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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 중국시장진출기

by 중은우시 2009. 1. 14.

글: 마입성(馬立誠)

 

코카콜라 한 병을 사서 마시는 것은 지금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당초 코카콜라가 중국에 진입하기 위하여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코카콜라를 도입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두 사람을 알고 있다: 퉁즈광(志廣)과 쑨샤오진(孫紹金)이다. 두 사람의 직위는 천지차이지만, 그래도 모두 코카콜라를 도입하는데 핵심역할을 했다.

 

퉁즈광은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 중국수출입은행 동사장을 역임하고 중국의 WTO가입협상의 제2대 수석대표를 지낸 바있다. 은퇴후, 퉁즈광은 여러 기관의 교수와 고문을 맡고 있다. 쑨샤오진은 당시 코카콜라를 도입하는 구체적인 업체인 중국양유진출구총공사(中國糧油進出口總公司, "중량")의 당주잡품처 부처장이었다. 쑨샤오진은 은퇴후 집에서 쉬고 있다.

 

그들 두 사람은 코카콜라를 도입하는 건에 대하여 얘기하면, 지금도 한숨부터 내쉰다. 이야기는 1976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중국과 미국 양국은 아직 대사급외교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다. 두 나라는 상대방국가에 연락처만 두었다. 젊은 퉁즈광은 중국의 주미연락처의 상무비서를 맡았었다.

 

하루는, 당시 코카콜라의 CEO인 마틴이 워싱턴으로 연락처를 찾아왔다. 그리고 퉁즈광에게 중국에 코카콜라를 수출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퉁즈광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이후, 연락처의 냉장고에는 코카콜라가 들어있게 되었다. "무료로 보내준 것이다. 미국인은 똑똑하다. 그때 벌써 중국시장을 노렸다" 퉁즈광은 또 한마디를 던졌다: "시음용으로"

 

금방 코카콜라는 중국주미연락처의 상무처직원들을 애틀랜타에 있는 본사로 초청하여 참관하게 했다. 퉁즈광은 "회사의 관리는 아주 잘되고 있었따. 제품품질통제도 우리가 전혀 미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곳에는 아주 총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물에다 약간 단 맛을 보태어서 전세계에 팔아먹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코카콜라를 습관적으로 마시게 만들었다."

 

1976년, 중국정치국면은 변화가 컸다. 퉁즈광은 미국측에, 현재 중국에 들어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중국이 건립된 이후, 출생한 중국대륙의 백성들은 영화속에서만 코카콜라를 보았다. 그리고 영화속에서의 코카콜라는 미국군인과 연결되어 있다. 한국전쟁이후, 코카콜라의 이미지는 이미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당시 중국은 아직 코카콜라라는 서방생활방식을 대표하는 제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977년, 퉁즈광은 국내로 되돌아와서 중량에서 일을 한다. 이 해에, 마틴은 북경을 방문했고, 다시 그를 찾았다. 마틴은 퉁즈광을 자신이 머무는 북경호텔로 데려가서, 다시 코카콜라를 중국에 팔고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퉁즈광은 그에게 "당신은 현재 시기가 성숙했다고 보는가? 중국인이 코카콜라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같은가?"라고 물었다.

 

마틴은 그들은 중국에 공장을 만드는데, 주로 중국소비자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 여행오는 외국인, 특히 유럽인과 미국인에게 팔겠다고 하였다. 저번에 얘기한 미국군인에 대하여, 마틴은, 코카콜라는 미국군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들은 그저 물에 단맛을 가미해서 돈을 버는 회사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럽대부분의 국가에도 코카콜라공장은 있고, 아프리카, 아시아에도 많은 공장이 있다. 그들은 상인이고, 어디든지 수요가 있으면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간다고 했다. 퉁즈광도 고개를 끄덕였다.

 

1978년이 되어, 중국정치국면이 점차 호전된다. 당시 중량의 총경리인 장젠화(張建華)와 퉁즈광등이 많은 노력을 해서, 코카콜라와 중량이 실질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다. 협상에서 통역을 맡았던 동스신(董士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우리는 중앙의 공식문건이 없었다. 그저 이선념 부총리가 손으로쓴 크지 않은 한 장의 메모가 있을 뿐이었다. 그 뜻은 대체로 이 업무를 진행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 메모는 중앙이 코카콜라를 도입하는데 상방보검의 역할을 했다."

