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旅順)은 요동반도의 남단에 위치하면서, 묘도군도, 산동반도북쪽의 봉래각과 함께 발해해협을 막고 있어, 북경, 천진과 발해해안의 병풍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연적인 양항(良港)이며, 지세가 험준하고,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는 어렵다. 항구내의 수심이 평탄하고, 년중 얼지 않는다. 그리하여 여순항에 와본 군사가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여기는 둘도없는 해군기지이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여순해군기지는 1955년에야 비로소 구성되었다. 여순항에 있어서 1955년은 기념할만한 날이다.
여순항구는 19세기 중후기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 정부는 여러차례의 탐사와 비교를 거쳐, 여순에 조선소, 포대, 항구 및 철로, 전보국등 군사시설을 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북양수군(北洋水軍)은 이 곳을 근거지로 하게 된다. 전체 공사는 1880년 10월에 착공하여, 1890년 11월에 준공한다. 10년간 공사에 백은430만냥을 들여서 완공한다.
갑오년의 청일전쟁후, 여순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1895년 12월 25일, 청정부는 3000만냥 백은의 "속요비"를 지불한 후에야 일본군이 비로소 여순에서 철수하고, 요동반도에서 철수했다. 1897년, 제정러시아는 여순항구를 강제로 임대하며, 임대기간은 25년이었다. 러일전쟁후인 1905년, 일본은 전승국의 입장에서 제정러시아를 여순대련지구에서의 "임차권"을 내놓도록 압박한다. 이때부터 여순은 다시 일본의 손에 들어간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여순을 이후 40년간 지배한다.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한 후에, 소련해군의 태평양함대는 여순항에 주둔하고, 일본군이 점령했던 해군기지를 이양받는다. 소련의 정치적인 지지를 얻기 위하여, 국민당정부는 이 사실을 승인하는 약정을 체결한다. 이후, 여순은 소련의 관리하에 들어간다.
1949년, 공산당정부가 성립되면서, 여순의 관리권을 회복하고자 한다. 1949년 여름, 신중국의 건립을 준비하면서, 중공중앙서기처의 서기인 유소기는 명을 받고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한다. 소련에 머무는 동안, 스탈린을 포함한 소련의 주요 지도자들과 여순문제에 대하여 수차례 회담한다. 당시 소련공산당중앙은 일단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이 일본에서 철수하면, 소련도 여순에서 철수하겠다고 결정하였다. 귀국후, 유소기는 사실대로 중공중앙 서기처에 보고하였고, 모택동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같은 해 12월, 거국적인 개국의 기쁨가운데, 모택동은 친히 중국정부대표단을 이끌고 북행 전용열차를 타고 소련방문길에 오른다. 12월 16일 모택동이 모스크바에 도착한 때로부터 담판이 끝날 때까지, 여순문제는 계속 핫이슈였다. 여러번 협상을 거쳐, 최종적으로 합의를 보았다. 1950년 2월 14일, 주은래, 비신스키는 각각 본국정부를 대표하여 크레믈린 궁전에서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과 <<중국장춘철로,여순 및 대련에 관한 협정>>의 두 건의 중요한 역사적 문건을 체결한다.
<<중국장춘철로, 여순 및 대련에 관한 협정>>에서는 "체약국 쌍방은 일본과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다만 늦어도 1952년말 이전에, 소련군대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여순해군기지로부터 철수한다. 그리고 이 지구의 설비를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전한다. 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소련에 1945녀누터 상술한 설비의 회복과 건설에 쓰인 비용을 변상한다" 이 규정은 반세기동안 여순문제에 관한 여러 조약중 유일하게 토지를 회수하고, 주권을 회수하는 정식문건이 된다. 모택동은 아주 기뻐한다. 귀국후 그는 전국정협상임위원회와 중공 제7기3중전회등에서 여러번 이번 체결된 협정에 대하여 만족감을 표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 단기간내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이 되었는데, 소련군이 여순에서 철수하기로 한 기한도 도래했다. 여순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1952년 8월, 주은래는 중국정부대표단을 이끌고 다시 소련을 방문했다.
