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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래지, 즉안지(旣來之, 則安之) : 모택동이 곡해한 공자의 명구

by 중은우시 2008. 7. 22.

글: 황국영(黃國榮)

 

누군가가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면, 직장상사이든 친구이든 병문안을 가거나 위문서신을 보낼 때, 모두 이런 말로 환자를 위로한다: "기래지, 즉안지(旣來之, 則安之)". 그 의미는 이왕 온 것이니, 편안하게 병이나 치료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미 거의 풍습으로 굳어진 것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연유는 바로 모택동(毛澤東)이 병중의 왕관란(王觀瀾)를 병문안할 때 이 문구를 사용한데서 유래한다. 그후 모두 이를 따라하는 것이다.

 

왕관란은 당시 중앙농민위원회 주임, 섬감녕변구 통전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었다. 장정때 위장병을 앓아서 섬북(연안)에 온 후에 몸이 계속 허약했다. 일이 바쁘고 과로를 하는 바람에 자주 병이 들었다. 왕관란의 부인인 서명청(徐明淸)은 그가 몸이 좋지 않은데도 일을 하다보니 쓰러질 것을 걱정하여 모택동 주석에게 보고해서 왕관란에게 좀 쉬도록 권유하게 하였다. 모택동은 바로 왕관란을 찾아갔고, 친절하게 위문했다: "관란 동지. 너는 매일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가?" 그러자 왕관란은 사실대로 말했다: "매일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나는 처리를 다 끝낸 후에야 잠을 잡니다" 모택동은 그 말을 들은 후에 이렇게 권유했따: "일을 하는데는 경중과 완급을 조절해서 해야 한다. 너처럼 일해서야 견디겠는가? 우리는 게으른 사람에게는 부지런하고 빨리 일하도록 하게 해야 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요령있게 일하도록 해야 한다" 모택동의 말은 왕관란, 서명청 부부를 감동시켰다. 오래지 않아, 왕관란은 심한 감기쇼크로, 십이지장궤양, 신경쇠약등의 질병이 도졌다. 그리하여 연안중앙병원에 입원한다. 당시 지도자인 모택동은 옛전우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어느날 아침 일찍, 부련을 데리고, 도보로 5,6리의 산길을 걸어서, 강도 하나 건너고 늦가을의 추운바람도 맞으면서, 양가령에서 중앙의원까지 가서 왕관란을 위문한다. 왕관란은 불면증에 시달려 얼굴이 초췌했고, 두통도 심했다. 모택동은 그의 침대곁으로 가서, 나무의자를 하나 가져다 앉고는, 위문의 말을 했다: "관란동지. 잠이 오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 누워 있어라.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언젠가는 잠이 올 것이다." 그는 또한 병원간부에게 잘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서명청에게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위로했다. 만나고 온 후에, 모택동은 여전히 왕관란을 걱정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비서를 통해서 서신을 하나 전달했다. 서명청이 뜯어보니, 모택동이 붓으로 왕관란을 위하여 글을 하나 써주었다.

 

"기래지, 즉안지(旣來之, 則安之). 스스로 전혀 서두르지 말라. 체내에 천천히 저항력이 생기게 해서 싸우게 해라. 마지막에 승리할 때까지. 이것이 만성질병에 대한 대책이다. 급성병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의사보고 처치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스스로 조급해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급하다고 빨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병에 대하여, 필요한 것은 굳건한 투쟁의지이다. 그러나 조급해하지는 말라. 이것은 나의 병에 대한 태도이다. 글로 써서 왕관란동지에게 주니 참고하기 바란다.

 

모택동 12월 16일(1941년)"

 

이 글은 왕관란으로 하여금 질병에 대한 싸움에서 이기도록 힘과 격려를 주었을 뿐아니라, 이후에 널리 알려져서, 질병에 대한 좌우명으로 자리잡았다.

 

모택동은 지도자로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고, 부하들을 관심으로 돌보았다. 이 점은 확실히 존경받고 찬양받을 만하다. 다만, 그는 여기에서 공자의 "기래지, 즉안지(旣來之, 則安之)"의 원래 의미를 곡해했다.

 

이 문구는 원래 <<논어>> 계씨 제16에 나오는 말이다. 노나라의 계씨(季氏)가 병사를 일으켜 노나라의 부속국인 작은 나라 전유(顓臾)를 치려고 했다. 당시 계씨의 밑에서 일하던 염유(有)와 계로(季路)가 공자에게 찾아가서, 이 일을 얘기했다. 공자는 염유와 계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준다:

 

"군자가 가장 미워하는 것은 자신이 욕심이 있다는 것을 고의로 말하지 않으면서 핑계를 찾아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들어본 적이 있다. 국가가 있고 집안이 있는 자는 빈곤한 것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재산이 균등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며, 백성이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백성들이 안정되게 생활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고. 왜냐하면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하면 가난한 자가 없게 될 것이고, 사람들이 화합하면 적다고 할 수 없고, 생활이 안정되면 국가는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멀리 있는 자들이 찾아와 복종하지 않으면 자기의 덕행을 쌓아서 그들을 감화시켜야 한다. 기래지, 즉안지(旣來之, 則安之). 이제 염유와 계로는 함께 계씨를 보좌하고 있는데, 멀리 있는 사람들이 감복하지 않고, 그들을 귀순하게 할 방법도 없다면, 나라는 지리멸렬하게 갈라질 것이어서 지킬 수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국가내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내 생각으로 계씨의 걱정은 전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궁중안에 있다"

 

공자가 염유와 계로에게 말한 것에서 "기래지, 즉안지(旣來之, 則安之)"라는 것은 '이미 귀순해 왔다면, 바로 그들이 안정되게 생활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모택동은 세 가지를 곡해했다고 생각한다.

