로로 있던 2년반동안, 그는 점차 인생의 이상을 깨달아간다.

 

지원군 전쟁포로수용소는 극단적으로 힘든 환경속에서, 미군비행기의 공중폭격을 받아가면서 건립한 것이다. 물자공급이 부족하여, 전방의 전사들이 쌀볶은 것 한줌에 눈 한줌을 먹을 때에도, 지원군 전쟁포로수용소의 생활은 날로 개선되어 갔다. 생활이 정상궤도를 되찾자, 지원군 포로수용소당국은 포로의 식사기준을 정했다. 1일 양식 875그램. 밀가루, 쌀이 초기의 옥수수, 고량(高梁)을 대체했다. 식용유 50그램, 고기 50그램, 물고기 50그램, 달걀 50그램, 사탕25그램, 일반포로의 1일당 1일 식사비는 1545위안(인민폐 구화폐), 경미한 환자는 2313위안, 중환자는 3634위안이었다. 포로들의 이러한 식사기준은 지원군 군단이상간부의 중,소식사기준이었다. 지원군의 일반간부, 전사의 식사기준보다는 훨씬 높았다. 포로들의 생활습관을 돌봐주기 위하여, 중국에서 빵굽는 기계도 들여왔다. 이슬람을 믿는 포로를 위하여 식생활을 별도로 보살펴주기도 했다.

 

장기간의 전쟁터의 생활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전쟁포로들은 건강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은 위로 보고되었고, 주은래 총리에게까지 보고된다. 주은래 총리는 친히 지시를 내린다: 전쟁포로의 영양을 강화하고, 긴급구호조치를 취하라. 그리하여 수준높은 의사들이 중국각지에서 벽동으로 보내어진다. 여기에 전쟁포로총의원이 건설되었다.

 

전쟁포로수용소의 생활을 베네리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전쟁포로수용소에서 2년8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그 기간동안 중국인민지원군의 행동과 말에 감동을 받았다.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후, 미국이 공중 '교살전'을 실시해서 인민지원군의 교통운수선을 봉쇄했고, 중국조선군대의 반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는 전선부대와 전쟁포로에 대한 물자공급을 아주 곤란학 만들었다. 지원군병사는 매일 옥수수, 고량, 염장채소를 먹었다. 우리 미군포로들은 소고기, 빵, 치즈, 초코렛에 익숙했다. 모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우리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우리는 아주 잘 생활했다. 지원군은 차량을 동원해서 미국비행기의 포격을 뚫고, 국내에서 쌀, 밀가루, 육류를 공급해서 우리의 생활을 개선해 주었다. 지원군은 또한 우리의 문화체육활동도 지원해주었다. 우리를 위하여 클럽, 도서열람실을 만들어 주었고, 색소폰, 기타, 피아노등 악기를 사오고, 체스, 농구와 럭비등 체육용품도 사주었다. 매달 2번, 영화를 상영해서 중국과 북한의 영화를 보여주었다. 거의 매토요일마다, 우리는 2시간에 저녁공연을 했는데, 우리 자신들이 프로그램을 짰다. 풍부하고 다양한 생활은 우리들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달래주었다. 네덜란드 포로 한 명은 문맹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집에 편지를 쓸 때도 그는 쓰지를 못했다. 그래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네덜란드어를 할 줄아는 한 지원군 장교가 반년동안 그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그는 편지를 쓸 수 있을 뿐아니라, 다른 글까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오래되자, 우리는 지원군전사들과 깊은 감정적 교류가 있게 되었다. 한번은 북한주민이 지원군전사에게 사과 하나를 보내주었다. 이 전사는 우리가 사과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더니, 우리가 과일을 먹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 사과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한 지원군 병사는 만년필을 손에 넣었는데, 아까워서 쓰지를 못했다. 내가 만년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나에게 선물해주었다. 이 만년필은 아직도 내가 보관하고 있다. 나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적지 않은 지원군전사들은 자기들이 아껴둔 담배를 나에게 피우라고 주기도 했다. 나는 포로수용소에서 아주 즐겁게 생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군대는 문명적인 군대라고 믿었다. 인자한 군대라고 믿었다. 인심을 얻는 군대라고 믿었다."

