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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74

"만주(滿洲)" (3): 민족혁명 배경하의 "배만(排滿)"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3​의 체결과 더불어, "중화민족은 가장 위험한 시기가 도래했다" 내우외환의 곤경에 혁명당인들은 보편적으로 폭력혁명만이 철저히 청나라 통치를 전복시키고,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런 시대적 배경하에서, 그들은 "구제달로(驅除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의 구호를 외칠 뿐아니라, 사상등 분야에서 일련의 "배만(排滿)" 작업을 하게 된다. ​첫째, "만주는 중국이 아니다"라는 점을 논증하다.​청나라 통치를 전복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혁명당인들은 '만주인'들이 국가와 민족에 끼친 악랄한 죄악을 상세하게 드러낼 뿐아니라,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예를 들면, 추용(鄒容)은 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무릇 사람이 자신의 종족을 좋아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으로.. 2024. 7. 22.
"만주(滿洲)" (2) : 17세기 서양인들이 본 '만주족'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2​17세기에 들어선 이후, "만주굴기"와 명청왕조교체를 위시한 일련의 동아시아사건은 유럽각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이런 배경하에서 중국에 와 있던 유럽선교사들은 자신의 견문을 종합하여, "만주굴기"와 관련돤 저작을 적지 않게 남겼고,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왔다.​서양인이 그린 아담샬과 순치​첫째, 만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17세기 이전까지 유럽선교사들의 글에 나오는 "타타르인(韃靼人)"은 주로 장성 이북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수시로 명나라변경을 침범한 몽골인을 가리켰다. 오랫동안 백산흑수(장백산, 흑룡강)에 거주해오고 있던 여진인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예를 들어,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저술에는 거의.. 2024. 7. 22.
"만주(滿洲)"(1) : 만주의 유래와 뜻은?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미국학자 엘리엇(Mark C. Elliott)는 이라는 저서를 통해 만주족의 민족특성을 '만주의 길(The Manchus Way)'로 설명했다.소위 "만주의 길"은 만주 최초의 생활방식이다. 또한 중국역사상 이민족왕조의 방식과 비교하자면, 요, 금, 원과 다른 방식이다. 기본요소는 마술(馬術), 궁술(弓術), 만주문자와 소박한 풍속이다.​이는 모두 청나라조정이 강조한 것이고, 만주인의 만주화를 강화한 것이다. 어떤 때에는 다른 약간의 특징도 있다. 예를 들어, 조상을 공경하고, 황제에 충성하는 것을 '용감한 품성'이라고 보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성명과 복식도 있다.​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무엇이 "만주"인가? 글자 자체로 볼 때 "만주"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내포.. 2024. 7. 22.
산채(山寨)에서 제국(帝國)까지: 청나라는 어떻게 여진통일을 완성했는가? 글: 기사석금(記史惜今) 여진족은 중국역사상 위대한 민족이다. 일찌기 두번이나 중원으로 들어와 정권을 잡고, 금(金), 청(淸) 두 왕조를 건립한다. 오랫동안, 여진족은 부락들이 난립하는 상태였다. 일단 여진부락이 통일되면, 아주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1583년, 누르하치가 거병한 이후, 홍타이시(皇太極, 청태종)이 여진부락을 철저히 정복할 때까지, 후금은 반세기를 들여 마침내 통일을 완성한 것이다. 이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 건주여진(建州女眞) 각부의 통일 명나라후기 여진은 건주여진, 해서여진(海西女眞)과 야인여진(野人女眞)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건주여진부터 얘기해보자. 건주여진의 기원은 흑룡강 오국성(五國城)일대로 금(金)나라의 핵심지역이다. 명나라초기 도문.. 2023. 3. 2.
미얀마는 왜 망명한 남명(南明) 영력제(永歷帝)를 받아주었다가 2년후 청나라에 넘겨주었을까? 글: 자귤(紫橘) 남명의 영력제가 멸망한 가장 관건은 바로 미얀마의 배신이었다. 주수지난(咒水之難)을 일으켜 영력제를 수행하던 신하들이 모조리 피살당하고, 영력제도 생포된다. 곧이어 오삼계(吳三桂)에게 넘겨져서 죽임을 당한다. 이정국(李定國)은 그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같은 달에 병사하고 만다. 대명은 철저히 부흥의 기회를 잃었다. 그렇다면, 미얀마는 왜 영력제를 받아주었다가 다시 그를 팔아먹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청군이 미얀마로 다가오면서 영력제를 내놓으라고 핍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후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고 자부했던 건륭제마저도 미얀마를 공격하여 격패시키지 못했던 것을 보면 미얀마군은 환경적인 우세를 이용하면 청군을 이기지 못한다고 할 수 없었다. 영력제를 돌려보낸 것은 완전히 미얀.. 2022. 7. 18.
