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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리: 소교(小喬)는 주유(周瑜)의 첩인가? 처인가?

중은우시 2008. 2. 19. 01:40

글: 이강

 

소교의 지위를 고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녀와 언니인 대교(大喬)를 함께 놓고 고증해야 한다. 그녀들 자매 두 사람은 손책(孫策)과 주유(周瑜)에게 처 혹은 첩으로 시집갔다. 경우의 수를 계산하면 모두 네가지이다. 첫째, 두 사람 모두 처인 경우, 둘째, 두 사람 모두 첩인 경우, 셋째, 대교는 처이고 소교는 첩인 경우, 넷째, 대교는 첩이고 소교는 처인 경우.

 

먼저 대교의 지위가 처인지 첩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고대의 예절에 따르면, 셋째 가능성은 배제해도 될 것같다. 왜 그러한가? 대교와 소교는 동급의 자매이지만, 손책과 주유는 상사와 부하의 관계이다(비록 두 사람은 형제처럼 가까웠지만, 그래도 상하급의 관계는 존재한다). 고대의 예법에 따르면, 상사의 부인이 처인데, 그 처의 여동생은 언니남편의 존귀한 지위에 따라, 부하에게 시집가면서 첩으로 가는 경우는 있기 힘들기 때문이다. 상사는 큰 딸을 정실부인으로 데려갔는데, 부하가 오히려 작은 딸을 첩으로 데려간다는 것은 상하가 뒤바뀌는 일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교와 소교의 신분에 대하여 다른 세 가지 가능성을 분석해보자.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대교소교에 관한 자료는 세 군데이다:

 

(1) <<삼국연의>> 제44회 "공명은 지혜로 주유를 자극하고, 손권은 결심을 내려 조조를 격파하다"는 곳을 보면 주유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공유소부지; 대교시손백부장군주부, 소교내유지처야(公有所不知; 大喬是孫伯符將軍主婦, 小喬乃瑜之妻也, 그대가 모르는 것이 있다; 대교는 손권장군의 주부이고, 소교는 바로 나 주유의 처이다)"

 

(2) <<삼국지. 오서. 주유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종공환, 발지. 시득교공양녀, 개국색야. 책자납대교, 유납소교(從攻, 拔之. 時得橋公兩女, 皆國色也, 策自納大喬, 瑜納小喬, 안휘지방을 공격해서, 뿌리뽑았다. 그 때 교공의 두 딸을 얻었는데, 모두 천향국색이었다. 손책은 대교를 납(納)하고, 주유는 소교를 납(納)했다)"

 

배송지는 이 곳의 주에 <<강표전>>을 인용했다: "책종용희유왈: 교공이녀수유리, 득오이인작서, 역족위환(策從容戱瑜曰: 橋公二女雖流離, 得吾二人作婿, 亦足爲歡, 손책이 주유를 놀리면서 말하기를: 교공의 두 딸은 비록 고향을 떠나 흘러다니나, 우리 두 사람을 얻어 사위로 삼았으니 즐거운 일이 아닌가)"

 

(3) <<파릉현지>>는 <<일통지>>를 인용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삼국오이교묘, 재부치북. 오손책공환, 득교공이녀, 자납대교, 이이소교귀주유, 후졸장어차(三國吳二喬墓, 在府治北. 吳孫策攻, 得橋公二女, 自納大喬, 而以小喬歸周瑜, 後卒葬於此, 삼국시대 오나라의 이교의 묘는 부의 치소 북쪽에 있다. 오나라의 손책이 안휘지방을 공격한 후 교공의 두 딸을 얻었는데, 스스로 대교를 납하고, 소교는 주유에 귀(歸)하였다, 나중에 죽어서 이 곳에 묻힌다)"

 

이 세 곳의 기재를 보면, 삼국연의는 대교,소교가 모두 정처라는 설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삼국연의는 문학작품이고, 많은 내용이 허구이며, 사실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러한 점에서 삼국연의를 들어 근거로 삼기는 힘들다. 뒤의 두가지 중에서 두 가지 글자가 나타나는데 바로 "납(納)"과 "귀(歸)"이다. 대교에 대하여는 모두 "납"을 쓰고 있다. 그러나, 소교에 대하여는 한 곳에서는 "납"을 다른 곳에서는 "귀"를 쓴다.