 

지원군은 특히 서로 다른 국가, 서로 다른 민족의 종교습관을 존중해주었다. 전쟁포로들은 기독교의 성탄절, 추수감사절, 이슬람교의 희생절(Eid ul-Adha), 파재절(Id ad-Fitr)등을 지낼 수 있었다. 특히 성탄절과 설날에는 연속 며칠간 명절분위기였다. 어떤 포로들은 아주 장난꾸러기였다. 그들은 포로수용소 곁을 걸어가는 북한 마을 부녀들을 보면, "어머니, 어머니"라고 소리치곤 했다.

 

1952년 11월 15일에서 11월 26일까지, 벽동에서는 전쟁포로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다. 선수들은 북조선 각지의 포로수용소에서 온 500여명의 전쟁포로였다. 그들은 통일된 복장을 입고 각종 깃발을 들고 줄을 맞추어 운동장에 입장했다. 올림픽성화가 점화된 후, 각종 경기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경기종목도 아주 다양했다. 허들, 높이뛰기, 농구, 배구, 축구, 수영, 다이빙등 있을 것은 다 있었다. 포로수용소내의 올림픽은 아마도 세계전쟁포로사상 기적일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이 2년만에 타결된다. 제네바협정에 따라, 전쟁이 끝난 후, 교전당사국은 모든 전쟁포로를 송환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제네바협정의 체약국중 하나인 미국은 협정을 파괴한다. 소위 '자원송환' 정책을 채택하여 집행한다. 즉, 전쟁포로에게 90일의 '냉각기'를 주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귀국 하거나 전쟁소재국에 남거나, 어느 교전국을 선택할 수 있었다.

 

미국대통령 트루먼이 "자원송환" 원칙을 발표할 때는 아마도 미국에서도 21명의 '반란자'가 나타날 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귀국후에 정치적 박해를 받는 것이 두렵거나, 혹은 진리를 탐구하거나 세계평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당시 모두 21명의 미국포로와 1명의 영국포로가 귀국을 거부했고, 중국에 정착할 것을 결정한다. 그 안에 베네리스도 들어 있었다.

 

당시, 중국과 북한은 유엔군 포로 12773명을 송환했다(그중 남한군이 7860명, 유엔군이 4913명이엇다), 4300명의 미국전쟁포로중에서, 23명이 중국으로 갈 것을 결정하고, 그 외에 1명의 영국인, 수명의 벨기에인 및 350명의 남한군인이 공산국가로 갈 것을 선택했다. 중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전쟁포로들은 즉시 중국으로 보내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90일의 '냉각기'를 주어 최종결정을 하도록 했다. 이 기간동안 미국은 목사와 신부를 파견하여 다시 미군전쟁포로들을 설득했다. 목사와 신부는 온갖 말고 구슬리고, 심지어 그들 부모의 녹음까지 틀어주며 귀국을 종용했다. 그 동안 미국 전쟁포로 에드워드 디킨슨과 클라우드 베첼러는 생각을 바꾸어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에드워드와 클라우드를 기다린 것은 길양쪽에 꽃을 든 환영인파가 아니라, 군사법정이었다. 에드워드는 10년형을 받았는데, 그의 죄명은 적군과 내통한 것과 전쟁포로로서 부당한 행위를 한 것이었다; 클라우드도 적군과 내통한 것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으나, 나중에 20년형으로 감형된다. 비록 그들은 둘 다 3년간만 감옥에서 보내고 석방되었지만, 이들 두 미군전쟁포로의 운명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중국에 남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혀주게 된다. 그들은 중국적십자에 중국에 남겠다고 신청하여 중국의 동의를 받았다.

 

베네리스는 이 기간동안의 경력에 대하여 회고할 때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 "판문점에서, 미군당국은 나를 설득하기 위하여 각종 우대조건을 내걸고 나를 회유했다. 한 미군장교는 나에게 많은 책과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면 나에게 연봉70만달러의 직장을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예쁜 아가씨도 구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깊이 생각해보고는 이들 '사탕발림'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중국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중국인민과 함께 사회주의건설사업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오늘도 나는 그 때의 결정이 정확했다고 믿는다."