 

중량의 협상대표는 바로 당주잡품처의 부처장인 쑨샤오진이었다. 코카콜라의 대표는 회사아시아지역책임자인 리리셩(李歷生)이었다. 협상장소는 북경의 서원(西苑)호텔이었다. "전후로 모두 3차례에 걸쳐 협상했다" 나이가 거의 80이 다된 쑨샤오진은 30년전에 코카콜라와 접촉한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고 한다. "당시 장젠화는 마침 서원호텔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협상을 하면서 한편으로 그에게 계속 보고했다." 쑨샤오진은 이미 서거한 옛 상사를 언급할 때는 매우 감정적이 되었다. "장젠화는 사상이 아주 개방된 사람이었다. 당시, 그와 퉁즈광은 주미연락처에서 일했는데, 함께 애틀랜타 코카콜라회사를 참관하기도 했다. 퉁즈광은 당시에 상무비서였고, 장젠화는 상무참찬이었다. 코카콜라가 중국으로 들어오는데, 장젠화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코카콜라를 중국에 도입해야한다고 역설하던 장젠화를 지원해준 것은 당시 대외무역부 부장인 리창(李强)이었다. 1978년 12월 13일, 코카콜라회사와 중국양유진출구총공사는 북경호텔에서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에 따르면, 미국은 보상무역방식 혹은 기타 지급방법으로, 중국의 주요도시와 관광지역에 코카콜라 캔제조 및 병입설비를 제공하고, 중국은 공장을 만들어 전문적으로 병입(bottling)과 판매를 한다는 것이었다. 코카콜라의 보틀링공장을 만들기 전까지는 1979년부터, 위탁판매방식으로 중량총공사가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코카콜라가 대륙에서 철수한지 30년만에 다시 중국시장에 들어온 것이다. 이는 홍콩, 마카오를 제외한 첫번째로 중국에 들어온 외국기업이었다.

 

교묘한 것은 이와 동시에, 북경호텔의 같은 건물 다른 회의실에서는 중국과 미국 양국이 재수교협상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4일후, 12월 17일, 중국과 미국 쌍방은 <<중미수교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1979년 1월 1일부터, 대사급외교관계를 수립한다"고 선언했다.

 

5일후, 12월 18일, 개혁개방을 알리는 중공11기3중전회가 북경에서 개최된다.

 

당시, 미국매체는 코카콜라가 사전에 중미고위층 외교동향을 알았다고 의심했다. 뉴욕타임즈와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에 대하여 취재를 해봤지만, "카터 대통령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미국매체는 코카콜라가 중국에 되돌아온 사건에 비상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중량총공사의 주선하에, 홍콩 오풍행이 도와주어서, 첫번째 3000상자의 병입코카콜라가 1979년 홍콩에서 북경으로 발송된다. 쑨샤오진은 병입코카콜라는 최고급이라고 얘기한다. 플라스틱병이나 캔에 든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시려면 역시 병에 든 것을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병입코카콜라는 생산과 운수과정에서 원가가 너무 비싸다. 그리하여 보급이 어려워지므로, 대량생산시에는 역시 플라스틱병이나 캔을 쓴다.

 

다음 이슈는, 어느 곳에 코카콜라공장을 건설하느냐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은 상해를 제안했다. 일찌기 1927년, 코카콜라는 상해에 공장을 설립했었다. "정광화기수창(正廣和汽水廠)"이었다. 그 공장은 1940년대에는 코카콜라의 최대 해외공장이었다. 생산라인은 미국본토와 동일한 기술요건을 요구했다. 1948년, 코카콜라가 중국에서 철수하면서, 주은래는 코카콜라생산라인을 철거하여 북경으로 옮기게 하였다. 개혁개방전에 북경의 유명한 "북빙양(北氷洋)"의 첫번째 생산라인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연원으로, 코카콜라는 상해에 공장을 만들고 싶어했다.

 

다만, 중량과 상해의 관련부서가 연락을 하는데, 상해에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상해의 일부 단위와 개인은 신문잡지에 공개적으로 글을 써서, 중량이 코카콜라를 도입하는 것은 '매국주의', '양노철학(洋奴哲學)', '미국생활방식도입', '민족공업타격'이라고 공격했다. 쑨샤오진의 기억에 의하면 상해시 재정국의 한 간부는 중앙지도자에게 서신을 써서 이 일을 중앙에 고발하기도 했다.

 

코카콜라는 할 수없이 북경에 공장을 건설한다. 마침 북경시위서기인 린후쟈(林乎加)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지원하에, 보틀링공장은 북경 오리점 중량공사 산하의 북경분공사의 한 오리구이공장안에 만들어진다. 공장은 겨우 1칸으로, 오리구이공장을 드러내고 만든 것이다. 1981년 4월에 정식 생산개시를 한다.