제1차회담에서 주은래는 솔직하게 스탈린에게 중국정부대표단의 소련방문목적을 얘기했다. "중국국내형세와 5개년경제건설계획문제에 관하여, 대표단은 소녈의 동지들에게 서면보고서를 제출하고, 서면보고서제출후 다시 얘기한다. 일본은 미국 및 기타 자본주의국가들과만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점을 고려하고, 중소와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를 거절하는 점을 고려하며, 동시에 6.25전쟁의 현상을 고려하여, 중국은 소련군이 계속 여순에 주둔하기를 희망한다" 스탈린은 즉석에서 응락한다." 그건 좋다. 그러나, 제안은 중국에서 제출해달라. 여순에서 우리는 손님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제기하기는 불편하다" 이런 원칙하에서 중소 양국은 여러번의 협상을 거쳐 <<중국여순구해군기지공동사용기간을 연장하는데 관한 교환문건>>을 체결한다. 문건에서는 6.25전쟁을 지원하고 협력하며, 제국주의의 침략음모를 저지하고 타격하기 위하여, 중소쌍방은 양국이 여순해군기지를 공동사용하는 기간을 연장하기로 합의한다. 소련군이 여순에서 철수하는 시간은 별도로 합의한다"고 하였다.
1954년, 6.25전쟁이 끝나면서 신중국성립 5주년을 맞이하였다. 소련공산당중앙의 제1서기인 후르시쵸프는 9월말 소련정부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에 왔다. 그리고 건국5주년경축행사에 참석한 후, 쌍방 지도자는 중소관계, 국제형세 및 여순철군문제에 대하여 회담을 가졌다.
후르시쵸프는 똑똑한 사람이다. 자기국가의 국제적 이미지제고를 위하고, 소련의 사회주의진영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는 이 때 중국에 대하여 상당히 중시하고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모택동이 여순문제를 언급하자, 그는 즉시 입장을 표명했다: "중국은 독립한 주권국가이므로 외국군대가 주둔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군대가 1952년에 협정에 따라 철군하지 않은 것은 중국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형세가 변했다. 철군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 설치한 해군포이외에 여순과 대련의 일체의 설비를 무상으로 중국에 넘겨주겠다고 하였다. 주은래가 이끈 유관인원과 소련대표단은 구체적인 내용을 협상하였다. 10월 12일에 중남해의 이년당에서 <<중소회담에 관한 성명>>와 <<여순구해군근거지문제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드물게 융중한 의식이었다. 모택동, 유소기, 주덕, 주은래등 중국의 주요한 국가지도자들과 후르시쵸프가 이끄는 소련정부대표단의 전체구성원이 모두 체약식에 참석했다. <<공동성명>>에서는 "쌍방은 소련군대가 공동사용하던 여순해군기지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한다. 그리고 이 지구의 설비는 무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정부에 이전한다" "소련군대의 철수와 여순해군기지의 설비를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전하는 것은 1955년 5월 31일이전에 완성하여야 한다"
소련군 철수일정이 마침내 정해진 것이다.
중소간의 여순문제에 대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중국의 조야는 흥분으로 가득찼다. 길게 잡아야 반년이면 여순이 중국에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는 회의를 개최하여, 소련군으로부터 기지를 반환받고, 여순해군기지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고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금방 1955년이 되었고, 여순반환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모든 업무가 신속히 진행되었다. 원단(元旦)이 지나면서 중소연합군사위원회가 성립되고, 쌍방은 각각 대표단을 파견하여 기지반환문제를 협의하였다. 소련군측의 대표는 주대련소련군사령관 베로보드로프 대장이었고, 중국측의 대표는 국방부부부장 겸 해군사령관인 소경광(蕭勁光)이었다. 동시에 소경광과 인민해방군 부참모장 등화(鄧華)를 총책임자로 하는 여순대련방어구접수위원회본부를 설치하였다. 본부아래에는 육,해공의 세개의 분회를 두었다. 해군여순기지의 반환은 전체 방어업무이전의 핵심이었다. 이로 인하여 해군분회가 가장 중요했다. 해군참모장 주희한(周希漢)이 주임위원이 되고, 단덕창, 나화생, 팽림, 소진, 송경화등을 부주임위원으로 하여 구체적인 소련해군장비의 접수와 중국해군기지의 건설업무를 진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관련부대는 장병에 대하여 교육을 진행하고, 전국각지에서 선정된 부대는 여순으로 이동하였다.
