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나란청더(納蘭成德)가 홍루몽의 가보옥(賈寶玉)의 원형인가?

by 중은우시 2007. 10. 8.

글: 정계진(丁啓陣)

 

<<홍루몽>>과 나란사(納蘭詞, 나란청더가 지은 詞)를 비교해보면, 양자간에는 적지 않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나란사의 몇군데 구절을 보자.

 

화골냉의향, 소립앵도하(花骨冷宜香, 小立櫻桃下)

               - 생사자(生査子)

환유취, 냉향반루, 제일소상우(還留取, 冷香半縷, 第一瀟湘雨)

               - 점강순. 영풍란(點降脣. 詠風蘭)

반세부평수서수, 일소냉우장명화(半世浮萍隨逝水, 一宵冷雨葬名花)

               - 탄파완계사(破浣溪沙)

고미표잔, 침운사흑, 동몽기소상(菰米漂殘, 雲乍黑, 同夢寄瀟湘)

               - 일총화. 영병체련(一叢花. 詠倂蓮)

한계소립배황량, 환잉구시월색재소상(閑階小立倍荒凉, 還剩舊時月色在瀟湘)

               - 우미인. 추석신보(虞美人. 秋夕信步)

몽랭형무, 각망산산, 시야비야(夢冷蕪, 却望, 是耶非耶)

               - 심원춘(沁園春)

 

여기에 나오는 "냉향(冷香)" "장화(葬花)" "소상(瀟湘)" "형무(蕪)"는 <<홍루몽>>에서 아주 중요한 구절이 된다. 조설근이 <<홍루몽>>을 구상할 때, 아마도 나란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럴 듯한 설이다. 왜냐하면, 나란청더는 조씨집안과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희22년(1683년), 나란청더는 강희제의 남순을 따라 금릉을 가고, 일찌기 조설근의 조부인 조인(曹寅)의 요청에 따라, 조씨조상들을 위하여 건축한 연정(亭)에 "만강홍(滿江紅)"이라는 제목의 사를 써 준 일이 있다. 조인이 지은 시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가쟁창음수사(家家爭唱飮水詞)

납란심사기증지(納蘭心事幾曾知)

 

집집마다 앞다투어 음수사(나란청더의 사)를 부르지만,

나란청더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랴

 

어떤 사람은, <<홍루몽>>의 남자주인공인 가보옥의 원형이 바로 나란청더라고 말하기도 한다.

 

확실히, 신세내력이나 재주나 풍류적인 행적을 보면, <<홍루몽>>의 가보옥은 강희제때의 유명한 사인(詞人) 나란청더와 닮은 점이 많다. 다만, 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도 있다.

 

나란청더의 조부는 강희제의 조부와 4촌형제간이다. 그의 부친인 밍주(明珠)는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재상(宰相)이다. 비록 이런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나란청더는 전형적인 귀족집자제의 유형은 아니었다.

 

나란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학문을 연마하기를 즐겼다. "시간이 나면 땅을 쓸고 책을 읽었으며 친구 4,5명과 함께 경사를 연구하고 고금의 일들을 논하였다"(서건학이 쓴 나란청더의 묘지명). 나중에 경사(經史)연구에 아주 흥미가 있어, 진송령(秦松齡), 주이존(朱彛尊)등의 친구의 도움을 받아 송, 원나라때의 각종 경학연구저작들을 구매하고, 다시 그의 스승인 서건학의 지도를 받아 140종의 초본을 밤새워 연구하곤 하였다. 독서수필집인 <<녹수정잡식(水亭雜識)>>을 저술하고, <<사운정략(詞韻正略)>>을 편저하고, <<전당시선(全唐詩選)>>을 편찬하였으며, 친구인 육원보(陸元輔)에게 부탁하여 <<대역집의췌언>>80권, <<진씨예기집설보정>>38권을 보완하고, <<통지당구경해>>1800여권을 각인했다. 창작에 있어서는 <<통지당시집>>5권, 사4권, 문5권(이상 <<청사열전>>권71을 참조)을 지었다. 당연히 나란청더의 모든 저작중 가장 가치있는 것은 그의 사(詞)이다. 작품중 일부분은 그 자신이 생전에 간행한 <<측모사(側帽詞)>>에 기록되어 있고. 그가 죽은 후 친구인 고정관(顧貞觀)과 오기(吳綺)가 교정을 본 <<음수사(飮水詞)>>에 기록되어 있다. 비교적 완전한 것으로는 그의 스승인 서건학이 그를 위하여 모아서 만든 <<통지당집>>에 사 300수가 기록되어 있고, 친구인 장순수가 간행하고 고정관이 교열한 <<음수시사집>>에는 303수가 기록되어 있다. 시위(侍衛)가 된 이후에 강희제를 따라서 다니면서 그도 "조궁서권, 착잡좌우(雕弓書卷, 錯雜左右)"하는 생활을 보냈다. 낮에는 강희제를 따라 사냥을 하거나 순유하고, 밤에는 장막아래서 등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 그리하여 자주 "책읽은 소리와 다른 사람의 코고는 소리가 함께 어울어졌었다(서건학의 묘지명)"는 광경이 나타났다.