 

중국고대남자들이 장가를 가는데 쓰는 동사는 주로 세 가지이다. "상(尙)" "취(娶)" "납(納)"이 그것이다. 신하가 왕실의 여인을 취하는 것을 "상"이라고 한다; 왕실에서 후궁이나 왕비, 왕후와 결혼하는 경우를 "납'이라 한다; 일반인들이 정실부인을 취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취"를 쓴다, 일반인이 첩을 들이는 경우는 "납"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취처납첩(娶妻納妾)"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당시, 손책은 왕실이 아니었으므로, "납"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적어도 대교의 신분이 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삼국지. 오지. 주유전>>의 기록을 보면, 손책과 주유가 이교와 결혼한 다음 해에 손책이 죽는데, 사후에 손책에게는 3녀1남이 있었다. 대교가 1년내에 네 쌍둥이를 낳았다고 보기는 힘들므로, 대교와 결혼하기 전에 손책에게는 이미 처자식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대교의 지위는 첩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교의 지위가 첩이라면, 위에 든 경우의 수 중에서 첫째 가능성은 배제해도 된다.

 

그렇다면, 4가지 경우의 수 중에 이제는 2가지만 남았다. 즉, 대교가 첩이라는 전제하에, 소교는 처일 수도 있고, 첩일 수도 있다. 소교는 첩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사료를 보면, 주유가 소교와 "납(納)"하였다고 되어 있지, "취(娶)"하였다고 되어 있지 않다. 이로써 볼 때 "납"한 것이라면 분명히 첩이다.

 

(2) 소교는 오나라의 귀족이 아닌 민간출신이고 출신이 미천했으며, 손책과 주유의 전리품이다. 주유와 집안이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실부인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3) 주유가 소교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 이미 25세이다. 한나라때 남자들은 조혼하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남자들은 대부분 20세전에 이미 성혼했다. 손책과 주유가 대교소교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모두 25세였으므로, 주유는 이 시기에 당연히 정실부인이 있었을 것이고, 노총각으로 그 나이가 되어서야 소교를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 소교가 죽은 후에 주유와 함께 묻히지 못했는데, 이는 그녀가 정실부인에 상응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5) 대교, 소교의 남편인 손책과 주유는 모두 오나라의 초중량급인물들인데, 그녀들 자매는 사서(주로는 <<오서. 빈비전>>)에 남아있는 기록이 아주 적다. 이것은 그녀들의 지위가 높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정실부인이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상의 이유만으로 소교가 첩이고 처는 아니라고 완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소교가 처일 가능성이 첩일 가능성보다 크다고 본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먼저, <<삼국지. 오서. 주유전>>에서 말하는 "소교를 납했다"는 구절을 보자. 이것은 소교가 첩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통지>>에서는 "소교는 주유에 귀(歸)했다"는 표현이 있는데, 손책이 대교와 결혼한 이후에, 소교를 주유에게 시집보냈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귀(歸)라는 표현인데, 고대에 출가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귀"는 일반적으로 아주 융중한 경우에 쓰였다. 예를 들어, 주나라때, 주왕실의 여인이 제후에게 출가하여 정실부인이 되는 경우에 모두 "귀"라는 용어를 썼다. "왕희귀제, 종주지례(王姬歸齊, 宗周之禮)"등의 글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만일 소교가 주유에게 첩으로 갔다면, "귀"라는 융중한 표현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교와 소교가 모두 민간의 여식이라고 하며, 손책이나 주유와는 집안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 그녀들이 손책과 주유를 만났을 때, 손책과 주유의 나이가 적지 않았다는 것도 든다. 조혼이 성행하던 한나라때, 그들은 분명히 결혼했을 것이며, 이런 민간여인을 정실부인으로 맞아들였을 가능성은 적다고 보는 것이다. 당연히 대교소교를 민간여인으로 보는 이유중 하나는 '당시 교공의 두 딸을 얻었다'는 글에서 대교와 소교를 전리품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공의 두 딸이 비록 고향을 떠나 흘러다니나, 우리 두 사람을 사위로 얻었으므로, 즐거운 일이 아닌가"라는 글에서 "고향을 떠나 흘러다니다(流離)"라는 것을 민간에 유락(流落)한 것으로 보고 있어서 보통민간여인으로 보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견해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 하나는 대교소교가 전리품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자료는 없다는 것이다. '당시 교공의 두 딸을 얻었다'는 것의 "얻었다(得)"는 것은 두 딸을 포로로 잡았다는 것은 아니다. 손책과 주유가 안휘지방을 점령한 후, 대교 소교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동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유리(流離)"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유리의 의미를 "면모를 일신하고 빛을 발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순조롭게 해석된다. "교공의 두 딸은 아주 아름답다. 보통 남자에게 시집갔다면 아까운 일일텐데, 우리와 같은 뛰어난 남자를 남편으로 삼았으니 그녀들도 즐겁지 않겠는가?"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지 않을까. 게다가 정말 민간에 유리된 것으로 말하게 되면, 그녀들의 신분도 그다지 떨어지지는 않는다. 보통의 민간여인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사실상, 대교 소교의 부친인 교공이 도대체 어떤 신분인지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교공이 태위(太尉)인 교현(喬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왜냐하면, 198년에 손책이 안휘지방을 공격하고, 교공의 두 딸을 얻는데, 교현은 183년에 죽었으므로, 동일인으로 보기 어렵다), 다만 사료에서는 교공이 평민이라고 명확히 기재하고 있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소교는 금기서화를 좋아했고, 자수를 잘했다고 나오는데, 이런 소양은 시집온 이후에 닦은 것만은 아닐 것이고, 출가하기 전에 이미 양호한 집안교육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것은 평민여인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대교, 소교는 몰락한 명문가문의 후예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몰락한 귀족도 귀족은 귀족이다. 소교가 주유의 정실부인이 되는데 출신신분측면에서 문제될 것은 없는 것이다.