 

첫째, 원래의 의미와 맞지 않는다. 공자가 얘기한 "기래지, 즉안지(旣來之, 則安之)"의 "래(來)"는 오다, 도착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귀순(歸順, 歸服, 歸化)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의 '안(安)'도 안심하다는 뜻이 아니라 '안정' '안녕' '안거낙업(安居樂業)'의 의미이다. 

 

둘째, 원래는 치국방략이지 위문하는 말이 아니다. 공자가 염유와 계로에게 얘기한 것은 만일 멀리 있는 나라에서 아무도 귀순해 오지 않으면 덕행을 쌓아서 그들을 감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귀순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유와 같은 작은 나라는 이미 노나라의 속국인데, 이미 귀순했다면, 당연히 그들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들을 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가 내놓은 치국방략이지 위문문구가 아니다.

 

셋째, 말을 듣는 대상이 다르다. 약간의 차이로 의미는 천지차이가 나게 되었다. 공자가 여기에서 하는 말을 듣는 대상은 염유와 계로이다. 여기서, "안지(安之)"의 대상은 '전유'이지, 즉, 전유와 같은 작은 나라를 '안지'하라는 것이다. 여기의 의미대로 하자면, 모택동은 이 글을 왕관란이 아니라, 연안중앙병원의 간부나 의료진에게 주었어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왕관란을 잘 '안지'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주석이 글을 준 대상은 왕관란이다. 비유하자면 공자가 이 말을 전유에게 했다는 것이다. 계씨가 전유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전유보고 스스로 편안하게 있으라고 하는 꼴이어서 적절하지 않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모택동이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창조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공자의 명구는 이미 이천여년간 내려왔다. 모두가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 모택동같은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즉흥적으로 창조했다면, 당연히 성인의 문구는 피해서 지었을 것이다. "기병지, 즉안지(旣病之, 則安之)"와 같이 말하는 것이 더욱 타당했을 것이다.

 

공자의 "기래지, 즉안지(旣來之, 則安之)"라는 치국방략에 대하여 필자의 생각으로는 강희제와 건륭제가 가장 잘 이해했고, 가장 잘 운용했던 것같다. 승덕의 피서산장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피서산장의 주위에는 12개의 건축양식이 서로 다른 사원이 있다. 옛날에는 "외팔묘(外八廟)"라고 불렀다. 아마도 관광객을 끄는 주요한 이유는 아마도 황실 피서지였기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점은 그곳이 강희, 건륭황제가 몽고, 신강, 티벳등 지역의 소수민족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만든 곳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는 그들의 치국방략이 숨어 있다.

 

피서산장은 1703년에서 1792년에 걸쳐 완공된다. 강희때 시작해서, 건륭때 완공한 것이다. 바로 '강건성세'때의 일이다. 피서산장을 지은 주요한 목적은 '피서' 이외에 더 중요한 두 개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궁내의 후궁의 정치간여를 막는 것으로, 황제가 자금성을 떠나면, 권신 후비등 음모자들이 반드시 기회를 틈타 움직일 것이므로 이를 조사하여,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수민족의 우두머리를 불러오는 것이다. 어떤 자들은 자금성에 들어가는 것은 두려워했다. 깊은 궁중에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희, 건륭은 자금성에서 옮겨가서, 피서산장에서 소수민족의 우두머리를 만났다. 자신이 스스로 궁을 나서서 맞이하니 평등한 예를 해주는 것이 된다. 건륭은 1년중 반년간 이 곳에서 정무를 처리했다.

 

기록을 보면, 외팔묘가운데 부인사(溥仁寺)와 부선사(溥善寺)가 있는데, 이는 1713년 몽골의 여러 왕공이 강희황제의 60회생신을 축하가기 위하여 성지를 받들어 지은 것이다. 속칭 '소포탈라궁'이라고 부르는 보타종승지묘는 티벳의 포탈라궁을 본떠서 달라이라마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미복사지묘는 판첸라마를 위하여 지은 행궁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판첸은 당시 도보로 2만여리를 걸어 티벳에서 열하까지 왔다. 보녕사는 건륭20년(1755년)에 오이라트몽골의 수령 갈단의 반란을 진압한 후 그 기념으로 지은 것이다. 건안원묘 속칭 이리묘를 지은 것은 건륭29년(1764년)에 신강 다스다바부 2천여명이 열하로 이주해온 후 그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지어준 것이다. 보락사는 건륭31년(1766년) 투르후트, 좌우 카자흐, 부루트등 부족이 청나라에 귀순한 것을 기념아혀 지은 것이다.

 

어떤 민족이나 부락이 귀순해오면 그들을 위하여 그들 고향과 같은 궁중양식의 사원을 지어주었고, 그들을 기념했고, 그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세심한 사람이라면 발견했을 것이다. 외팔묘는 대부분 당해 민족의 대표적인 사원을 본떠서 지었다. 건물마다 금벽휘황하다. 어떤 사원은 금사유리기와에 황금을 수만냥 썼다. 산장으로 들어가서 보면, 황제와 황후, 내지 서태후의 바은 규모가 겨우 수십평방미터밖에 되지 않아 매우 좁고 작다. 그리고 산장건물의 기둥이나 서까래에는 일체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지붕과 벽들에도 대부분 푸른벽돌이나 회색기와를 썼다.(원래 황실은 황색기와를 씀). 기동이나 창문은 모두 원래의 나무 원래의 색으로 했다. 그리하여 단백하고 우아하며, 장중했고, 검박하며 법도에 맞았다. '강건성세'가 어디서 왔는가? 바로 이 산장과 외팔묘의 건축차이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 바로 정치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고, 영명함이 들어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