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8603

황당한 시대에 깨끗한 사람은 없다. 글: 급급초(芨芨草)​진도수(陳徒手)는 북경당안관(北京檔案館)에서 수십만자의 당안(檔案)을 필사하여 진상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들 당안을 어떤 사람은 영원히 묻혀버리기를 이를 악물고 바랐을 것인데, 이때 진도수는 마치 '도굴꾼'같았다​거기에서 얻어낸 사실들을 여러 해동안 모아서, 와 의 두 작품에 담았다. 신중국지식분자들이 '사상개조운동'때 한 여러가지 난감할 일들을 쓰면서 11명의 대학교수들이 1949년이후 '사상개조'때의 말과 행동을 이야기했다.​황종영(黃宗英)은 진도수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풍역대(馮亦代)도 너의 이 책을 보았는데, 보고 통곡했다. 책에서 언급한 그들은 모두 그가 잘 아는 사람들인데, 네가 말하는 그런 일들을 그는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통곡했다는 것.. 2024. 7. 23.
안수(晏殊): 북송신동, 15세에 과거급제하고 나중에 재상이 되다.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15살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많은 사람은 아마도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송때 이 나이에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된 사람이 있다. 북송의 과거는 비록 합격자수를 늘였지만, 내용은 극히 복잡했다. 시(詩), 부(賦), 론(論)을 각각 하나씩 써야 하고, 대책오도(對策五道)도 있다. 성년도 십여년이상 힘들게 공부해야 겨우 합격할 수 있다. 그런데 15살짜리 소년이 일거에 합격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럼 이 북송의 신동은 누구였을까?​신동중거(神童中擧)​그의 이름은 안수(晏殊)이고, 자는 동숙(同叔)이며, 무주임천(撫州臨川, 지금의 강서성 남창) 사람이다. 안수는 천부적인 재질이 뛰어났다. 7살때 아주 멋질 글을 쓸 수 있었으.. 2024. 7. 23.
"남경조약(南京條約)": 굴욕인가 외교승리인가? 글: 양금린(楊錦麟)​1840년이래, 중국인은 눈물나는 탐색을 시작했다. 미망(迷茫)과 배회(徘徊) 속에서 항쟁, 학습, 융합, 개혁과 개량을 진행했다. 외부열강세력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내부정치투쟁이 끊이지 않고, 내외부의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양무운동이 시작되고, 새로운 지식인층이 성장하기 시작하고, 민중의 인식수준도 제고되고, 공업도 발전되었다. 여러가지 추진요소들이 합쳐지고 모이면서 변화는 계속되었다.​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열강들의 교주만(膠州灣), 광주만(廣州灣)등의 조차는 중국인들을 자극했고, 이는 근대중국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러한 커다란 치욕은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놀라고 난 이후에는 회의, 방황, 곤혹과 분노를 느낀다. 이건 민족정신의 대각.. 2024. 7. 23.
"만주(滿洲)" (3): 민족혁명 배경하의 "배만(排滿)"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3​의 체결과 더불어, "중화민족은 가장 위험한 시기가 도래했다" 내우외환의 곤경에 혁명당인들은 보편적으로 폭력혁명만이 철저히 청나라 통치를 전복시키고,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런 시대적 배경하에서, 그들은 "구제달로(驅除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의 구호를 외칠 뿐아니라, 사상등 분야에서 일련의 "배만(排滿)" 작업을 하게 된다. ​첫째, "만주는 중국이 아니다"라는 점을 논증하다.​청나라 통치를 전복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혁명당인들은 '만주인'들이 국가와 민족에 끼친 악랄한 죄악을 상세하게 드러낼 뿐아니라,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예를 들면, 추용(鄒容)은 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무릇 사람이 자신의 종족을 좋아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으로.. 2024. 7. 22.
"만주(滿洲)" (2) : 17세기 서양인들이 본 '만주족'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2​17세기에 들어선 이후, "만주굴기"와 명청왕조교체를 위시한 일련의 동아시아사건은 유럽각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이런 배경하에서 중국에 와 있던 유럽선교사들은 자신의 견문을 종합하여, "만주굴기"와 관련돤 저작을 적지 않게 남겼고,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왔다.​서양인이 그린 아담샬과 순치​첫째, 만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17세기 이전까지 유럽선교사들의 글에 나오는 "타타르인(韃靼人)"은 주로 장성 이북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수시로 명나라변경을 침범한 몽골인을 가리켰다. 오랫동안 백산흑수(장백산, 흑룡강)에 거주해오고 있던 여진인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예를 들어,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저술에는 거의.. 2024. 7. 22.