 

21명의 미군포로와 1명의 영국군포로가 귀국을 거절하고 중국에 남겠다고 한 것은 서방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서방국가의 여론은 이것이 바로 공산당이 그들을 세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이들 전쟁포로가 평화를 선택한 것이고, 사회주의제도를 선택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이들 22명의 전쟁포로의 선택은 중국군대의 포로정책의 성과이다. 신생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어서 이러한 성과가 정신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들 전쟁포로들을 반란자로 비난했다. 그리고 어떤 미국인들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중국군대가 그들에 대하여 '세뇌'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베네리스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북한에서 2년 10개월간 있는 동안, 2년 8개월의 기간은 지원군과 함께 생활했다. 나는 미국에서도 배부르게 먹고 살지 못했다. 그러나, 지원군의 포로수용소에서 나의 생활은 더욱 좋았다. 사람으로서 대우도 받았다. 거의 매끼마다 고기와 채소가 나왔다. 나와 동료들은 지원군과 서로 죽이는 적군이었는데, 친구로 바뀌었다. 먼저 우리는 마음 속으로부터 지원군에 탄복했다. 지원군은 우리를 확실히 친구로 대해준다고 느꼈다. 지원군은 실제행동으로 우리를 감화시킨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생각했다. 중국정부가 우리와 같은 적대국가의 포로들에게도 이렇게 잘 대해주는데, 본국 인민들에게는 얼마나 더 잘대해 줄 것인가? 이런 나라에서 생활하는 백성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하여 나는 송환을 원치 않았던 것이고, 이 나라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고 싶었다. 지원군의 포로수용소에 들어간 것은 나의 인생에서 전환점이었다. 나는 중국을 선택했고, 이것은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었따.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다. 나는 중국을 더욱 이해하고 싶었고, 진리를 추구했던 것이다."

 

1954년 2월, 베네리스는 다른 20명의 미국포로 및 1명의 영국포로와 함께 중국에 도착했다. 중국정부는 북경에서 대회를 열어 그들에게 "국제평화전사"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들은 이어서 산서성 태원에서 집중학습을 받았다. 학습내용은 중국역사, 사회상황, 경제건설, 생활습속, 그리고 관련 정책, 법규였고, 공산주의이론도 학습했다. 1년후, 그들은 다시 북경적십자회로 되돌아왔다. 중국적십자회는 이들을 대학으로 가거나, 농장으로 가거나, 공장으로 가거나, 쉬는 것의 4가지중 한 가지를 선택하게 했다. 베네리스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산동제남의 제지공장에서 노동자로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 비록 '미제국주의'에 대하여 원한이 깊었지만, 노동자동료들은 베네리스가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그가 한국전쟁에서 미제국주의의 침략군으로서 지원군과 싸웠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를 차별대우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제국주의의 배신자'인 그를 존중해주었다. 특히 그와 나이가 비슷한 젊은이들은 그와 가까이 지내기를 즐겼다. 성격이 명랑하고 유머러스한 '미국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일하는 틈틈이, 베네리스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얘기하고, 포커를 쳤다. 동료들은 그에게 중국이름인 "원나뤼스(溫納瑞斯)"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줄여서 그를 "노온"이라고 불렀다. 베네리스는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일하는 틈틈이 그는 매일 최소한 2,3개의 한자의 발음과 알파벳을 익혔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중국어는 날로 좋아졌다.

 

중국에 도착했을 때의 신기함이 사라지자, 언어가 통하지 않고, 가족, 연애, 혼인, 생활습관, 고향생각등 여러가지 이유로, 중국에 도착한 21명의 미국영국군 전쟁포로(당시에 이미 1명은 병사했다)중 어떤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5년부터 1966년의 11년간 18명이 중국을 떠나겠다고 신청했다. 중국정부의 원칙은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오가는데 자유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들중 어떤 사람은 미국, 영국으로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제3국으로 갔다. 그러나, 베네리스는 중국을 좋아해서, 계속하여 중국에 머물렀다.

 

1963년, 공장의 추천을 받아,중국적십자회는 그를 중국인민대학에 보낸다. 거기서 국제공산주의운동사, 마르크스레닌주의이론등의 과정을 공부하도록 해준다. 북경에서의 4년간 대학생활에서 베네리스는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중국인민대학의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후 그는 제남의 제지공장으로 돌아가서 일하겠다고 요구한다. 공장으로 돌아간 후 적지 않은 동료들은 "베네리스가 우리와 한 마음이다. 우리를 잊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와 더욱 가까워졌다.

