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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1339

시중쉰(習仲勛)이 말년에 12년간 선전(深圳)에 거주한 내막은...? 글: 왕우군(王友群)​2023년 10월 15일은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의 탄생110주년 기념일이다. 중국대륙에서는 여러 기념활동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시중쉰이 말년에 왜 12년간 선전에 거주했는지라는 이슈를 다뤄보기로 한다.​시중쉰은 중공의 제1대, 제2대 집단지도성원이다. 모택동이 집권했을 때, 시중쉰의 관직은 국무원부총리 겸 국무원 비서장이었다. 등소평이 집권했을 때, 시중쉰의 관직은 중공정치국위원, 전인대 부위원장이었다.​1988년 4월, 시중쉰은 제7대 전인대 부위원장이 된다. 그러나 그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퇴임'한다.​시중쉰이 선전으로 유배당하다.​전 전임대 법률공작위원회 연구실주임이었떤 가오카이(高鍇)의 회고에 따르면, 1990년 10월 30일, 시중쉰은 마지막으로 전인대 상무위원.. 2024. 7. 24.
안수(晏殊): 북송신동, 15세에 과거급제하고 나중에 재상이 되다.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15살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많은 사람은 아마도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송때 이 나이에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된 사람이 있다. 북송의 과거는 비록 합격자수를 늘였지만, 내용은 극히 복잡했다. 시(詩), 부(賦), 론(論)을 각각 하나씩 써야 하고, 대책오도(對策五道)도 있다. 성년도 십여년이상 힘들게 공부해야 겨우 합격할 수 있다. 그런데 15살짜리 소년이 일거에 합격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럼 이 북송의 신동은 누구였을까?​신동중거(神童中擧)​그의 이름은 안수(晏殊)이고, 자는 동숙(同叔)이며, 무주임천(撫州臨川, 지금의 강서성 남창) 사람이다. 안수는 천부적인 재질이 뛰어났다. 7살때 아주 멋질 글을 쓸 수 있었으.. 2024. 7. 23.
당나라의 도고(道姑)에 관하여 글: 기억군도(記憶群島)​당나라때의 4대여시인(女詩人)인 이야(李冶), 설도(薛濤), 어현기(魚玄機), 유채춘(劉采春)중에서 앞의 3명은 모두 도고(道姑)이다. 당나라의 근 200명공주중에서 고양공주(高陽公主), 태평공주(太平公主), 화양공주(華陽公主), 안강공주(安康公主)를 포함한 15명이 도고로 지낸 적이 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에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무릇 천하의 도관(道觀)은 모두 1,687개소인데, 1,137개소는 도사(道士)이고, 550개소는 여도사(女道士)이다." 비록 이 숫자가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당나라때 도고가 엄청난 수량으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정도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도교(道敎)는 중국의 전통종교이고, 한(漢)나라때부터 생겨났으며, 당(唐)나라때 전성기.. 2024. 7. 15.
리위안차오(李源潮)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글: 채신곤(蔡愼坤)​18대에 만일 쌍리(雙李, 리커창과 리위안차오)가 승계하였더라면,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경제시장화는 아마도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17대이전에 리커창(李克强), 리위안차오, 시진핑(習近平)은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 있었다. 단지 최종적으로 장쩌민, 쩡칭홍이 시진핑을 선택했고, 리위안차오는 18대에 정치국상위에도 들어가지 모사고,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국가부주석을 1기 지내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린다. 19대이전에, 당내에서는 리위안차오가 "기꺼이 은퇴방안을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돌았고, 19기 1중전회가 폐막하기 전에 중앙판공청은 그에게 이렇게 통지한다. 당중앙은 그가 은퇴이후 생활지로 난징 혹은 상하이를 선택하겠다는 청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리위안차오는 할 수없이 베이징에서 은퇴후 생.. 2024. 7. 8.
한경제(漢景帝)는 왜 황태자 유영(劉榮)을 폐위시켰을까? 글: 이대규(李大奎)​서한(西漢)왕조의 황위계승은 대체로 "입적불립서(立嫡不立庶), 입장불립유(立長不立幼)"(적자를 세우고 서자를 세우지 않는다. 장자를 세우고 유자를 세우지 않는다)의 원칙을 유지했다. 이는 중국고대에 명확히 규정된 적장자승계제도이다.​예를 들어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황후 여치(呂雉) 사이의 적자이다. 유비(劉肥)는 비록 장자이지만 서출이어서 번왕에 책봉되는데 그쳤다. 유방의 서사자(庶四子) 유항(劉恒)이 나중에 유명한 한문제(漢文帝)가 되는데, 이는 완전히 특수한 상황하에서 군공집단의 옹립으로 "형종제급(兄終弟及)"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그러나, 한경제에 이르러 다시 한번 특수한 상황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한경제의 박황후(薄皇后)에게는 아.. 2024. 7. 5.