 

이외에,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소교가 주유와 집안에 있어서 문제가 없다는 요소를 보도록 하자. 그것은 바로 손책이다. 비록 소교가 민녀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이후 충분한 신분을 갖추게 된다. <<일통지>>를 보면, 손책이 먼저 대교를 취한 후에, 주유에게 소교를 취하게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손책과 주유가 동시에 대교와 소교를 만났지만, 상하급의 구분이 있어, 동시에 두 여인을 취하지는 않았다. 순서에 따라 손책이 먼저 대교를 취하고, 그 후에 주유가 소교를 취했다. 손책이 대교를 취한 이후에는 비록 이전에 소교의 신분이 민녀(民女)라고 하더라도, 이미 손책의 처제가 되었으므로 존귀한 신분을 얻은 것이고, 정실부인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왜 소교가 죽은 후에 주유와 합장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 점도 소교가 첩이고 처가 아니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내용이 될 수 있다. 동한이후, 부부합장은 거의 굳어진 제도이지만, 소교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교는 주유에게 시집가서 주유와 12년을 같이 산다(이로써 소교가 처음에는 첩이었으나, 나중에는 정실부인으로 승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두 사람은 사랑이 깊었고, 함께 생활했으며, 소교는 주유의 군대를 따라다녔으며, 적벽대전에도 참가한다. 주유가 죽은 후 소교는 그를 위하여 14년간 수묘(守墓)한다. 주유가 죽은 후에 그녀는 아마도 유일하게 수묘를 한 여인일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합장할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묘는 2리를 떨어져 있는데, 왜 소교는 주유와 함께 묻히지 않은 것일까? 여강현 문물관리소 소장인 공덕해의 분석에 따르면, 소교는 주유를 사랑했으므로, 사후에 주유의 묘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서 2리 떨어진 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약간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들어볼 만하다.

 

이외에, 소교가 첩이었다면, 왜 관련 사료에서 주유의 정실부인을 언급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가? 주유는 어쨌든 삼국시대의 풍운인물이고 2남1녀를 낳았고,, 딸은 태자인 손등에게 시집가고, 아들 하나는 공주와 결혼하고, 다른 아들 하나는 고관을 지내는데, 만일 정처소생이라면 관련사료에서 주유의 정실부인을 소개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이것만으로도 소교는 정실부인이고 첩은 아니라는데 기울어진다. <<오서. 빈비전>>에 대교, 소교의 기록이 없는데 관하여는 그녀들의 지위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빈비전에서는 기본적으로 손권 및 그 이후에 오나라 통치자들의 부인에 관한 자료를 기록한 것이고, 손권의 전임인 손책과 그의 신하의 부인을 기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대교와 소교가 첩이라는 것은 그녀들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들이 첩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들의 인격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문제를 볼 때는 당시 역사환경하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부다처는 아주 합법적이었다. 그러므로, 첩이라고 하여, 그녀들의 이미지가 훼손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당시의 첩은 오늘날의 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