 

베네리스는 중국에서 두번 결혼한다. 그의 첫번째 부인은 산동아가씨였다. 결혼10년만에 처가 폐병으로 죽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1966년, 동료들은 베네리스에게 백석영(白錫榮)이라는 이혼한 32살의 산동여자를 소개시켜준다. 두 사람은 모두 서로에게 만족했고, 1년후 제지공장의 동료들은 중국인의 풍습대로 그들을 위하여 요란한 결혼식을 치러준다. 노동자들이 그에게 보낸 결혼선물은 모택동상장(像章, 뺏지)이었다. 1970년 6월, 그들 사이에 딸 온소하(溫紹霞)가 태어난다. 1972년 그들은 다시 아들을 하나 얻는다. 이름은 온소뢰(溫紹磊)로 짓는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베네리스는 자연히 조반파의 '전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북경의 홍위병들은 그가 미국간첩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사람을 제남에 보내어 그를 붙잡아 북경으로 데려가서 비판투쟁을 열고자 했다. 그와 10여년간 같이 지낸 동료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숨겨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북경과 협의했다. 나중에 주은래 총리가 이 사실을 알고서 베네리스는 "국제평화전사"라고 말해주었다. 그 이후 누구도 그를 터럭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조반파는 비록 불만스러웠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문혁10년동안 베네리스는 기본적으로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고 지냈다.

 

1977년부터, 베네리스는 산동대학등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된다. 영어구어과정을 가르친다. 그는 중국적십자회가 제공한 100평방미터(30평)짜리 집에서 살면서, 교수급의 대우와 국비의료의 대우를 받았다. 국가는 4년마다 그에게 미국왕복비행기표를 제공했고, 부인인 백석영이 데려온 4명의 아이들은 모두 자립하여 집안을 이루었고, 베네리스를 친부모처럼 대했다. 자주 베네리스가 좋아하는 담배를 사서 그를 보러 오곤 했다. 그와 백석영 사이에 낳은 아들 딸도 이미 결혼했고, 외손녀는 이미 초등학교 2학년이다. 베네리스는 천륜의 낙을 즐기고 있다.

 

1950년 미국을 떠난 이후, 베네리스는 3번 미국으로 돌아가서 친척들을 방문했다. 첫번째는 1976년이다. 그는 원래 반년간 머물 생각이었지만, 미국에서 많은 조직과 단체들이 그를 초청하여 중국에서의 생활과 경력에 대하여 강연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11개월로 연장되었다. 이 11개월동안 그는 미국의 47개주의 대도시, 중소도시를 돌아다녔다. 청중들에게 중국의 모습을 전달해주었고, 평화사상과 중미양국인민의 우의를 전파했다. 그리고 자신이 중국에서 생활한 수십년동안의 경험과 느낌을 얘기했다. 당시 미국의 200여개 신문매체는 그에 대하여 보도했고, 전미국을 풍미한 베네리스열품을 불러왔다. 미국의 <<미중통신>>은 "그의 고향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대접해주었다" 그리고 미중인민우호협회에서는 그에게 1만명의 서명이 든 4미터짜리의 글을 주어 그의 중국과 미국간의 우호관계에 대한 공헌을 치하했다.

 

