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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석각(昆侖石刻)"의 진위에 관하여... 글: 단단결(段丹潔) 중국사회과학보 기자(2025년 7월 2일)​최근 들어,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 동도(仝濤)는 는 글에서, 처음으로 이 황하원석각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남긴 유일하게 원래의 장소에 남아 있던 각석(刻石)이며, 동시에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역사학,고고학, 고문자학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주목했고, 열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7월 1일, 동도는 본보의 인터뷰에 응해, 학계에서 주목하는 석각의 발견과정, 내용해석 및 자연지리환경의 특수성등의 문제에 대해 대답했다.석각위치석각의 발견: 우연중의 필연​기자: 이번 진시황이 보낸 사람의 "채약곤륜"석각의 발견과정을 소개해주십시오​동도: 이번 석각의 발견은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 2025. 7. 3.
양번지전(襄樊之戰)이후 관우(關羽)의 3가지 치명적인 실수... 글: 범인간사(凡人侃史)​양번지전이후, 관우는 3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이로 인하여 결국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관우는 도대체 어떤 3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을까?​219년, 관우는 군대를 이끌고 양번(襄樊)을 북벌한다. 처음에 전투는 매우 순조로웠고, 관우의 수만정예병사는 조인(曹仁)을 공격하여 성안에 웅크리고 방어만 하도록 만들었다. 다만 우금(于禁)과 서황(徐晃)이 차례로 전투에 가담하면서, 관우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특히 우금의 3만병졸이 항복해온 이후에 관우는 손권(孫權)이 상관(湘關)에 쌓아둔 양초를 빼앗기도 해서, 손권의 분노를 산다.​사료 의 기록에 따르면, "관우는 우금등 인마 수만을 얻은 후, 양식이 떨어져, 손권이 상관에 쌓아둔 쌀을 취했다; 손권은 그 말.. 2025. 7. 2.
정격안(梃擊案): 암살음모인가? 자작극인가? 글: 사마이(駟馬已)​오늘은 명나라말기 삼대사건을 파헤쳐보기로 하자. 명사(明史)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명나라말기의 정치환경은 파휼운궤(波譎雲詭), 착종복잡(錯綜復雜)했다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만력제는 조회에 나오지 않고, 황태자는 돈후하며 연약했고, 정귀비는 기세등등했으며, 대신들을 당쟁을 벌였다. 황제, 귀비, 동림당(東林黨), 제당(齊黨), 절당(浙黨), 초당(楚黨)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어서 만력제 말기에 이르러, 황위승계는 정치세력의 재편을 가져오게 되므로, 각방세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더욱 투쟁이 치열하게 진행된다. 이어서 역사상 유명한 명말 3대사건이 벌어진다. 오늘은 그 중에서 정격안을 파헤쳐보기로 한다.​먼저 보아야 할 점은 이 이야기가 발생한 시점이다. 명나라 만력43년(161.. 2025. 7. 2.
왕지채(王之寀): 정격안(梃擊案)을 파고들어 끝까지 진상을 밝히려 했던 관리....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왕지채는 명나라 만력연간의 형부주사(刑部主事)였다. 사방팔방에 권력귀족이 가득한 경성에서 그는 보잘 것없는 인물이었다.천하를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으로 왕지채는 정치폭풍의 중심으로 말려들어갔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그보다 더더욱 보잘 것없는 소인물에게서 비롯되었다.​만력43년(1615년), 장차(張差)라는 하북사나이가 손애 대추나무로 만든 곤봉을 들고 황궁으로 쳐들어갔다.전국에서 경비가 가장 삼엄한 곳을 장차는 무인지경으로 쳐들어가 황태자 주상락(朱常洛)이 거주하는 자경궁(慈慶宮)으로 가서 궁문 앞에 있던 내시(內侍)를 때려서 부상입힌다. 내전까지는 단지 한걸음 떨어진 곳이었다.동화문의 수위지휘는 신속히 사람을 보내 범인을 체포하여, 그가 황태자까지 건드릴 수는 없었다.. 2025. 7. 2.
정격안(梃擊案): 명나라 3대 미제사건중 하나... 글: 역사기실정유취(歷史其實挺有趣)​만력43년, 오월, 시간은 유시(酉時)였다.유시는 저녁무렵으로 5시에서 7시까지를 가리킨다.바로 이 시간대에 하나의 수상한 사람의 모습이 돌연 자금성(紫禁城)의 자경궁(慈慶宮)에 나타났다.자경궁은 명나라때 자금성내에 지어진 하나의 궁전이고, 위치는 동화문(東華門) 안에 있었다. 청나라때는 이미 훼손되어 존재하지 않았고, 나중에 청나라는 자경궁의 원래 자리에 남삼소(南三所)를 짓는다.당시에 자경궁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대단한 사람이다. 당시 자경궁에 살고 있던 사람은 대명의 황태자(皇太子)인 주상락(朱常洛)이었다.​봉건왕조에서 황제를 제외하면 황태자가 그 다음이다. 왜냐하면 황태자는 나중에 황제에 오를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황태자의 신분은 매우 귀중했다.. 2025. 7. 1.
홍콩에 "재자(才子)"는 있지만, "대사(大師)"는 없다. 글: 해변의키케로(海邊的西塞羅)​"홍콩4대재자(香港四大才子)"중의 마지막 인물인 채란(蔡瀾)도 세상을 떠났다. 인터넷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추도하고 추억하는 글들을 싣고 있는데, 그것은 채란을 추억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청년시대를 추억하는 것이거나 혹은 1980,90년대 우리의 그 문화청춘기를 추억하는 것일 것이다.20세기 하반기, 대륙이든 대만이든 모두 상당한 장기간의 "특수시대"를 거친다. 이 특수시대의 문화인들은 고통스러웠다. 해협양안은 모두 수많은 창작과 언론에 건드리지 못하는 금기들이 있었고, 문화시장은 번영할 수 없었으며, 지식인 특히 인문지식인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양안의 문화는 동시에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그런데, 같은 시기, 홍콩은 당시의 특수한 지위로 인하여, 줌문문화창작상에.. 2025.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