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에 소속된 3만명의 일본군

중은우시 2007. 2. 15. 19:14

글: u.s.navy

 

"우리는 일부 일본인들에 감사합니다. 그들은 해방전쟁시기(1945년이후 1949년까지 공산당과 국민당의 전쟁)에 의사, 간호사, 기술자로 해방전쟁에 참여했으며, 이것은 우리와 일본인민간의 우호적인 관계의 믿음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일본의 국국주의는 확실히 잔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와주었던 일본인들도 많았습니다"

 

이는 국무원 총리 주은래가 1956년 6월 27일 일본대표단을 접견하면서 했던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한동안 중국내의 신문등에 보도되지 않았다. 30여년이 흐른 후, 이 말의 배후에 담긴 역사는 사람들에게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제4야전군에는 원래 일본병사들이 있었다.

 

1990년 4월, 필자는 섬서성의 모사단 정치부주임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상부의 통지를 받았는데, 일본에서 온 "제4야전군일본국적전우귀대방문단"을 접대하라는 것이었다.

 

일본인이 중국의 부대에 돌아와서 보다니...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친정'를 찾아온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부대의 전쟁사료나 신문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일본적 병사들이 해방전쟁에 참전했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함께 참가했던 사람으로는 집단군 정치부비서처의 처장인 여흥원, 중국인민해방군 제33의원 원장 장보림, 부원장 상흥록등이 있다. 접대하는 대표단의 구성원명단은 단장 중촌의광, 부단장 복산삼리, 비서장 약생애자, 단원 복간아자, 복경신등 모두 17명이었다.

 

원래 그들은 거의 모두 제4야전군 10종대에서 근무했던 의사, 간호사, 선전대원이었다. 대표단의 구성원은 대부분 사평혈전, 삼보임강, 사하강남, 임해설원비적토벌, 흑산저격전, 금주전투등에 참전했다. 그후 제4야전군의 백만군대는 입관하여 평진전투, 강남을 거쳐 해남도까지 내려갔었다. 장본림과 상흥록은 바로 이전에 일본적의 전우들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1953년부터, 이 제4야전군의 일본적 노병들은 하나둘 일본교포의 신분으로 귀국했다. 37년후에 다시 중국땅을 밟는 것이었다. 이 노부대의 번호는 이미 변경되어 제4야전군 10종야전의원에서 중국인민해방군 33의원으로 변경되었다. 내가 소재하는 부대는 바로 10종이 전신이었고, 이 일본적의 병사들이 우리 부대를 찾아오는 것은 친정을 찾아오는 것과 같았다.

 

나는 대표단의 영접을 책임졌다. 1972년부터 중일국교정상화후 첫번째로 조직된 제4야전군 원일본전우들이 자비로 구성한 여행단이었으며, 역사상 제1차귀대방문단이 되는 것이다.

 

관련사료를 살펴보았더니, 동북지방이 광복된 후, 동북의 일본교민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보내어졌다. 그러나, 일부분의 일본인들은 동북지방에 남았다. 당시 동북 9성, 14개시의 조사통계자료에 의하면 개략 알 수 있는 일본인의 수가 12016명이었다. 여기에 통계에 빠진 사람을 고려하면 31,030명 내지 33,000명의 일본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중 위생부문, 군공부문, 군수부문의 기술인원과 엔지니어가 가장 많았다. 구체적으로 각부서에 분포된 일본인은 위생부서에 7200명, 군공부서에 2000명, 군수부에 900명, 기타계통에 1500명이었다. 요녕성자료관에 의하면, 1949년 동북군공부에서 계속 쓴 기술인원이 186명인데, 그중 일본인이 103명으로 절반을 넘었다고 한다.

 

자다가도 전투에 대한 기억으로 깨곤 하다.

 

방문단은 상해로 들어와서, 탐방노선은 제4야전군이 남하하며 전투하던 곳이었다. 장사, 의창, 형문, 양양, 완릉등의 구전장터였다. 그후 다시 북상하여 동북의 백산흑수로 갔다.그곳은 당시 전투가 가장 치열하던 곳이다. 사평. 심양, 장춘, 돈화, 대련, 개원, 금주, 흑산.

