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록산(安禄山)의 부하들 중에는 한인(汉人)이 많았을까, 호인(胡人)이 많았을까?
글: 일국지군(一国之君)안록산은 혼자서 범양(范阳), 평로(平卢), 하동(河东)의 삼진절도사(三镇节度使)를 맡았고, 3진의 병력을 모두 합치면 18.4만명에 이르렀다. 이는 안록산이 당나라조정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기반이다. 안록산, 사사명(史思明) 두 사람은 소그드 호인(粟特胡人)이다. 즉 중국사서에서 말하는 "소무구성(昭武九姓)"이다. 이들은 처음에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살았다. 나중에 흉노(匈奴)가 굴기하자, 하서(河西)를 정복하며 월지인(月氏人)을 쫓아낸다.구성(九姓)은 각각 강(康), 안(安), 조(曹), 석(石), 미(米), 하)-(何), 화심(火寻), 무지(戊地), 사(史)이다. 소무구성은 바로 월지인이다. 흉노에 패배한 후, 소무구성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일부는 서역(西..
2024. 5. 16.
당나라이후 장안을 왕조의 수도로 삼지 않은 이유는?
글: 청수(清水) 진, 한, 당의 휘황찬란한 역사는 모두 수도를 관중지구에 두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통일왕조는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더 이상 어느 왕조도 관중을 수도로 삼거나, 관중을 기반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북송도 낙양으로 천도할 생각은 하였지만, 장안으로 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주원장도 관중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시의 관중지구는 이미 너무 파괴되어 할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관중지구의 쇠퇴원인은 여러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인 점도 있고, 정치적인 점도 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제중심의 이전이다. 특히 대운하가 개통되어 남북경제가 연결된 후, 관중의 경제적지위는 점차 저하된..
2024.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