 

쌍방이 당시에 한 합작방식은: 코카콜라가 보틀링라인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1분에 300병을 병입하며, 중국측은 매년 30만달러를 들여, 코카콜라 농축액을 구입한다. 코카콜라는 처음에 60만달러를 투자하고 최종적으로 공장건설에 근 100만달러를 투자한다.

 

공장이 완공된 후, 이견이 발생했다. 한 원로가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사이다로는 인민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단 말인가? 외국인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한단 말인가? 반드시 코카콜라를 마셔야 하는가? 그건 바로 매국주의이다." 그리고 중량에 이에 대하여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중량은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주로 5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코카콜라는 음료이다. 유명하기 때문에 판매가 잘된다. 미국인은 세계각지에 가더라도 모두 이 것을 마신다. 개혁개방이후, 외국인이 많이 오는데, 필수적인 음료이다. 우리는 이 수요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둘째, 코카콜라의 배합방법은 중국의 계유(桂油)를 사용하는데, 중국적인 성분이 들어간다.

셋째, 우리는 아직 음료를 병입,캔입하는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 설비를 도입하면 기술진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우리는 매년 30만달러를 들여 농축액을 구입하는데, 우리의 이윤은 30만달러의 2-3배이다.

다섯째, 우리는 북경에만 공장을 두었다. 다른 지방에는 공장을 짓지 않았다. 북경에 공장을 지은 곳은 통제에 용이하기 위함이다. 국가에서 정책으로 규정하면 코카콜라의 생산량은 우리나라음료 총생산량의 5%를 넘지 않을 것이고, 공장을 증설하기 전에는 심사허가를 받을 것이다 등등.

 

코카콜라의 배합성분에 계유가 들어간다는 것을 공개하는 것과 관련하여 쑨샤오진은 "어찌 계유뿐인가? 감초, 계피등 여러 한약성분이 들어간다. 지난세기말, 코카콜라는 매년 중국토축산총공사로부터 한약성분만 3.5억 내지 4억위안어치를 수입했다."

 

상황이 풀어진 후에, 코카콜라는 더 많은 공장을 짓고자 계획했다. 두번째 공장부지로는 심천이 선정되었다. 이번에 쌍방이 달성한 합의는 코카콜라는 매면 분당 500병의 병입설비라인을 제공하고, 가격의 50%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50%의 가격은 코카콜라회사로부터 농축액을 수입할 때 보상한다는 것이었다. 광동성의 지도자가 나서서 간섭하는 바람에 공장부지가 광저우로 옮겨진다.

 

1982년초, 코카콜라 부사장, 국제사업부책임임원인 해리가 광저우로 가서 관련계약을 체결한다. 그런데, 광저우에서 "반코카콜라붐"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는 마침 전국양회기간이었다. 광동성의 지도자들이 모두 북경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중하라고 요구하고, 계약체결을 미루도록 지시했다. 다만 해리와 그의 전용기는 이미 허가를 받아 북경에 도착했다. 바로 광저우로 가려는 중이었다. 어떡할 것인가? 당시 대외경제무역부 부장을 맡고 있던 왕핀칭(王品淸)이 국무원지도자에게 지시를 요청한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 구무(谷牧)은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왕핀칭은 친히 공항으로 가서 해리와 그 대표단을 맞이한다. 1983년에 광저우공장은 생산을 개시한다.

 

"현재 코카콜라는 이미 중국에 30개의 보틀링회사와 36개의 공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80년대에는 공장 하나를 지을 때마다 층층이 심사허가를 받아야 했다.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고, 힘들었다." 당시 코카콜라회사의 중국공관업무를 담당하다가, 나중에 회사부사장에 오른 루빙송(盧炳松)의 말이다.

 