 

중국과 수십년을 떨어져 있었던 일본적 전우들은 여전히 유려한 중국말을 구사했지만, 그들은 40년가까이 떨어져 있다보니 그들의 몸에서는 일본인의 함축, 내향과 예절을 차리는 절제가 묻어났다. 그래서 쉽게 중국인들과 구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 노병이 자기의 친정에 점차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몸에서는 당시 중국에서의 낙인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부대가 그들에게 일하게 하고 전투하게 하였던 제4야전군 10종야전의원2소 즉, 현재의 중국인민해방군 33의원을 방문하였다. 구성원 하나하나는 정중하게 준비해서 몸에는 예전의 훈장등을 달고 제복을 차려입고 정신을 일신하였다. 의원으로 걸어들어갈 때, 수백명의 흰 옷을 입은 의사, 간호사들이 손에 생화를 들고 환영했다. 열렬히 이들 옛 전우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했다. 방문단은 모두 눈에 눈물이 고였고, 몇명의 여단원들은 환영단중에서 옛 전우들의 품에 안겨서 통곡했다.

 

감정이 최고조에 이른 것은 부대의 전수근 군장, 궁영풍 정치위원이 주재한 환영연회석상에서였다. 당시 주객은 같이 술잔을 놓고 일어나서 격정적으로 눈물을 뿌리면서 당시 가장 잘 알려진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 <<해방구의 하늘은 밝은 하늘>>등을 불렀다. 복경신과 몇명의 여자단원들은 아예 일어나서 동북대앙가를 추었다.

 

대표단이 가장 슬퍼했던 곳은 흑산저격전열사기념능원이었다. 흑산저격전은 요심전투중 가장 핵심적인 전투였다. 그리고 그들 생애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잔혹한 전투였다. 그 때 2소는 3일밤낮으로 2000여명의 부상병을 치료했고, 많은 일본적 의사, 간호사들은 3일밤낮동안 눈을 붙이지 못하였으며, 식사도 수술대에서 하였다.

 

대표단중의 본간아자는 항상 미소를 띄고 행동거지가 우아했으며, 마치 탤런트나 대학교수같았다. 그녀는 당시 수술을 하는 외에 여러번 위중한 부상병을 위하여 수혈을 해서 '만능수혈자'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의원의 거의 모든 일본의사와 간호사는 모두 부상병에게 수혈했었다고 한다.

 

아자의 기억에 의하면 '그때는 삼일밤낮을 매일 앉으면 멍하였고, 피곤하여 거의 죽은 사람같았다. 팔이 떨어져나가고 다리가 없으며, 선혈이 난무했고, 생명이 위급한 부상병들을 보면, 급히 힘을 차려 생사지간을 헤메는 전우를 구하러 일어섰다" 수십년후, 이 일본적 노병과 그때 살아남은 노전우는 다시 이 무수한 전우들이 영원히 잠든 곳에서 다시 만나 얼싸안고 통곡을 하였다.

 

대표단의 노전우는 후배들에게 말하기를 흑산저격전만 생각하면 귀에는 아직도 총소리 대포소리가 웅웅거린다고 한다. 단장인 중촌의광은 "나는 평생 이 참혹한 전투장면을 잊을 수 없다. 자다가도 자주 잠을 깨곤 한다"

 

중촌의광과 "제4야전군회상회"

 

대표단중에서 필자에게 인상을 가장 깊게 심어준 사람은 중촌의광이었다. 그는 온화하고 소박한 노인이었는데, 중국에 있는 기간동안에 항상 정신이 충만했고, 한번도 그가 피로해하는 기색을 본 적이 없다. 대표단의 구성원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경력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중촌선생과 친해지면서 자주 통신으로 교류하게 되면서 점차 그의 경력을 이해하게 되었다. 1944년 3월, 중촌(나카무라)는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1945년 8월, 일본관동군 7352부대에 소위로 있을 때, 일본군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중촌은 10여명의 소련군에 투항하기를 원치 않는 일본병들과 길림 돈화로 도망쳐갔다. 거기서 일본군과 현지의 토비들이 합작한 무장부대에 몸을 맡겼다. 1946년 3월, "팔로군"(민주연군)이 현지에 진주했다. 이들 일본군들은 선택을 해야 했고, 교섭을 거쳐 무기를 내놓고 팔로군의 부대에 남았다. 

 

중촌은 의료는 알지 못해서 제4야전군 위생부서에서 오랫동안 회계업무를 맡았다. 전쟁중에 3번의 큰공과 3번의 작은 공을 세웠다. 이것은 일선작전부대에서도 보기 힘든 일이었다. 전국이 해방될 때, 중촌은 여전히 뛰어난 공으로 상급에서는 그를 입당시킬 것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후 중촌이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에 그 일은 없던 일로 되었다.

