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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1327

미방(糜芳)은 왜 싸우지도 않고 오(吴)에 투항했을까? 글: 지도제(地图帝)​219년, 관우(关羽)가 양양(襄阳), 번성(樊城) 및 한수(汉水) 일선에서 조인(曹仁), 서황(徐晃)과 대치하고 있을 때, 동오는 돌연 형주의 공안(公安), 강릉(江陵)을 기습한다.​동오쪽에서 여몽(吕蒙)은 이만여 인마를 거느리고 육구(陆口)에 주둔하여 관우의 절반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몇해동안 손권(孙权)과 여몽은 계속하여 관우에게 암중으로 수를 쓰고 있었다.​손권은 유비(刘备)와 관우를 이간질하기 위해 사람을 강릉으로 보내어, 관우에게 정략결혼을 제안한다. 즉 손권의 아들이 관우의 딸을 취하겠다고 한 것이다.​유비는 일찌기 손권의 여동생 손씨를 취한 바 있고, 나중에 손부인은 동오로 도망쳐 돌아간다. 그리하여 유비와 손권간의 정략결혼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만일 관우의 딸이 .. 2024. 5. 10.
우문화급(宇文化及): 수양제(隋炀帝)를 죽인 인물의 일생 글: 사설신어(史说新语)​고대에 황권은 지고무상으로 황제는 천하의 최고통치자일뿐아니라,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는 무수한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은 황위를 차지하기를 꿈속에서까지 추구하고, 심지어 목숨을 댓가로 내놓기도 한다. 모든 왕조에서는 황위를 둘러싼 명쟁암투가 벌어지고, 형제간에 반목하고, 부자간이 원수로 되는 비극이 무수히 발생했다.​풍운이 일어나는 궁정에서, 이런 인물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황제의 곁을 지켰고, 황제의 신뢰를 깊이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내심의 욕망은 계속 팽창했다. 그는 더 이상 단지 황제의 신하로 지내는데 만족하지 못했고, 더 많은 권력과 지위를 갖기를 갈망했다.​마침내, 어느 어두운 밤, 그는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계획을 실행한다. 그.. 2024. 5. 3.
차이치(蔡奇): 중추를 장악했지만, 이빨없는 호랑이이다. 글: 호해(胡亥)​해외매체에서는 차이치를 "창위독공(厂卫督公)"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동창(东厂)의 우두머리라는 것인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동창은 명나라때의 정보기구이고, 특무조직이며, 조정의 응견(鹰犬)이다. 차이치는 동창을 주관할 뿐아니라, 동시에 천하의 온갖 일을 관리감독하며, 중공의 일상사무도 처리한다. 그렇다면 '창공(厂公)'이 아니다. 오히려 사례병필태감(司礼监秉笔太监)에 가깝다. 황상을 도와 세상만물을 처리하며 재상의 권한을 대행하는 직위인.​저명한 중국문제전문가인 가오신(高新) 교수는 일찌기 아시아자유논단에 글을 올려, 시진핑이 왜 차이치를 신임하는지를 기술했다. 그는 푸젠(​福建)에서 저장(浙江) 그리고 다시 베이징(北京)까지 20여년에 걸친 "사적인 우정"외에 더욱 중요한.. 2024. 4. 29.
원소(袁绍) 휘하의 팔대맹장(八大猛将) 글: 사서능헌각(史书凌轩阁)​8. 순우경(淳于琼)​순우경. 자는 중간(仲简)이고, 영천(颍川)이다. 순우경은 성격이 강맹하고 뜻이 커서 조정으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일찌기 효렴방정으로 서원팔교위(西园八校尉)가 되어 조정의 귀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때의 순우경은 젊어서 성취를 거두고 큰 권력을 장악했으며, 명성도 드높았다.​순우경은 조조와 교분이 깊었다. 두 사람은 항상 함께 모였으며, 집안에서 웃으면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교외에서 활쏘기를 함께 하기도 했다. 이는 모두 두 사람 간에는 깊은 우정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시국이 바뀌면서 동한의 난세가 펼쳐지고, 순우경은 점차 몰락한다. 그는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조정은 그런 그를 싫어했고, 황제의 총애를 잃는다. 그러나, 조조는 .. 2024. 4. 25.
구야자(欧冶子)의 검제작과 관련한 어두운 생각...... 글: 산학(散鹤) ​ 구야자는 춘추시대 월(越)나라사람으로, 검을 주조하는데 뛰어나서, 후세인들은 그를 "검조( 剑祖)"로 칭한다. 월왕 구천(勾践)은 그에게 5자루의 검을 만들어달라고 청하게 된다. 그 검들의 명칭은 각각 담로(​湛庐), 순균(纯钧), 승사(胜邪), 어장(鱼肠), 거궐(巨阙)인데, 모두 쇠를 벨 수 있는 희세의 보검이었다. ​ 그러나, 그의 뛰어난 기술은 후세에 전승되지 못했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구야자 주검(铸剑)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 "전설에 따르면, 고대의 병기대가 구야자는 나이가 들어서 곤륜현철(昆仑玄铁)을 한덩어리 얻는다. 원래 이미 노년에 접어든 그는 이런 특수한 재료를 사용하여 인생최후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임종때까지 .. 2024. 4. 19.