유교(刘交): 유방(刘邦)의 유일한 동생 글: 감당(甘棠)​유방의 부친 유태공(刘太公)에게는 모두 네 명의 아들, 한 명의 딸이 있었다. 그중 유방은 동생 유교와 가장 사이가 좋았다.​유태공은 모두 두 명의 처를 취했는데, 그중 장남 유백(刘伯), 차남 유중(刘仲)은 첫째부인 소생이고, 삼남 유방과 막내아들 유교는 재혼한 부인의 소생이다. ​네 명의 아들을 살펴보면 장남은 요절했고, 차남은 착실하며, 삼남은 무뢰한이고, 막내가 가장 뛰어났다. ​그렇다. 그 당시 유방의 행위나 처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다. 하루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가진 것도 없이 그저 매일 허풍이나 떨었다.​그래서, 처음에 유씨집안에서 가장 기대를 건 것은 막내 유교였다.​유교를 공부시키기 위해 전문적으로 스승을 찾아가 공부하게 한다. 원래 그는 유학자가.. 2024. 7. 1.
동문병(董文炳): 쿠빌라이가 형님으로 부른 한족... 글: 자귤(紫橘)​고등학교 교과서에 따르면 원나라는 4등인제도(四等人制度)를 실행했다. 그러나 실제상 이 4등인이 각족의 고위층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고, 이는 일반인에 대한 제한이었다. 그리고 이 사등인제가 정식의 제도였는지 아닌지에 대하여도 의문이 있다. 1등인인 몽골인의 하층은 모두 착취를 당했고, 그들도 원나라에 원한을 가졌다. 그래서 명나라초기의 삼천영(三千营), 대내()의 등양사위(腾骧四卫)는 모두 몽골인이었고, 매번 초원을 토벌할 때 그들이 가장 앞장섰다. 마찬가지로 3등인 한인의 고위층도 호화사치스럽게 살았고, 원나라황제의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쿠빌라이가 '동대가(董大哥, 대가는 큰형님이라는 의미임)'로 부른 동문병이다.​농민에서 관료로​동문병의 동씨집안.. 2024. 6. 20.
한선제(汉宣帝) 유순(刘询): 중국역사상 최초로 감옥에 갇혔던 황제 글: 조심방(赵心放) 한선제 유순은 서한 중기의 ‘중흥’군주이다. 그는 친정후 관료사회를 정돈하고, 세금을 경감하며, 처벌을 감경했으며, 효과적으로 생산을 발전시켰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대내적으로는 한무제 말기의 사회경제가 쇠락한 국면을 되살려냈고, 대외적으로 한왕조와 주변각족과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한소제, 한선제 시기에 사회가 안정되고, 국세가 흥성한 것을 두고 이 시기를 후대인들은 “소선중흥(昭宣中兴)”이라 부른다.​1. 역사상 최초로 감옥에 갇혔던 황제​유순은 한무제(汉武帝) 유철(刘彻)의 증손자이고, 위태자(卫太子) 유거(刘据)의 손자이다. 유거는 고혹지화(蛊惑之祸)를 당해 일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한다. 성문에 불이 나면 그 재앙은 연못의 물고기에도 미치는 법이다. 태어난지 수개월밖에 되지.. 2024. 6. 12.
조자양(赵紫阳, 자오쯔양)은 왜 권력투쟁에서 실패했는가? 글: 왕단(王丹)​올해는 "6.4" 35주년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면, 여하한 회고나 반성도 모두 별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6.4"사건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35년전에 발생했던 많은 일들은 우리가 오늘날의 중국정치를 정확하게 판단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중요하고 신선한 참고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조자양은 왜 권력투쟁에서 실패했을까.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이 문제에 대하여, 과거 35년간, "6.4"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다. 주로 다음의 두 가지이다:​첫째, 조자양은 학생운동초기의 중요한 시기에 베이징에 남아서 국면을 주재하지 않고, 오히려 원래의 일정에 따라 북한을 국사방문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2024. 6. 3.
주순수(朱舜水):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끼친 "명나라유민(明的遗民)" 글: 자귤(紫橘)주순수가 일본에서 학문을 가르친 곳노신은 그의 藤野先生)>에서 일본의 중국인 주순수(朱舜水)를 언급하면서, 그를 "명나라의 유민(明的遗民)"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일본 이바라기현(茨城县, 역사상의 미토번(水户藩))에는 주순수의 동상이 있다. 일본에 망명한 중국인이 어떻게 하여 이렇게 큰 영향력을 지니고,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기념하고 있을까? 그것은 주순수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维新)의 씨를 뿌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주순수의 원래 이름은 주지유(朱之瑜)로, 절강여요(浙江余姚)사람이고 명나라말기 5대학자중 한명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 스스로의 호를 '순수(舜水)'라 하였는데, 이는 고향의 강을 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숭정11년(1638년), 주순수는 문무가 모두 뛰어.. 2024.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