 

나란은 가보옥처럼 과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7세에 태학(太學)에서 글을 읽고, 18세에 거인(擧人)이 되었으며, 19세에 회시(會試)를 통과했다. 다만, 전시(殿試)의 관문을 넘지 못했을 뿐이다. 아쉽게도 이 해에 상한이 들었고, 부친은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린 점을 고려하여 그에게 전시를 참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 3년간 그는 병을 치료하면서 글을 읽었다. 다음번 과거시험을 칠 때는 그의 나이 22세때였다. 그의 답안이 아주 훌륭하여, 시험관과 강희제의 칭찬을 듣고 2갑제7등(二甲第七名)으로 합격했다. 즉, 순위로 따지면 10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가보옥은 거인을 뽑는 향시에서 13등에 들었을 뿐이다. 공명을 이룬 것으로 따지자면 나란청더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란청더는 과거를 쳐서 관직이 오른다는 점에 있어서는 가보옥처럼 소탈하지 못했다.

 

가보옥은 문재(文才)가 있었지만, 나란청더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고, 두 부분에서 모두 능력을 발휘했다. 문재로 보면, 일찌기 강희제의 명을 받아 <<건청문응제시>>를 지었고, 강희가 쓴 <<송부(松賦)>>를 번역한 바 있는데, 모두 강희제의 호평을 받았다. 나란청더는 문재가 워낙 출중하여, 강희제가 한번은 어필로 친히 쓴 당나라때 저명한 시인 가지(賈至)의 <<조조(早朝)>> 칠언율시를 써서 상으로 내린 적이 있다. 무재의 측면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았으며, 진사에 합격한지 얼마되지 않아 바로 삼등시위에 임명된다. 그 이후 황제의 곁에서 일하게 된다. 시위가 된 이후 궁술도 계속 연마하여 백발백중의 경지에 이른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나란청더를 아주 아끼게 된다. 나란청더도 아주 성실하게 일을 하여, 그가 병으로 더 이상 관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기까지 8,9년동안 강희제의 남순북유를 수천리 함께 하였다. 가까이는 북경부근의 해자, 사하, 서산, 온천, 기포를 갔고, 멀리는 오대산, 성경(심양), 우라를 갔으며, 태산에 오르고, 곡부를 가고, 강남까지 내려갈 때도 따라갔었다. 황제를 호위하는 것은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므로 조금의 잘못도 있어서는 안된다. 매번 나란청더는 강희제의 앞에서 말을 타고, 눈으로는 육로를 보고 귀로는 팔방의 소리를 들었다.

 

나란청더는 겨우 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여러가지를 경험한다. 그는 일생동안 2명의 부인을 맞이하는데, 첫번째 결혼은 그가 개략 19살때쯤으로 첫부인은 당시 양광총독, 병부상서, 도찰원우도어사인 노흥조(盧興祖)의 딸이었다. 개략 결혼한 후 4년째 되던 해에 노씨가 사망한다. 노씨의 사망은 나란청더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는 여러편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사를 썼다. 노씨가 사망한 후, 나란청더는 관씨(官氏)를 둘째부인으로 맞이하고, 안씨(顔氏)를 첩으로 들였다. 나란청더는 3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아들 둘과 딸 하나이다. 아들의 이름은 푸거(福格)와 푸르둔(福爾敦)이었다. 옹정3년(1725년) 6월의 "상유"에 의하면, 연갱요(年羹堯)가 밍주의 손녀사위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나란청더의 딸이 연갱요에게 시집간 것이다. 이외에,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나란청더는 두 번의 실패한 애정사가 있다고 한다. 한번은 평생을 약속한 여인이 입궁하는 바람에 끝이 나고, 또 한번은 심완(沈宛, 자는 御蟬)이라고 부르는 강남의 재녀이다.

 

사실 귀족자제중에서 나란청더와 같은 사람이 당시 그 하나만이었던 것은 아니다. 안친왕(安親王)의 아들인 웨루이(岳瑞)는 스스로 홍란주인(紅蘭主人)이라고 하고 시와 사를 짓기를 즐겼다. 이리하여 "강희제때 종실에는 문풍이 있었는데, 안친왕의 집안이 가장 성하였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웨루이는 당나라때 맹교, 가도의 시를 모아 <<한수집(寒瘦集)>>을 편찬하여 간행하기도 했다. 강희의 아들인 윤잉(允)도 이런 유형이었다. 비록 강희제는 윤잉을 매우 아껴서 두번이나 태자에 올렸지만, 결국은 그의 태자지위를 박탈해 버렸다. 전해지는 바로는 윤잉이 첫번째 황태자의 지위를 박탈당했을 때는 분노와 불만을 표시했지만, 두번째 황태자의 지위를 박탈당했을 때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담소했다고 한다. 친왕, 황제의 자식들까지 이처럼 감성적인 사람들이었으니, 나란청더도 바로 이러한 몇 안되는 당시의 깨어있던 사람의 일원이었다. 다만, 나란청더는 탁월한 문학재능과 사의 성취가 특히 뛰어나서, 이러한 유형의 인물중 대표적인 인물로 떠올랐던 것일 뿐이다.

 

* 나란청더(納蘭成德)은 나란싱더(納蘭性德)이라고 쓰기도 함. 만주족의 이름을 한자로 표시하다보니 동일한 인물의 한자명이 수개 전해지는 경우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