 

1949년, 대위였던 중촌은 함께 위생계통에서 일하던 근등청과 결혼한다. 당시 부대에서는 대령이상만 결혼이 허용되었는데, 의원에서는 대위엿던 중촌에게 파격적으로 결혼하도록 허락을 했던 것이다.

 

1954년 5월, 중촌 부부는 두 명의 중국에서 출생한 딸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현정부에서 공직을 맡아 생활을 안정시킨 후, 중촌은 힘이 닿는 한, 일본으로 돌아와서 생활이 불편한 옛 전우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1967년, 당시 귀국한 일본노병의 생활이 기본적으로 안정되었으나, 제4야전군시기에 형성된 전우애가 갈수록 강해졌다. 중촌은 먼저 일본각지에 흩어진 노전우들을 연락했고, "회상사야회"를 만들었다. 1970년 3월, 후지미야시에서 제1차 성립대회를 갖고, 매년 1번 일본각지를 돌아가며 개최했다.

 

'회상4야회"는 최초인원이 600여명이었으나 병이나 사망으로 현재는 120여명만 남았다. 1980년이후, 회원확인과 중국노전우의 소식을 보도하기 위하여, 중촌의광은 1년에 4번 '회상4야회보'를 발간했고, 긴밀히 옛 전우간의 유대를 유지했다.

 

"회상4야회보"는 회원의 활동과 전쟁의 기억을 기술할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핫이슈에 대한 의견도 개진했고, 특히 중일양국간의 우의에도 관심을 가졌다.

 

중촌의광은 "회상4야회"를 만든 것뿐아니라 중일우호회, 해방장장수급사무국을 조직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중국에 남은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하여왔다.

 

일본기관사는 모택동전용열차를 운전했다.

 

사야전사(四野戰史)가 처음으로 일본전우를 언급한 것은 1998년 10월 제1판의 <<중국인민해방군제4야전군전사>>였다. 제3장 제5절에 "군대후근(後勤)건설의 강화"라는 곳의 138쪽-141쪽에 제4야전군의 초기 동북에 진입했을 때 후근계통에서 일본적의 노동자, 일본적의 직원, 일본적의 의사, 간호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주해를 포함하여 모두 876자이다.

 

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의료업계의 사람이었다. 동복은 1946년에 내전이 발생하여 급히 의료인원이 필요하였는데, 당시 국공쌍방은 일본교민이송협정을 맺고 있었다. 나중에 발견한 것은 공산당측에서 이송보낸 일본교민중 적지 않은 수가 국민당군대에 남겨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동북민주연군도 대규모로 일본군을 남겨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민해방군제4야전군위생공작사>>에 의하면 당시 위생부문에서 공을 세워 상을 받은 자의 1/4은 일본인이었다.

 

제4야전군의 일본적 군인중 공로가 가장 현저한 사람은 일본관동군 제2항공군단 제4연성대대의 임미이랑(하야시)이었다. 이 관동군의 핵심부대는 집단으로 동북민주연군에 가입하였고, 비행기조종사 20명, 기계전문가 24명, 기계인원 72명 및 기타 지면보장업무인원 200명가까이였다. 이 일본적 병사를 핵심으로 한 동북항공학교는 중국공군의 요람이 되었다. 여기서 모두 비행사 160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23명은 개국대전의 열병에 참가했다. 당시 공군사령관 왕해, 공군부사령관 임호, 북경군구공군사령관 유옥제 및 미군의 유명한 비행사 데이비스를 격추시킨 장적혜등도 모두 여기서 배출했다.

 

사실상, 공산당이 동북에 진입한 후, 흡수한 일본교민이 전부 제4야전군을 따라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 일부분의 기술인원은 해방구에서 급히 중국각지로 분산되었다. 규모가 가장 큰 무리는 1950년 가을이었다. 800명의 일본철도기술인원 및 그 가족들은 감숙성 천수로 보내어졌고, 난주에서 천수까지의 철로건설에 투입되었다. 1951년 봄, 천란선이 정식으로 건설되었고, 1952년 10월 1일, 건국3주년때, 천란선은 8개월을 앞당겨 완공되었다. 천수에 도착한 일본적 철로기술인원은 천란선을 건설한 외에 일부는 란신(난주-신강)철로와 산서철로의 건설에도 보내어졌다.

