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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305

명나라때의 "왜구(倭寇)"는 일본인이었을까? 글: 조대부(趙大夫)​왜환(倭患)의 근원​대다수의 연구에 따르면, 명나라때 창궐했던 왜구는 당시의 "해금(海禁)"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명나라가 건립된 후, 엄격한 "해금정책"을 실행한다. 정부와 해외국가간에 조공무역관계를 유지하는 외에 나머지 민간해상무역은 일률적으로 금지되었다. 명태조 주원장의 홍무(洪武)시기에 여러번 명을 내린다: "바다에 인접한 백성들이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 "바다에 인접한 백성이 사사로이 해외 여러 나라와 통상하는 것을 금지한다." "인민이 마음대로 바다로 나아가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한다." 명성조 영락(永樂)시기에 약간 느슨해지는 했지만, 여전히 "해금"정책은 위배할 수 없는 '조훈(祖訓)'이었다.​그후, "해금"정책은 조이기도 하고 느슨해지기도 .. 2024. 7. 26.
진실한 이릉지전(夷陵之戰): 유비는 겨우 5만을 거느렸고, 제갈량은 주변인물에 불과했다. 글: 역사전쟁(歷史戰爭)​이릉지전은 삼국시대 "3대전투"중 마지막 전투이다. 는 이릉지전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했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관우의 피살로 인하여, 제갈량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분개하여 70만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육손에게 화소연영(火燒連營)당하며 전군이 몰살당한다. 육손은 오군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제갈량의 팔진도에 격퇴당하고, 촉군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연의에서는 이릉지전을 아주 재미있게 묘사했다. 그 변화무쌍하고 곡절이 많은 스토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역사상 진실한 이릉지전은 도대체 어떠했을까?​이릉지전의 원인​연의에서는 유비가 온 나라의 힘을 모아서 동오를 공격한 원인에 대하여 동오가 관우를 죽였기 때문에 유비는 의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2024. 7. 26.
"남경조약(南京條約)": 굴욕인가 외교승리인가? 글: 양금린(楊錦麟)​1840년이래, 중국인은 눈물나는 탐색을 시작했다. 미망(迷茫)과 배회(徘徊) 속에서 항쟁, 학습, 융합, 개혁과 개량을 진행했다. 외부열강세력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내부정치투쟁이 끊이지 않고, 내외부의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양무운동이 시작되고, 새로운 지식인층이 성장하기 시작하고, 민중의 인식수준도 제고되고, 공업도 발전되었다. 여러가지 추진요소들이 합쳐지고 모이면서 변화는 계속되었다.​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열강들의 교주만(膠州灣), 광주만(廣州灣)등의 조차는 중국인들을 자극했고, 이는 근대중국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러한 커다란 치욕은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놀라고 난 이후에는 회의, 방황, 곤혹과 분노를 느낀다. 이건 민족정신의 대각.. 2024. 7. 23.
"만주(滿洲)" (3): 민족혁명 배경하의 "배만(排滿)"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3​의 체결과 더불어, "중화민족은 가장 위험한 시기가 도래했다" 내우외환의 곤경에 혁명당인들은 보편적으로 폭력혁명만이 철저히 청나라 통치를 전복시키고,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런 시대적 배경하에서, 그들은 "구제달로(驅除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의 구호를 외칠 뿐아니라, 사상등 분야에서 일련의 "배만(排滿)" 작업을 하게 된다. ​첫째, "만주는 중국이 아니다"라는 점을 논증하다.​청나라 통치를 전복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혁명당인들은 '만주인'들이 국가와 민족에 끼친 악랄한 죄악을 상세하게 드러낼 뿐아니라,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예를 들면, 추용(鄒容)은 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무릇 사람이 자신의 종족을 좋아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으로.. 2024. 7. 22.
"만주(滿洲)" (2) : 17세기 서양인들이 본 '만주족'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2​17세기에 들어선 이후, "만주굴기"와 명청왕조교체를 위시한 일련의 동아시아사건은 유럽각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이런 배경하에서 중국에 와 있던 유럽선교사들은 자신의 견문을 종합하여, "만주굴기"와 관련돤 저작을 적지 않게 남겼고,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왔다.​서양인이 그린 아담샬과 순치​첫째, 만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17세기 이전까지 유럽선교사들의 글에 나오는 "타타르인(韃靼人)"은 주로 장성 이북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수시로 명나라변경을 침범한 몽골인을 가리켰다. 오랫동안 백산흑수(장백산, 흑룡강)에 거주해오고 있던 여진인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예를 들어,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저술에는 거의.. 2024. 7. 22.
