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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책에는 왜 구두점, 부호가 없었는가?

by 중은우시 2008. 10. 17.

글: 양문도(梁文道)

 

중문(中文)에는 원래 구두점, 부호가 없었다. 그리하여 책을 읽으려면 먼저 구두점을 찍는 법부터 배워야 했고, 자기 스스로 문장에 구두점과 부호를 붙여서 읽어야 했다. 이러한 임무는 독자의 것이었지, 작가의 것이 아니었다. 중문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고대의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도 모두 구두점이나 부호가 없었다. 보자하니, 중국뿐아니라, 전세계의 작가들은 모두 그들의 독자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던 것같다.

 

고대의 작가들이 왜 이렇게 독자들을 괴롭혔을지 생각을 해보았는가? 고대에 책은 아주 적게 나왔다. 시장에서 찾을 수 있는 책의 종류는 아주 적었다. 로마제국시대에 1년에 겨우 일,이백종의 책이 나올 정도였다. 중세기말에 유럽에서 가장 박학한 학자도 일생동안 겨우 800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다. 그래서 고인들이 박학하다는 것은 오늘 날과 다르다. 많이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깊이 읽었다는 것이다. 모두 공자가 아주 박학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 때 책이 몇 권이나 있었겠는가? 고인들이 중시한 박학이라는 것은 심도있게 읽는 것이었다. 영어로 말하자면, Intensive Reading인 것이다. 일,이백권의 책이 네 앞에 있고, 그것이 네가 일생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전부라면,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자 한자, 한자를 읽고, 읽은 후에는 다시 한번 더 읽고, 계속하여 글자의 행간에 담긴 뜻을 이해하려 할 것이다. 빨리 다 읽어버리고 나면, 나중에 읽을 게 없어지지 않겠는가?

 

고대에 왜 구두점과 부호를 붙이지 않았을까? 그때는 그렇게 빨리 읽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두점과 부호가 유행한 것은 최근 이,삼백년의 일이다. 구두점과 부호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사실 그것은 상업행위의 결과이다. 오,륙백년전에,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나타난다. 서적출판은 가장 오래된 공업생산품이 되었다. 그리하여 책은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 된 것이다. 원가를 고려하여, 인쇄상 즉, 서적상인은 대량인쇄를 통하여 원가를 줄이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구두점과 부호를 발명한다. 이는 책을 더 쉽게 읽고 더 빨리 읽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다시 문단을 나누었다.

 

고대의 책에는 문단나누기가 없었다. 장절(章節)도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논어>>를 보면, 한편과 다른 한편간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卷)은 그저 물질적인 단위이다. 죽간이 부족하면 다시 권을 바꾸어 계속 쓴 것이다. 중국고대의 책들은 이러했다. 인도, 아랍, 유럽의 책들도 그러했다. 인쇄술이 나온 이후에, 출팡산등은 비로소 서적에 단락을 나누고 장절을 구분했다.

 

문단나누기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전에 유럽인들은 문단이 나눠지지 않은 <<성경>>을 매번 시작부터 하나하나 읽어나갔었다. <<성경>>에 문단을 나누고 장절이 나뉘어지고 난 후에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단락의 중요도에 대하여 어느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의견차이가 벌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영국의 철학자인 존 로크는 "성경의 단락을 나눠서 인쇄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상인들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그들은 성경을 더욱 많이 팔아먹기 위해서 단락을 나누었다. 단락이 나누어진 이후 우리의 신앙도 사분오열될 것이다" 불행히도 존 로크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기독교가 여러 교파와 교회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인쇄하느냐도 아주 중요하다. 인쇄술의 탄생은 우리로 하여금 정독(精讀)에서 벗어나, 범독(泛讀)을 하도록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물어본다. 어떻게 하면 빨리 읽을 수 있느냐고. 그러나 잘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인들은 어떻게 책을 읽었던가? 그들은 그저 본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읽었고, 천천히 읽었고, 소리내어 읽었다. 낭독은 사람을 책 속에 빠져들게 한다. 이렇게 삼매경에 빠진 상태에서 아주 중요한 효과가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수련(修煉)이라는 효과이다.

 

나는 지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손에 쥐고 있다. 이 책은 지금 중국에서 아주 인기가 높다. 왜냐하면 원자바오 총리가 본다고 했기 때문이고, 클린튼, 부시, 미테랑도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출판을 위하여 쓰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 스스로 읽기 위해서 썼다. 계속 연구하고, 수양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점이라면 바로 그것이 하나의 수행집이라는 점이다. 그의 책을 쓰는 행위 자치게 하나의 수행이었다. 이후에 계속하여 연구하고 읽었던 것도 그러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영어에서 말하는 Spritual Writing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그것을 정신수련으로 읽고, 계속하여 읽고, 반복하여 읽는다. 이들 국가지도자들이 <<명상록>>을 읽을 때마다, 정신수양이 된다. 고인들이 <<논어>>를 읽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독서는 자신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인격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사람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이 점을 고인들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홍루몽>>을 읽는데, 매번 서로 다른 의미로 느껴진다고 한다. 고인들이 반복하여 읽었던 것은 이런 것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매번 읽을 때마다 같은 의미로 읽힌다. 그것은 자신에게 계속하여 재삼 일깨워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너에게 잘못하면, 화내지 말라. 반대로 너는 그가 좋게 혹은 나쁘게 한 이유를 생각해보라. 그 후에는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가? 해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책은 독자에게 의미를 명확히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책을 잘 읽는 사람은 모두 어떤 책에 의하여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고대의 독서인들은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만일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은 책을 잘 읽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독서는 일종의 수련이고, 일종의 transformation이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하나의 도구로 생각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 독서는 사실 일종의 정신훈련이고,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전통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책을 찾아서 자신을 수련하고, 자기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