위가씨(魏佳氏): 그녀는 어떻게 일개 궁녀에서 황후에 올랐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 위가씨(魏佳氏), 만주 상황기(鑲黃旗) 사람이다(원래는 만주 정황기(正黃旗)의 포의(包衣)이다). 그녀는 건륭제(乾隆帝)의 셋째 황후이고, 가경제(嘉慶帝)의 생모이며, 내관영(內管領) 위청태(魏淸泰)의 딸이다. ​ 건륭10년(1745년), 그녀는 위귀인(魏貴人)에 봉해지며, 같은 해에 영빈(令嬪)으로 승진한다; 건륭13년(1748년), 에는 영비(令妃)로 승진하고, 건륭24년(1759년) 영귀비(令貴妃)로 승진한다; 건륭25년(1760년)에 황십오자(皇十五子) 영염(永琰, 즉 나중의 가경제)을 낳는다. 건륭30년(1765년), 황귀비(皇貴妃)로 승진하고, 건륭38년(1773년) 겨울, 황귀비의 아들인 황십오자 영염이 건륭황제에 의해 비밀입저(秘密立儲)된.. 2024. 2. 26.
조위(曹魏) 7명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 동한말기, 유주(幽州)는 자주 등장하는 지방이다. 처음에 유우(劉虞)라는 한나라 황실후예가 유주목(幽州牧)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부하인 공손찬(公孫贊)의 실력이 강화되면서, 결국 유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당연히 공손찬도 다시 원소(袁紹)에게 소멸된다. 207년, 조위는 원소집단을 철저히 소멸시키고, 유주는 결국 조위의 강역이 된다. 아래에서는 조위시대 7명의 유주자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 제1대: 최림(崔林) ​ 최림은 청하최씨(淸河崔氏)출신으로 양수(楊修),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등 조위대신들과 마찬가지로 대대로 이어내려오는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조가 기주(冀州)를 평정할 때, 최림이 기용되어, 기주별가(冀州別駕), 승상연속(丞相掾屬)이 된다. .. 2024. 2. 23.
석중귀(石重貴): 오대(五代) 후진(後晋)의 마지막황제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 북송 개보(開寶) 6년(973년) 삼월, 방주(房州)에서 정왕(鄭王) 시종훈(柴宗訓)이 병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시종훈은 후주(後周)의 마지막 황제이다. 그는 비록 오대시기의 마지막 황제이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오대시기 황제는 아니었다. 요원한 북방에 일찌기 군림천하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974년에 병사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바로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오대의 황제였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고, 20여년간이나 포로로 지내야 했을까? ​ 난세에 황제에 오르다. ​ 그는 바로 후진의 마지막 황제인 석중귀이다. 석중귀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숙부인 석경당(石敬瑭)에 의해 길러진다. 소년시기에 석중귀는 말이 적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며, 질박하고 순후했다. 그.. 2024. 2. 20.
한명제(漢明帝)의 다섯째 아들인 유달(劉炟)은 어떻게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을까? 글: 이대규(李大奎) ​ 동한(東漢)왕조에는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마황후, 등황후, 염황후, 양황후는 모두 자식을 두지 못했고, 책봉된 황태자는 많은 경우 폐출되었다. 예를 들어, 동해왕(東海王) 유강(劉疆), 청하왕(淸河王 劉慶), 제음왕(濟陰王) 유보(劉保)등. 그리하여, 번왕이나 그 후손들이 여러가지 기연이 합쳐지면서 황위를 계승하는 일도 벌어졌다. ​ 한명제(漢明帝), 유장(劉莊)과 가귀인(賈貴人) 사이에 태어난 다섯째 아들 유달(劉炟)도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는 어떻게 황위를 승계할 수 있었고, 역사에 위업을 남길 수 있었을까? ​ 유달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황후가 맡아기르다. ​ 기원56년에 출생한 황자 유달은 적출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4명의 형이.. 2024. 1. 30.
촉한(蜀汉) 후기에 인재가 없게 된 근본 이유는...? 글: 역사대작회(历史大炸烩) 촉중무대장(蜀中无大将) 요화충선봉(廖化充先锋) 촉은 왜 후기에 인재가 결핍되었을까? 촉은 삼국정립시기 비교적 특수한 정권이었다. 유비는 당시 18로제후들 중에서 명성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고, 어떻게 보더라도 조역이었으며, 언제든지 원소나 황건적에게 소멸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똑똑해지고, 살아남은 자가 왕이 되는 법이다. 손권, 조조등 세력이 강력한 자들을 모두 제거한 후, 귀퉁이에서 발전하고 있던 유비도 마침내 세력을 이루게 된다. 촉한의 굴기는 유비가 남의 것을 훔쳐서 이룬 것이다. 동시에 유비는 스스로 유황숙으로 칭하면서,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유일한 정통혈맥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인재들이 그에게 의탁하게 되었.. 2024.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