청나라의 백은(白銀) 1냥(兩)은 현재 화폐로 얼마나 될까? 글: 일갱역사(一更歷史) 청나라는 중국역사상 최후의 봉건왕조이다. 청나라의 전, 중기는 강희, 옹정, 건륭의 세 황제의 통치를 거치면서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추세였으며, 민생경제도 대폭 제고되었다.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 부른다. 이 시기에 백은(白銀)은 청나라의 주요 화폐로 시중에서 유통되었다. 그렇다면, 청나라의 백은 1냥을 현재의 인민폐로 환산하면 대체로 얼마의 가치가 될까? 우리는 청나라중기를 예로 들어보자. 관련 문헌기록에 따르면, 강건성세때 시중의 품질이 우수한 쌀 1되의 가격은 10-15문(文)이었다. 1냥(兩)은 1,000문(文)이다. 1되의 쌀은 1.5근이다. 즉, 청나라중기의 백은 1냥은 150근의 우등쌀을 살 수 있었다. 쌀을 시장에서 사본 사람이라면 알겠.. 2022. 4. 14.
청나라 황제들은 한어(漢語)를 썼을까, 만어(滿語)를 썼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는 청나라궁중드라마를 보면, 우리는 자주 황제가 조회이 나가고, 대신들이 아뢰는 등의 장면을 보게 된다. 통치자인 청나라 황제는 조회에 나가서 만주족, 한족이 모여있는 대신들과 교류할 때, 어떤 언어를 썼을까? 한어일까, 만주어일까? 모두 알다시피, 청나라의 정치체계는 주로 만한 두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서로 다른 민족은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다. 언어의 차이는 교류에서의 장애를 가져온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자리잡은 직후, 조정의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만주족이다. 그래서 청나라초기에는 만주어가 조정의 언어였다. 소수의 조정에 들어온 한족신하는 반드시 만주어를 익혀야 했다. 그러나, 두 민족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일방적인 학습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2021. 11. 13.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는 위작일까? 글: 화용군(華容君) 는 청나라때 나타났다고 하는 청나라초기 청나라군사들이 양주성을 함락시킨 후, 10일동안 잔혹하게 양주성의 주민들을 도살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이 글은 역사학계와 애호가들의 논쟁을 불러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이 청나라군사들이 양주성의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도살한 것에 대한 진실한 증거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 글은 모호하고 애매한 내용과 추악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였고, 이 글이 특정한 역사상황하에서 돌연 나타났다는 것들을 들어 이 글은 작성과 동기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후자의 견해에 찬동한다. 즉 는 악의를 가지고 쓴 위작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미리 밝히고 지나가야할 것같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청나라군사들이 양주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 2020. 11. 18.
청초(淸初)의 체발역복(剃髮易服)과 메이지(明治)의 산발탈도(散髮脫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글: 범인모사(凡人摸史) 어떤 친구가 인터넷에 이런 의문을 올린 바 있다: "왜 청나라초기의 체발역복 얘기를 꺼내면 네티즌들은 의분강개하면서, 현재 서방사회의 헤어스타일은 왜 아무 말없이 받아들이는가?" 이것을 설명하자면 우선 두 마디 말이 필요하다: 새조차도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고, 새장에 갇혀 있기를 원치 않는다. 자유는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의 결론을 이끌어내자면 우리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말은 이것이다: "유두불유발(留頭不留髮), 유발불유두(留髮不留頭)"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을 없애야 하고,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가 잘려야 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현재 청나라 궁정드라마에 나오는 머리.. 2020. 7. 13.
청나라 팔기(八旗)의 기주(旗主)는 누구였을까?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만주팔기의 기주는 모두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가 맡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인 슈르차히의 후예가 맡았다. 어떤 사람들은 팔기는 만주, 몽고, 한군(漢軍)으로 나뉘므로 합쳐서 24기가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몽고팔.. 2019.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