"만주(滿洲)"(1) : 만주의 유래와 뜻은?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미국학자 엘리엇(Mark C. Elliott)는 이라는 저서를 통해 만주족의 민족특성을 '만주의 길(The Manchus Way)'로 설명했다.소위 "만주의 길"은 만주 최초의 생활방식이다. 또한 중국역사상 이민족왕조의 방식과 비교하자면, 요, 금, 원과 다른 방식이다. 기본요소는 마술(馬術), 궁술(弓術), 만주문자와 소박한 풍속이다.​이는 모두 청나라조정이 강조한 것이고, 만주인의 만주화를 강화한 것이다. 어떤 때에는 다른 약간의 특징도 있다. 예를 들어, 조상을 공경하고, 황제에 충성하는 것을 '용감한 품성'이라고 보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성명과 복식도 있다.​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무엇이 "만주"인가? 글자 자체로 볼 때 "만주"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내포.. 2024. 7. 22.
아편전쟁(鴉片戰爭): 하나의 신화 글: 고천활해(高天闊海)​영국의 역사학자 Julia Lovell(중문명 藍詩玲)이 쓴 "The Opium War: Drugs, Dreams and the Making of China"(아편전쟁: 마약, 꿈 그리고 중국만들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편전쟁은 중국의 "founding myth(건국신화)"중 하나라고.​아편전쟁은 중국인에게 있어서 의미가 아주 크다. 중국의 가련한 역사교육 속에서, 정부는 이데올로기라는 볼록거울을 통하여 아편전쟁을 엉망진창으로 고쳐썼고 서방국가에 대한 민족원한을 선동하며, 중공통치를 보호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중국은 역사허무주의를 이용하여 고쳐쓴 중국역사에서 아편전쟁은 중국근대사의 시작이며, 소위 "중화민족백년굴욕"의 기점이 된다.​줄리아 로벨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2024. 7. 20.
"강남노변(江南奴變)": 서하객(徐霞客) 일가멸문사건의 배후 글: 해우강사(海佑講史)​저명한 여행가, 문학가인 서하객(徐霞客)은 명나라 숭정14년(1641년) 사망한다. 향년 54세였다. 서하객이 살아 있을 때, 이미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일이 있다. 그가 죽은후 4년만에, 즉 남명 홍광원년(1645년) 서하객의 일가 20여명이 모조리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서씨일가멸문사건"은 강소, 절강지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번 멸문사건의 흉수가 놀랍게도 서씨집안의 노비들이라는 것이다. 서씨집안은 노비들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원인으로 평소에 공손하던 노비들이, 주인집안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러 모조리 죽이고 멸문시키게 되었을까?​잔혹한 사건의 배후에는 명청교체기에 강남에서 대.. 2024. 7. 19.
중국역사로 본 "고양이"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선덕4년(1429년), 고양이를 사랑한 황제 주첨기(朱瞻基)는 그림 하나를 내각대신 양사기(楊士奇)에게 하사한다.그림을 좋아했던 황제중에서 선덕제(宣德帝) 주첨기는 독보적이다. 그는 회화의 천재로,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에 모두 정통했다. 특히 보기드물게도 그의 이런 취미는 그의 주업인 통치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의 재위기간동안 조정은 청명했고, 국력은 강성했다. 역사상 "인선지치(仁宣之治)"로 불리는 태평성대였다.​주첨기가 양사기에게 하사한 그림은 였다. 그림에서, 한 마리의 삼색묘(三色猫)가 동호구리로 만든 꽃병에 담긴 모란화(牡丹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미는 장수(長壽), 부귀(富貴)이다. 주첨기는 아마도 즉흥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양사기는 황제의 .. 2024. 7. 18.
"수축형사회(收縮型社會)"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글: 운향객(雲鄕客)​비록 주선율(主旋律)은 영원히 A장조로 쓰여지겠지만, 현실은 항상 그렇게 양광찬란(陽光燦爛)하지 않다.​원래 펜데믹봉쇄가 해제되고 나면, "보복성소비"가 나타나서, 경제가 회복되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것으로 여겼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극적인 대반전이 나타났다. 작년 연초, 중국사회에는 젊은이들의 "보복성예금"이라는 뉴노멀(新常態)가 나타났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경제학자인 판샹둥(潘向東)은 이렇게 말한다: 보복성예금은 단기적 현상이다. 젊은이들이 예치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미래의 불확정성에 대한 보장이다. '단기적현상'인지 아닌지는 더 기다려봐야 알 수 있을 것인데, 핵심단어는 '불확정성'이다. ​작년초, RET중국상업부동산연구센터의 조사연구데이타에 따르면, 중국 젊은이들은 점.. 2024.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