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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1360

시진핑이 중앙경위국장(中央警衛局長)을 4차례 교체한 내막은? 글: 정효농(程曉農)​해외에서 중국고위층의 정치적미래의 변화에 대하여 얘기할 때, 정변이라는 단어가 출현하는 빈도가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시진핑의 주위에서 정변이 발생할지여부에 대하여 추측하기도 한다. 다만, 왕왕 이런 추측시 왕왕 정변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브레이크'가 걸리게 된다. 도대체 중공내에서 어떻게 해야 정변이 발생할 수 있을까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본문은 중공정권이 건립된 이래의 정변을 살펴보기로 한다. 중공내부에서 정변이 발생한 것은 실제 사례가 있다. 정변의 성패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기실 아주 간단하다. 즉, 누가 '총을 잡고 있느냐'이다. ​시진핑 취임전 저우용캉(周永康)의 정변미수​최근에 일어난 중공고위층의 권력충돌은 2012년 3월 19일이다. 그때 시진핑은 아직 총서기에 .. 2024. 7. 24.
당태종이 즉위후에 살해한 6명의 개국공신 글: 정회역사(情懷歷史)​무덕9년 육월초나흘(626년 7월 2일), 이세민(李世民)은 "현무문지변(玄武門之變)"을 일으켜 태자(太子) 이건성(李建成)과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을 죽이고 황태자에 책봉된다.팔월초아흐레,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퇴위하고, 이세민이 황제로 등극하며,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고친다. 비록 역사상,이세민은 대기회굉(大氣恢宏)의 군주이지만, 그는 즉위후 6명의 개국공신들을 죽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는가?​후군집(侯君集)​후군집은 어려서 이세민을 따랐다. 무덕9년(626년), 후군집은 현무문지변에 참가하고, 장손무기(長孫无忌)등 5명과 함께 논공행상에서 1등을 차지한다. 정관4년(630년) 후군집은 병부상서가 된다. 정관9년(635년) 이정(李靖)이 토곡혼(吐谷渾)을 평.. 2024. 7. 11.
모택동의 "평생 두 가지 큰일을 했다"는 말에 관하여 글: 모원신(毛遠新)(초고 2009. 02, 수정 2024. 02)​모주석이 자신의 "평생 두 가지 큰 일을 했다(一生干了兩件大事)"는 말을 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임종유언이라고까지 말한다.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언제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물어보았지만, 나의 대답은 항상 이러했다: "그 말을 나는 모른다. 1975년 10월 이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선양(瀋陽)에 있었으므로 알지 못한다. 그해 11월이후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석의 곁에서 보냈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진성감옥(秦城監獄)에서 나온 후에 비로소 일부 자료에서 보게 된 것이다."​이 말에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그중 구체적인 시간, 장소, 참가자에 대하여는 다음.. 2024. 7. 7.
"김가씨(金佳氏)": 건륭제의 조선인 후궁 글: 삼립신문(三立新闻)​청나라 황제들의 여인은 항상 역사드라마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이다. 특히 건륭제는 그러하다. 후세인들이 잘 알고 있는 몇몇 미인들의 총애다툼이 치열했으며, 또한 후궁들 중에는 한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와서 독특한 매력으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또한 황자까지 낳는다. 그녀는 "김가씨"이다.​조선인 김가씨가 출생한 곳은 현재의 한반도이다. 그녀는 현지의 명문집안출신인데, 고향을 떠난 이유는 주로 청나라건립초기, 김가씨의 가족에 일찌감치 청나라에 투항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충성심을 인정받았고, 조정의 주목을 받아 가족의 여성이 청나라의 궁중체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옹정5년(1727년), 감가씨는 단지 소업이었고, 청나라황실의 법도내에서는 지위가 비교.. 2024. 7. 1.
숭정제(崇祯帝): 병부상서(兵部尚书)를 18번이나 교체했지만, 결국은 나라가 멸망하다. 글: 역사조요경(历史照妖镜 )​오늘 우리가 얘기할 것은 숭정제때 가장 위험한 직업이었던, "병부상서"에 관한 것이다.우선, "병부상서"라는 직위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명나라때, 병부상서는 육부중에서 병부의 최고행정장관으로, 전국 위소군관의 선발수여, 훈련, 차량, 무기관리등의 정령을 관장하는 정2품의 고관이었다.이렇게 말할 수 있다. "병부상서"는 대명제국의 모든 정규군군사역량을 장악했고, 절대적인 실력을 가졌다고.그래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병부상서"는 모두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사람이 맡고,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다.그러나, 숭정제때 상황은 달랐다.1627년 숭정제가 즉위하고, 1644년 숭정제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짧은 17년간 그는 모두 18명의 병부상서.. 2024. 6. 28.