외교부장을 겸임하고 있던 주은래는 전체 반환업무를 총지휘하였다. <<공동성명>>을 발표한 날로부터, 그는 여순반환문제를 업무일정에 넣고 매 단계마다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2월 17일, 그는 친히 국무원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주여순지구소련군위문 및 환송계획>>을 검토하였으며, 인수부대에 대한 교육등의 일을 처리하였다.
계획에 따라, 소련의 건군절이 다가오기 전에 국무원은 부총리 겸 국방장관인 팽덕회를 단장으로 하고, 송경령, 하룡, 곽말약, 섭영진등의 부단장으로 하는 위문단을 여순에 보내어 소련장병을 위문하였다. 성대한 위문행사에서 위문단 수석부단장 겸 전인대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인 송경령은 열정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녀는 중국인민은 소련홍군이 걸어온 길과 휘황한 업적에 숭고한 경의를 표한다. 수련군은 일본제국주의를 격퇴시키고, 아시아의 평화를 수호하는 투쟁에서 중국인민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중국인민은 영원히 기억하고 잊지 않을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은 형제인 소련홍군의 좋은 사상, 좋은 기풍을 배우고, 강대한 국방을 건설하고 세계평화를 지키는데 공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여순소련해군사령관 역시 정에 넘치는 답사를 했다. 행사전후로 서로 얼싸안고, 안부를 물으며, 축원하는등 상호간의 정이 아주 깊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월말에, 중소양국의 부대장비이전이 시작되었다. 1개월여동안 계속 여순으로 이동해온 해방군 장병은 1만여명이었다. 그 중에 화동, 중남군구에서 온 해군과 청도해군기지에서 온 해군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천진, 심양등지에서 온 공안부대와 기타 육군부대였다. 중국장병들은 장비다루는 법을 소련장병들로부터 배웠다.
4월상순에 해군기지의 각부대장비이전업무는 기본적으로 끝이 났다. 중소연합군사위원회는 4월 15일에 정식 체결식과 소련해군환송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중소양국이 여순에서 기지반환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많은 나라의 신문, 잡지, 티비등 여론이 분분했고, 일본과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비행기와 함정들도 활동이 많아졌다. 중소해군장병들은 한편으로는 각종 우의활동을 진행하였다. 서명, 사진, 기념품증정, 만찬, 영화등이 이어졌고, 다른 한편으로 경계를 강화하였다.
4월 15일, 중소양국의 해군방어업무이전행사는 해군기지의 '수병구락부' 앞의 연병장에서 융중하게 거행되었다. 중국해군의 나화생과 소련해군의 여순기지사령관 은 각각의 국가를 대표하여 <<요동반도협의지구해군방어업무인수인계증서>>에 서명했다. <<인수인계증서>>에는 "소련해군은 이미 요동반도 협의지구의 해군방어업무를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에게 이전하였고, 1955년 4월 15일 24:00부터 중국인민해방군 여순기지의 책임자가 당해지구연안의 방어업무를 책임진다"고 하였다. 이후 군악대가 소련국가, 중국국가를 연주하고, 소련국기가 국기대에서 천천히 하강했고, 오성홍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같은 날. 국무원은 중국인민해방군이 접수한 여순방어부대의 번호를 부여하고, "중국인민해방군해군여순기지"로 명명했다. 5월 3일, 국무원은 나회생, 팽림을 여순기지의 사령관, 정치위원으로 임명했다.
1895년 중일마관조약의 체결로 요동반도를 일본에 할양한 때로부터, 1955년 4월 여순을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순조롭게 접수한 때까지 꼭 60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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