"만주(滿洲)"(1) : 만주의 유래와 뜻은?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미국학자 엘리엇(Mark C. Elliott)는 이라는 저서를 통해 만주족의 민족특성을 '만주의 길(The Manchus Way)'로 설명했다.소위 "만주의 길"은 만주 최초의 생활방식이다. 또한 중국역사상 이민족왕조의 방식과 비교하자면, 요, 금, 원과 다른 방식이다. 기본요소는 마술(馬術), 궁술(弓術), 만주문자와 소박한 풍속이다.​이는 모두 청나라조정이 강조한 것이고, 만주인의 만주화를 강화한 것이다. 어떤 때에는 다른 약간의 특징도 있다. 예를 들어, 조상을 공경하고, 황제에 충성하는 것을 '용감한 품성'이라고 보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성명과 복식도 있다.​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무엇이 "만주"인가? 글자 자체로 볼 때 "만주"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내포.. 2024. 7. 22.
아편전쟁(鴉片戰爭): 하나의 신화 글: 고천활해(高天闊海)​영국의 역사학자 Julia Lovell(중문명 藍詩玲)이 쓴 "The Opium War: Drugs, Dreams and the Making of China"(아편전쟁: 마약, 꿈 그리고 중국만들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편전쟁은 중국의 "founding myth(건국신화)"중 하나라고.​아편전쟁은 중국인에게 있어서 의미가 아주 크다. 중국의 가련한 역사교육 속에서, 정부는 이데올로기라는 볼록거울을 통하여 아편전쟁을 엉망진창으로 고쳐썼고 서방국가에 대한 민족원한을 선동하며, 중공통치를 보호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중국은 역사허무주의를 이용하여 고쳐쓴 중국역사에서 아편전쟁은 중국근대사의 시작이며, 소위 "중화민족백년굴욕"의 기점이 된다.​줄리아 로벨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2024. 7. 20.
"강남노변(江南奴變)": 서하객(徐霞客) 일가멸문사건의 배후 글: 해우강사(海佑講史)​저명한 여행가, 문학가인 서하객(徐霞客)은 명나라 숭정14년(1641년) 사망한다. 향년 54세였다. 서하객이 살아 있을 때, 이미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일이 있다. 그가 죽은후 4년만에, 즉 남명 홍광원년(1645년) 서하객의 일가 20여명이 모조리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서씨일가멸문사건"은 강소, 절강지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번 멸문사건의 흉수가 놀랍게도 서씨집안의 노비들이라는 것이다. 서씨집안은 노비들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원인으로 평소에 공손하던 노비들이, 주인집안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러 모조리 죽이고 멸문시키게 되었을까?​잔혹한 사건의 배후에는 명청교체기에 강남에서 대.. 2024. 7. 19.
“왜(倭)": 일본인들은 이 칭호를 어떻게 보았을까? 글: 옥미수(玉米穗)​"왜(倭)"는 옛날 중국에서 일본을 부르던 명칭이다. 에는 이 있고, 에도 왜인(倭人)에 관한 기술이 있다. 왜인은 바로 옛날의 일본인이다. 현재의 중국인은 "왜"라는 글자에 대하여 대체로 약간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왜"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명나라때의 "왜구(倭寇)"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키는 작지만 무예는 뛰어나며 흉악하고 악독한 일본낭인이 중국의 연해지구를 돌아다니면서 살인약탈방화를 저지른다. 왜구를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척계광(戚繼光)과 척가군(戚家軍)이다.​현재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왜"라는 명칭으로 일본 혹은 일본인을 부르지 않는다. 가끔 그렇게 부르면 멸시의 의미를 담고 있을 때이다. 마치 "일본"의 앞에 "소"자를 추가하여 ".. 2024. 7. 4.
최강의 "조가인(赵家人)": 조동(赵东), 조래(赵来), 조덕(赵德), 조회(赵怀) 글: 조대부(赵大夫)​"조가인"이라는 말은 이미 유행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권력귀족과 그 직계친족을 공격할 때 사용하고 있다. 우리들 백가성의 첫번째에 위치한 조씨집안의 후인들은 얼굴이 뜨거워지고, 미안해지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억울해 죽을 지경이다!​"조가인"이라는 말의 기원​"조가인"이라는 단어는 대륙인터넷의 유행어이다. 널리 체제내의 고위관료, 기관내의 고위층 및 그 가족들, 체제와 관계가 밀접한 기업가, 부호, 예술가 및 그 가족들을 가리킨다. 다만 평상시에는 홍색권력귀족계층을 주로 가리킨다.​알려진 바에 따르면, 2015년 12월, ​万科)바오능(宝能)분쟁: 문앞의 야만인, 문뒤의 조가인>이라는 글이 바로.. 2024.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