홍수전(洪秀全)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글: 조대부화실(赵大夫话室)진시황시대부터, 2천여년의 중국대지에서, 압박과 폭정에 반항하는 걸출한 인물은 계속하여 출현했다. 영향력으로 따지면, 홍수전은 이들 걸출한 인물들 중에서도 두드러진 인물이라 할 것이다.어렸을 때 받은 교육과는 달리, 최근 들어 듣는 홍수전은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쓰레기라는 것이다. 학식도 없으면서 굳이 과거에 계속 응시하다가 계속하여 떨어졌다. 30살이 될 때까지 홍수전은 수재라는 명칭도 얻지 못했다. 비록 '배상제회(拜上帝会)'를 창립했고, 기본적인 교의(教义)는 그가 쓴 것이지만, 태평천국의 전도조직업무는 모두 풍운산(冯云山)이 했으며, 천경(天京)을 점령할 때까지, 지휘부를 이끈 것은 양수청(杨秀清)이었다. 홍수전은 그저 명목상의 교주였다. 그는 음험.. 2024. 5. 31.
등소평(邓小平)이 쫓아낸 15명의 "국가지도자" 글: 간중국(看中国)​'문혁'이 끝난 후, 등소평은 중공의 제2대지도자에 올랐다. 모택동의 옛측근, '자산계급자유화'에 반대하거나, '6.4'기간동안 전후로 15명의 중공 '국가지도자'를 중앙주석, 중앙군위주석, 국무원총리, 중앙총서기, 중앙부주석, 중앙정치국상위,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서기, 국무원부총리, 전인대부위원장등의 자리에서 쫓아냈다. 모두 면직, 사직, 퇴직등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화국봉(​华国锋): 중공중앙주석, 중앙군위주석, 국무원총리​화국봉은 중공 호남 상음현, 상담현위서기를 지냈고, 나중에 호남성위서기로 승진한다. 문혁때 승진을 거듭하여 전후로 중공9대중앙위원, 중공10대중앙정치국위원, 국무원부총리 겸 공안부장을 맡는다. 모택동이 죽기 전에 화국봉을 중공중앙제1부주.. 2024. 5. 29.
시진핑의 양대호법(两大护法), 삼대금강(三大金刚), 그리고 한명의 팔부순안(八府巡按) 글: 호해(胡亥)​중국의 장후시대(江胡时代, 장쩌민, 후진타오시대)의 "구룡희주(九龙戏珠, 아홉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놀다. 아홉마리의 용은 9명의 정치국상위, 여의주는 권력을 의미함)", "칠룡희주(七龙戏珠)"를 얘기하면 해외여론은 그것을 집단지도체제의 상징이라고 여긴다. 그러면서 이를 중공이 정치체제방면에서 '진보'한 상징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이는 장쩌민이 조직의 인원수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억누르며 대권독점을 확보하려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구룡희주"는 집단지도체제가 아니고, 각각 자신의 업무를 책임지거나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핵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본질은 허수아비 후진타오를 집단으로 압박하며, 포위공격태세.. 2024. 5. 24.
옹정제(雍正帝)의 죽음 글: 무풍각기념(无风却起念)​1735년 8월 20일, 대청제국의 옹정제가 돌연 병으로 쓰러지고, 3일후 총총 세상을 떠난다. 영명하고 냉혹한 것으로 알려진 이 황제의 사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에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그저 간단한 몇마디만 남겼을까?​옹정제의 병이 발발하고나서 붕어할 때까지 짧으 3일동안 자금성의 안팎은 혼란에 휩싸인다. 시종 권력의 최고봉에서 정국을 조종하던 옹정제가 어찌 돌연 병사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이렇게 빠르게? 황제의 돌연한 사망은 어느 왕조에서이건 작은 일이 아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궁중시위의 말에 따르면, 옹정제는 병이 발발하기 전에 조정업무로 계속 바빴다. 비록 몸이 피로한 상태이긴 하지만 여.. 2024. 5. 21.
모택동의 진짜 유언은 무엇이었을까? 글: 섭영렬(叶永烈)1976년 5월의 모택동비록 모택동이 이미 화국봉을 중공중앙제1부주석으로 지정했지만, 왕홍문은 화국봉을 무시했다. 그가 보기에 화국봉은 그들의 적수가 되기에 등소평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1976년 7월, 왕홍문은 다시 그의 비서 소목(萧木)에게 그를 위해 전면적인 발언개요를 초안하라고 지시한다.​반년전, 왕홍문은 주은래(周恩来)가 사망한 후 자신이 중앙업무를 주재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비서 소목에게 전면적인 발언개요를 작성하라고 하여, 소목은 설날연휴마저도 쉬지를 못했었다.​이번에, 왕홍문은 다시 한번 소목에게 고생을 하라고 시킨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상의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가 부주석이었기 때문에 그가 나서서 초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이 '.. 2024.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