 

일본적의 철로기술인원중, 가장 전설적인 색채를 지닌 사람은 제4야전군 29후방의원의 일본적 취사원 길강관이었다. 길강관은 이전에 기술이 뛰어난 열차기관사였다. 해방전쟁이 끝난 후, 길강관은 직업을 바꾸어 지방으로 가서 형양철로국에서 열차기관사를 했다. 1953년 모택동의 남순때, 길강은 상급에서 중요한 임무를 하달받는다. 바로 모택동이 북경으로 돌아갈 때, 장사에서 악양까지의 전용열차를 운행하는 것이었다. 길강관은 당시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도 그는 여전히 그 일을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영예로운 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청춘을 중국에서 불사른데 자부심을 갖는다.

 

중촌선생은 말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중국에 남은 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임시로 선택한 것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공산당에 대한 우려와 공포가 아직 불식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중촌은 중일혼합무장집단에 가입한 일본인들이 제4야전군에 흡수된 후 얼마되지 않아 한 일본인이 총살을 당했다. 공산당의 정책을 잘 몰랐던 중촌과 2명의 일본인은 도망쳤고, 곧 붙잡혀 왔다.

 

민주비판회에서 소박한 중국전우들은 그들을 반혁명으로 처결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의 위생부를 맡고 있던 이해(伊海)의 한 마디 말이 그들의 목숨을 살렸고, 중촌등의 일본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일본동지들은 나라가 다른 사람들이다. 인정, 풍속, 습관이 모두 다르다.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으면서 우리와 일을 하고, 생활한다. 약간의 오해만 있어도 그들은 불안해 한다. 그들을 질책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반성할 기회도 주어야 한다. 그들이 중국혁명을 위하여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때 남아서 신중국건설에 참여했던 일본적 군인들은 중촌처럼 자발적이지 않은 경우가 다수일 것이다. 천란선을 건설한 철로기술인원은 중국이 막 해방될 때, 귀국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심지어 연명으로 귀국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나중에 고정된 거주지가 결정되고 일본인자녀학교가 설립되자, 그들은 안심하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중국건설자의 일원이 되면서, 일본적 군인들의 감정은 중국의 전우들과 하나로 융합되었다. 천수철로건설에 참가한 일본적인사들도 귀국후 다음해에 "천수회"를 조직한다.

 

소목증박자라는 간호사의 기억에 의하면, 6.25가 발발하자 그녀가 소속된 부대는 호남에서 단동으로 갔다. 그러나, 일본적 전사들은 일률적으로 원부대소속지에서 명을 기다려 다른 지방으로 옮겨졌다. 14살에 제4야전군에 참가한 박자는 왜 그녀를 부대와 함께 이동하게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의 모든 귀국한 일본군인들의 기억속에는 해방군의 규율이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말한다. 중국인에게뿐아니라 일본매체에도 그렇게 말한다.

 

중촌의광은 지금도 아주 능숙하게 "3대규율, 8항주의"를 외운다. 그는 구일본군대도 유사한 규율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처럼 그렇게 정말로 지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본군대의 삼엄한 등급제도와 엄격한 체벌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써 공산당군대에 가입하여 아주 큰 차이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과 비슷하게 당시 대량의 일본인들은 해방군에 참전한 일이 일본에서도 적극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2002년, 중일수교3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NHK방송국은 <<남겨진 일본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인터뷰에서 당시 해방군의 병사들은 당시의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하여 거의 예외없이 "현재 나는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젊음을 중국에서 불사른 것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일생의 영향에 대하여 가장 대표적인 견해는 "남겨진 과정에서 나의 인생관이 형성되었다. 우리는 농민과 함께 했고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뛰어다녔다. 인민해방군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가르켰다. 우리의 머리속에 남겨진 것은 현재의 중국이 아니라 해방전쟁시기의 중국이다"

 

만일 일본노병들이 귀국한 후에 길고긴 중일간의 특수한 역사관계로 인하여 받은 억울함을 알지 못하면, 이들이 왜 중국에 대하여 그리 깊은 정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1990년 4월, 필자는 1차대표단과 함께하면서 아주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즉, 매번 참관이 끝나고 돌아오면 이들은 일찌기 불을 끄고 잠이 들었으며, 방은 함께 불이 꺼졌다. 그러면 초대소는 죽음처럼 적막감이 감돌았고, 아무런 오락활동도 없었다.

 

나중에 전우들과 얘기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귀국후 수십년간 형성된 습관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일본적인원이었으므로, 귀국후에도 일본경시청과 각종조직의 감시를 받았고, 어떤 사람들은 일자리를 못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상사나 동료의 배척도 받았다는 것이다.

 

중촌의광은 일본에서 30년간 중국말을 하지 않고, 중국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퇴직하기 전에 자원봉사로 중국의 일본고아구조활동을 할 때, 유려한 중국어와 잘쓴 한자를 보고는 후생성의 관리들이 깜짝 놀랐었다고 한다.