자신이 미국에 돌아온 다음 여러 사람의 관심을 받았던 이유에 대하여 베네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에 비록 닉슨 대통령이 이미 중국을 방문했었지만, 중국과 미국은 정식 외교관계를 건립하지 못했다. 미국인민은 중국의 상황을 낯설어했고, 그들은 중국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더 알고 싶었다. 많은 화교들도 조국을 그리워했고, 중국에서의 진실한 상활을 더 잘 알고 싶어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가 중국에서 겪은 일과 생활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베네리스는 미국의 곳곳에서 강연을 했고, 중국의 경험과 생활을 소개했다. 이는 미국우익단체의 반감과 FBI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모친 집에서 거주했는데, FBI는 이웃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하여 그를 감시하고자 했지만, 이웃집에서 거절했다. 그가 각지에서 강연을 하면, FBI의 요원들이 현장에 나타나곤 했다. 그래도 그는 두려움없이 계속 얘기했다. 어떤 청중은 "네가 말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 겪은 일들이고, 중국미국의 우호관계발전에 좋은 것들이다. 누가 감히 나서서 간섭하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미국매체는 그의 전설적인 경력과 이력을 소개하면서, 전혀 다른 입장을 드러냈다. 일부 매체는 그를 "민간대사" "평화의 사자"라고 얘기했다; 또 다른 매체는 그를 "공산당에 세뇌당한 변절자" "반도" "미치광이"로 표현했다. 그러나 매체의 입장이 어떠하든간에, 그들의 보도에서 한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베네리스는 미군전쟁포로로서 중국에 정착한 후 박해를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보살핌을 받았고,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는 것을.

 

1983년, 베네리스는 두번째로 로스앤젤레스에 모친을 만나러 갔다. 당시 그의 모친은 이미 96세의 고령이었다. 그래도 노인의 정신은 멀쩡했다. 그는 아들이 중국의 경력과 생활상황을 소개하는 것을 듣고는 "중국인들이 너에게 이렇게 잘해주엇으니, 너는 절대 중국인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2000년, 베네리스는 세번째로 미국에 친척방문을 했다. 그러나 미국에 반년도 머물지 않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어떤 사람이 베네리스에게 물었다: "미국경제가 저렇게 발전하고 현재 사회에서는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미국으로 가려고 하는데, 너는 왜 미국에서 말년을 보낼 생각을 하지 않느냐?" 베네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그저 돈만 아는 국가이다. 인정미가 없다. 적지 않은 노인들의 만년생활은 아주 비참하다. 나는 중국에 처자식이 있고, 외손녀가 있고, 나를 돌봐주는 많은 친구들이 있다. 중국정부는 매월 나에게 수천위안의 퇴직금도 주고 있고, 나의 의료비용을 모두 부담해준다. 모두 국가가 부담해준다. 매번 미국에서 친척방문을 할 때도 급여는 나온다. 그리고 출국여비와 왕복비행기표도 제공한다. 나는 현재 생활에 만족한다. 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미국에 돌아오면 나는 아무 것도 없다. 미국으로 가서 친척방문을 하는 것은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같은 나이에서는 다시는 오기 어려울 것이고 친척들도 하나 둘 없어지고 있다. 중국말에 "낙엽귀근"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의 뿌리는 중국이다. 나는 중국모친의 품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나의 유해도 황하에 뿌려질 것이다..."

 

베네리스가 귀국할 때, 어떤 사람이 물은 적이 있다. 매일 중국경찰이 너의 행동을 감시하지 않느냐고? 이에 대하여, 베네리스는 웃긴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중국에 살겠다고 한 것은 자원한 것이지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니다. 나는 중국정부와 중국인민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중국정부에 있어서 나는 국제평화전사이다. 국제적인 친구이다. 테러리스트가 아닌 것이다. 중국정부가 경찰을 보내어 나를 감시할 필요가 있겠는가?"

 

의외였던 점이라면 베네리스가 중국에서 근 50년을 생활했지만, 여전히 미국국적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베네리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그는 여러번 중국국적을 취득하겠다고 신청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국인"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적지 않은 정부기관은 모두 마비상태였고, 관련부서에서 답변을 주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중국국적을 취득하려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 장기간 중국에서 생활한 미국국민으로서 베네리스는 매년 제남시공안국의 외사관리부서로 가서 중국거류등기절차를 해야 한다.

 

베네리스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닉슨보다도 20년이나 먼저 중국에 왔다. 나는 닉슨보다 훨씬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현재 중국과 미국이 수교했는데, 나는 모든 중국과 미국의 친구들과 함께 기뻐한다. 위대한 중국과 미국의 양국인민은 대대로 우호적으로 지내야 한다. 함께 손잡고 아름다운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중국에서 근 반세기의 인생을 보내게 된 베네리스라는 미국인은 말하는 것이나 행동거지나 생활습관이 모두 이미 중국화 되었다. 그는 중국의 빼갈(老白干) 백주를 즐겨 마시고, 제남현지에서 생산된 "대계(大鷄)"표 담배를 즐겨 피운다. 더더구나 중국의 자스민차를 좋아한다. 서구인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인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가 매일 먹는 주식도 쌀밥과 만두이지, 빵과 치즈를 먹는 경우는 드물다.