1986년, 코카콜라는 상해에 농축액공장을 짓고자 한다. 배합성분의 비밀유지를 위하여, 미국측은 이 공장은 코카콜라의 100%투자로 하겠다고 요구한다. 다만, 당시에, 중국은 아직 외국인독자투자는 허용하지 않았다. 나중에 중국측의 대표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먼저 코카콜라가 두 개의 공장을 지어라. 하나는 농축액공장이고 다른 하나는 음료공장이다. 다시 미국측은 음료공장을 공짜로 중국측에 넘겨라. 그 후, 이 두개의 공장으로 하나의 공동이사회를 만들고, 중국과 미국이 각각 50%씩을 지배하면, 1개의 합작기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첫번째 중미합작기업이었다.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농축액은 중국현지에서 생산을 시작한다. 루빙송은 현재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왜 상해에서 생산하는 농축액도 수입으로 계산하는지? "우리는 농축액을 농축액공장에서 곁에 있는 음료공장으로 운송하는데, 매반년마다 쿼터를 신청해야 하며, 48개의 도장을 받아야 했다." 루빙송은 나중에 대륙의 개방정도가 커지면서, 찍어야 하는 도장의 갯수가 점점 줄었고, 2001년에 중국이 WTO에 가입한 후에는 더 이상 도장을 찍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북경의 공장이 1981년 4월에 생산개시된 후, 제품은 호텔에 공급하고, 외화를 받았다. 1982년초, 대외경제무역부의 동의를 받아, 호텔에 공급한 잔여분은 북경당업연주공사를 통하여 국내시장에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코카콜라는 1병에 4위안에 팔렸다. 호텔에서는 병당 20위안이었다. 비싼 편이었다. 시장을 신속히 개척하기 위하여, 코카콜라본사는 프로모션을 기획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중국은 프로모션에 익숙하지 않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자신감에 넘친 미국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1982년 겨울의 한 주말, 코카콜라회사는 북경의각 상점에서 코카콜라를 프로모션했다. 콜라 1병을 사면, 풍선 1개와 포장된 젓가락 한 쌍을 주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이런 단맛이 나는 음료에 익숙해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물자가 귀한 때에, 물건을 사면 공짜로 선물을 준다는 것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혹해서 샀다. 이것이 중국현대에 처음으로 한 프로모션 행사였다.

 

북경의 각 신문에서는 격렬한 반응이 나왔다. <<북경일보>>의 '내부참고'에는 "입에 맞는 것이 반드시 즐겁지 않다(可口未必可樂, 코카콜라의 중국어가 可口可樂임을 이용한 것임)"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국가에 외화가 부족한데, 코카콜라를 도입하는 것은 국가의 대량외화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국 상무위원인 천윈(陳雲)은 이 내부참고를 보고 지시를 내렸다: 외국인에게만 팔도록 하다. 중국인에게는 한 병도 못팔게 하라. 다른 중국의 지도자들도 다 동의했다. 대외경제무역부는 이 지시에 근거하여, 북경에서 내수판매를 금지시켰다. 하루만에, 모든 코카콜라는 상점의 매대에서 철수된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간단한 한차례의 프로모션활동이 이처럼 큰 파란을 불러일으키는지. 루징송은 이렇게 기억한다: "나는 본사에 가서 보고했다. 미국인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콜라를 파는데 정치국까지 가야 하는가?'" 그때, 콜라는 펑타이 오리점의 생산공장에서 도시내로 운송하는데, 운송차량에 코카콜라광고를 붙였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북경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1983년에 또 한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한 지방의 위생부서에서, "코카콜라에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위생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들의 근거는 동북의 한 연구소에서 모르모트에게 코카콜라를 먹엿떠니, 모르모트가 아주 흥분했다는 것이다. 루빙송은 말한다. 당시 코카콜라는 바로 중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기업의 일기예보였다. "중국에 무슨 조짐만 보이면, 내 전화는 불이 났다. 다른 기업에서 모두 코카콜라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너희 공장에 또 처분받은 것이 없는댜. 언제 우리에게도 통지될 것이냐. 우리가 무엇무엇을 해야 하는데, 위에 보고해야할지 말아야할지등등"

 

이에 대하여 코카콜라 중국유한공사의 동사장 천치웨이(陳奇偉)도 깊이 느낀 바가 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제한이 겹겹이 있던 80년대에, 코카콜라의 간판만 걸면,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정치적인 의미를 품게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중관계가 조금만 긴장되면, 새로운 프로젝트는 바로 장애를 겪는다.

 