 

소목증박자는 28세에 귀국하자, 첫째날에 5명의 경찰이 와서 그녀가 해방군내에서 강간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박자는 분노하여 대답했었다 "해방군은 일본군과 다르다. 그들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주은래의 발언의 배후가 사실대로 공개되다.

 

제4야전군의 일본적 병사들은 모두 중국해방기념장을 받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각종 군공훈장도 받았다. 귀국때, 중국정부는 당시 일본정부가 미군의 중국에 대한 태도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알고 있어, 이들 일본전우가 귀국후 취업, 생계문제에 문제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서 중국해방기념장, 군공훈장을 모두 회수했고, 나중에 조건이 허락하고, 환경이 좋아지면 이 훈장을 되돌려주겠다고 했다.

 

1972년 9월 30일 중일수교정상화의 그날, 중촌의광은 주은래총리에 서신을 썼다. 그리고 그 훈장을 다시 내려주기를 요청했다. 그는 서신에서 "돌연 총리동지에 서신을 쓰는 결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1972년 9월 29일, 그날은 우리 1953년 5월 12일 상해에서 무학항으로 귀국한 날로부터 19년을 기다려오던 중일수교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후, 19년동안 계속 차별받는 생황중에서 이제는 해방되었고, 심지어 더욱 광명의 생활을 기대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을 떠날 때, 중국정부는 일찌기 우리에게 발급했던 동북, 화북, 화중, 서남(및 개별적으로는 서북, 해남도)등의 해방기념장을 회수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지금 약속에 따라, 이 기념장을 다시 우리 동지들에게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념장은 우리가 중국혁명을 위하여 헌신한 청춘에 대한 훈장입니다. 우리는 절대 특권이나 양로금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우리의 자손들에게 우리가 일찌기 중국에서 일했었고, 위대한 혁명의 일부분에 참여자라는 사실을 얘기하면서 최대의 자랑으로 삼고 싶습니다"

 

첫번째 서신이 보내어진 후, 중촌과 전우들은 다시 9년간의 반복된 신청과 요청을 하였다. 중국측에서는 신중히 연구한 후 당시 회수하였던 기념장과 훈장을 재발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문혁의 동란을 거치면서, 많은 단위가 보존하던 훈장은 이미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측면의 노력을 거쳐, 원래대로 제작한 수천매를 일본전우들에게 다시 발급하였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와 열망을 만족시켰다.

 

제작이 완성된 후, 두 상자는 당년 중국공군의 요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던 원 제4야전군 동북항공학교 교관인 <<항칠회>>회장 임미일랑(하야시)가 비행기로 일본으로 가져갔고, 두 상자는 배로 일본의 "회상4야회" 사무국 국장인 중촌의광에게 보내졌다. 이후 "회상4야회"는 중국해방기념장수급사무국을 만들었다. 중촌의장은 수급국장을 맡았다. 아주 열심히 조사하고 등기회원을 찾고 조사하여 심사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병으로 사망하거나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은 제외하고 모두 1560명의 일본전우가 이 장상을 새로 받았다.

 

1982년 5월 25일, 일본 기산회관의 "회상4야회" 모임에서, 이 반백이 넘은 노인들의 몸에 정장을 하고, 오랫동안 몸에서 떼어놓았던 각종 해방기념장을 착용했고, 더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과 영예를 느꼈다. 이것은 그들의 인생중에 잊을 수 없는 경력이며 영광이었다.

 

1970년대에 중일수교가 이루어진 후, 해방전쟁에 참전했던 일본전우들은 이미 늙은이가 되었다. 그들은 중국을 그리워하고 중국인민해방군을 그리워했다. 특히 제4야전군에서 보낸 나날들을 그리워했다. 그들은 일본에서 "중일우호화평회" "회상사야회" "항칠회" "낙양전우회" "계공산전우회" "장성호우회"등 십여개의 중일우호조직을 만들어, 중일우호활동에 종사했다.

 

1990년이래로 중촌의광을 위시한 "회상사야회"는 4차에 걸쳐 귀국활동을 벌였고, 1998년 중국국방부장 츠하오텐이 이끄는 군사대표단의 방일때, 특히 "회상사야회"의 회장 중촌의광등을 중국대사관에 초청했었다.

 

일본적 군인들이 해방군에 참전한 것은 거의 잊혀진 역사였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오늘날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주은래 총리가 말했던 그 배후의 역사를 이제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