 

놀라운 점은, 베네리스가 비교적 높은 수준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소양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1960년대에 중국인민대학에서 공부할 때, 학습한 주요과목은 국제공산주의운동사, 마르크스레닌이론등 과목이었다. 대학졸업후, 그는 다시 여러번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등의 서적을 읽었다. 그의 책상에는 오래된 모택동선집, 등소평문선, 주은래선집, 그리고 <<변증유물주의와 역사유물주의>>등의 서적이 놓여 있다. 그는 독서필기를 많이 썼다. 그는 중국의 각종 사회현상에 대하여도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고, 각종 사회주의이론학설에도 능통하다. 사회학과 마르크스주의철학의 교수로 손색이 없다.

 

2001년 8월, <<제로만보>>에서 기자로 있던 필자는 베네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에 대한 심도있는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리고는 장문의 <<중국을 선택한 미국노병>>이라는 기사를 썼고, 2001년 8월 24일에 제로만보에 게재했다. 필자는 그 글에서 베네리스의 바램을 하나 적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싶어했다. 이 보도는 당시 중공중앙 정치국위원이며 중공산동성서기인 오관정(吳官正)의 관심을 끌었다. 그 자리에서 신문에 지시사항을 적었고, 조직부서에서 베네리스의 입당문제를 검토하라는 것이었다. 산동성위 조직부의 고위간부는 필자와 함께 베네리스의 집으로 찾아갔고, 베네리스의 입당문제를 검토했다. 베네리스는 당시에도 여전히 미국국적이었으므로, 그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려면 먼저 중국국적을 취득해야 했다. 관련부서는 베네리스가 미국국적을 보유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더욱 유리하다고 보았고, 베네리스의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싶다는 바램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후, 신문사의 고위층은 다시 필자로 하여금 <<한 미국노병의 추구>>라는 내용의 기사를 쓰도록 했다. 이 내용은 2001년 8월 30일 제로만보에 실렸다.

 

여러번 접촉한 후 필자는 베네리스와 망년지교가 되었다. 그는 필자와 자스민차를 함께 마시고, 빼갈을 함께 들이켰고, 제남산 "대계"표 담배를 함께 피웠다. 그는 필자의 이름을 직접 불렀고, 필자도 그를 "노온"이라고 불렀다. 필자는 <<한 미군전쟁포로의 중국에서 50년간의 전설적인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검찰일보>>, <<중화신문보>>, <<당대생활보>>, <<금검>>, <<전기전기문학선간>>등 여러 간행물에 실었다.

 

이후, 일본, 미국등 국가의 여러 통신사와 방송국도 베네리스를 인터뷰했다. 산동인민출판사의 두 여자편집인은 나중에 필자를 찾아와서, 출판사의 사장이 베네리스의 경력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필자로 하여금 베네리스의 일생에 대한 책을 쓰게 하고 싶다고 했다. 이를 한국전쟁승리50주년기념사업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와 두 여성편집인이 베네리스를 찾아갔을 때, 베네리스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원래 얼마전에 CCTV의 한 편집인이 베네리스를 찾아와서, 베네리스에게 그의 경력을 책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한 적이 있고, 베네리스는 그 자리에서 응락했다는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승락했으니, 내가 다시 당신들에게 응락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말에 신용이 없게 되지 않느냐." 출판사의 두 편집인이 다시 극력 권했지만, 베네리스는 "나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승락했다. 그걸 다시 뒤집으면 내가 무슨 사람이 되겠는가. CCTV에서 나에 관하여 출판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출판하도록 승락하겠다." 그후 베네리스는 죽었고, 책을 내는 일도 흐지부지되었다.

 

2004년, 신체상황이 좋았던 베네리스는 다리에 상처를 입어 병원에 입원한다. 입원기간동안 그는 급작스럽게 발병하여 구호조치를 취했지만 사망하고 만다. 가족들은 그의 평소 뜻에 따라 제남의 공동묘지에 매장했고, 중국적십자회등이 그에게 화환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