루빙송에 따르면, 당시 코카콜라회사의 내부는 두 파로 나뉘었다고 한다: 매파는 소송을 하자는 것으로, 국제적으로 중재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 파는 회사내부에서 한 때 우세를 점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둘기파는 부드러운 방법을 쓰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중재에서 이기더라도, 중국시장에 발붙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미국의 많은 고관들이 코카콜라의 고문이었다. 이사회는 최종적으로 부드러운 방법을 쓰기로 결정한다. 중국지도자들에게 코카콜라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코카콜라회사는 전세계 200여개국가와 지역에서 카페인에 관한 자료를 모아서, 이들 자료로 중국정부를 설득했따. 차에도 카페인이 포함되어 있는데, 농도가 콜라의 6배라는 것, 중국에서 차는 마시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면서, 왜 콜라만 문제삼느냐는 것. 이외에 코카몰라는 중국관리를 초청하여 세계각국을 방문하게 하고, 현지관리들과 얘기하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코카콜라는 상당히 긴 시간동안 공장을 놀려두어야 했다. 회사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코카콜라회사는 합작자인 중량을 찾는다. 중량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것이 중량의 이익에도 부합하니까. 중량에서 이 일을 직접 책임진 곳은 역시 당주잡품처였다. 먼저 처장인 천광(陳光)은 <<신관찰>>에 글을 써서 반박했다. 다만 잡지는 글을 실어주지 않았다. 그는 다시 보고서를 써서 부서에 올렸지만, 부서에서도 도와주고싶어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부처장인 류창시(劉昌璽)가 '인민의 편지' 형식으로 직접 중앙지도자에게 보고하자고 했다. 그는 이런 아이디어를 당주잡품처를 관장하는 중량의 부총경리 주진창(朱晋昌)에게 보고한다: 주진창은 "네가 그걸 쓸 용기가 있다면, 나도 거기에 서명하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신을 다 쓴 후 두 사람이 서명을 하게 된다.

 

서신에서는, 북경에서 생산된 코카콜라는 96%가 국산원재료이고, 코카콜라회사가 공급하는 농축액은 원가의 4%밖에 점하지 않는다고 했다. 북경에 내수판매하는 코카콜라는 국가의 외화를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을 뿐아니라, 관광호텔을 통하여 대량의 외환을 벌어들이고, 남는 부분만 내수시장에 판다고 했다. 한편으로 시장공급을 풍부히 하고, 동시에 공장도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류창시는 당시 대외경제무역부부장인 천무화(陳慕華)의 딸이 마침 잡품처의 직원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천무화의 딸을 시켜 이 편지를 천무화에게 보낸다. 천무화는 서신을 받은 후, 공항에서 총리 자오즈양(趙紫陽)의 출장을 환송하러 가는 길에, 구두로 완리(萬里) 부총리에게 북경코카몰라의 생산판매현황을 보고하고, 중앙에서 내수를 허용해주도록 부탁한다. 완리는 그 자리에서 동의한다. 천무화는 완리의 의견으로 류창시의 서신에 적어서 중량으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중량이 완리의 의견을 가지고 대외경제무역부를 찾아가는데, 대외경제무역부에서는 내수를 금지시킨 것은 중앙지도자의 문건으로 지시한 것이므로, 내수를 다시 시작하려면, 중앙지도자의 정식문건지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대외경제무역부에서는 중량의 당주잡품처로 하여금 국무원에 보고할 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류창시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자오즈양이 '동의'라는 두 글자를 썼고, 야오이린(姚依林), 구무(谷牧), 리센넨(李先念), 천윈(陳雲)등 중앙지도자들도 모두 보고서에 서명했다. 이후 코카콜라는 내수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루빙송은 코카콜라의 공관업무를 담당한 중국계이다. 비록 홍콩에서 자랐지만, 대륙을 잘 알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구체적인 사항도 털어놓았다.

 

1986년, 로큰롤가수 추이젠(崔健)이 프랑스 파리에서 코카콜라가 스폰서한 세계로큰롤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북경에 돌아온 후 개인음악회를 열었는데, 스폰서를 구하기 위하여 코카콜라회사를 찾았다. 처음에 코카콜라는 아주 기뻐했고, 기꺼이 응락했다. 그러나, 루빙송은 황급히 막았다. "로큰롤은 당시 새로운 사조이고, 추이젠의 노래에 대하여 당시 이미 논쟁이 있었다. 추이젠의 로큰롤을 찬조하는 것은 잘못하면 코카콜라를 힘들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코카콜라는 조용히 모든 일을 처리했다. 이전의 경험에서 배운 것이다. 더 이상 크게 선전광고를 하지 않았다.

 

조용한 국면을 깨트린 것은 1986년이었다. 이해 10월, 영국여왕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BBC는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CCTV가 그 필름을 사서 방송하고자 했다. 이때 코카콜라를 찾아와서 20만달러를 찬조해달라고 했따. 조건은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후에 코카콜라광고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코카콜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만달러는 당시에 엄청난 돈이었다. 코카콜라회사는 1년에 중국에서 콜라를 팔아서 20만달러를 벌지 못할 때였다." 루빙송의 말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콜라공고가 일단 CCTV에서 방영되고나면, 이것은 코카콜라가 중국에서 정정당당하게 영업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계속되는 우여곡절을 거쳐, 코카콜라는 드디어 중국인의 생활속에 융합되어 들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