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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로 본 "고양이"

by 중은우시 2024. 7. 18.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선덕4년(1429년), 고양이를 사랑한 황제 주첨기(朱瞻基)는 그림 하나를 내각대신 양사기(楊士奇)에게 하사한다.

그림을 좋아했던 황제중에서 선덕제(宣德帝) 주첨기는 독보적이다. 그는 회화의 천재로,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에 모두 정통했다. 특히 보기드물게도 그의 이런 취미는 그의 주업인 통치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의 재위기간동안 조정은 청명했고, 국력은 강성했다. 역사상 "인선지치(仁宣之治)"로 불리는 태평성대였다.

주첨기가 양사기에게 하사한 그림은 <호중부귀도(壺中富貴圖)>였다. 그림에서, 한 마리의 삼색묘(三色猫)가 동호구리로 만든 꽃병에 담긴 모란화(牡丹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미는 장수(長壽), 부귀(富貴)이다. 주첨기는 아마도 즉흥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양사기는 황제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림의 여백에 양사기는 장문의 발문(跋文)을 써두었다. 먼저 명선종의 문치무공을 찬양한다. 명선종은 여정도치(勵精圖治)하면서 예술에도 심취했다고 말했다: "정관(貞觀, 즉 당태종 이세민)의 여정(勵精)을 본받고, 선화(宣和, 즉 송휘종)의 미혹(迷惑)을 거울삼았다". 이어서 이렇게 썼다. "임금과 신하가 한 마음이 되어 아래 위가 서로 믿으니, 조정에는 서로 상서(相鼠, 시경에 나오는 짧은 시. '쥐를 살펴보니 사지가 없네, 사람인데 예의가 없다. 사람인데 예의가 없으면 어찌 빨리 죽지 않겠느냐'라는 내임)의 날카로움이 없고, 들판에는 석서(碩鼠, 역시 시경에 나오는 시로 '큰 쥐'를 의미한다)의 부르짖음이 없다. 고위관료때문에 못살겠다는 부르짖음을 의미함). 그래서 이 고양이인 것이다."

상서, 석서는 모두 <시경>에 나온다. 이를 통해 탐욕스러운 착취자를 비유하고 있다. 양사기의 뜻은 우리 대명조정은 황제라는 이 고양이의 감독하에 곡식을 훔쳐먹는 쥐는 없다는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들이 반드시 자신이 고양이라는 자각을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고양이를 길렀다. 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熜)도 고양이를 좋아했다. 그는 미청색(微靑色)의 작은 고양이 한 마리를 길렀는데, 이름이 "상미(霜眉)"였다. 특히 사람에게 붙어다녀서, 황제가 어디를 가든 항상 따라갔다. 저녁에 잠을 잘 때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이 고양이가 죽자, 가정제는 고양이를 만세산(萬歲山)에 묻어주고, 비석을 세워 "규룡총(虬龍塚)"이라 한다. 윈위(袁煒)라는 사람이 청사(靑詞)를 지어 상미를 추도했다. 거기에 나오는 구절인 "화사작룡(化獅作龍)"은 황제의 심금을 울렸고, 그후 그는 중용된다.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새로운 세계에서 내심의 고독은 그 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 귀여운 고양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의 '가족'이자 '반려'가 되었다. 그렇다면, 고대에 고양이는 어떻게 중국인들을 정복했을까?

1

처음에, 고양이를 기르게 된 것은 쥐를 잡는데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한비자>는 이렇게 말했다: "닭으로 하여금 아침에 울게 하고, 고양이로 하여금 쥐를 잡게 하는 것은, 모두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使鷄司晨), 令狸執鼠, 皆用其能)". <여씨춘추>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양이가 집에 있으면 쥐들이 사라진다(狸處堂而衆鼠散)". 리(狸)는 원래 들고양이(野猫), 산고양이(山猫)를 가리킨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당시에 이미 사람들이 고양이를 길러 쥐를 잡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농사가 순조롭게 되도록 기도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팔랍(八蠟)이다. 이는 8가지 농업과 관련된 신지(神祗)인데, 그중에 고양이(猫)가 있다: "옛날에 군자는 사용하면 반드시 보답했다. 고양이를 맞이하는 것은 고양이가 밭의 쥐를 잡아먹기 때문이다(古之君子, 使之必報之. 迎猫, 爲其食田鼠也)" 사람들이 영묘(迎猫)의 제전을 거행하는 것은 쥐로 인한 해가 없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대력13년(778년), 농우절도사(隴右節度使) 주자(朱泚)의 부하네 집에서는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먹으며 서로 평화롭게 같이 살았다. 주자는 이 고양이를 '상서(祥瑞)'로 여겨 황제에게 바친다. 백관이 축하했는데, 오직 사인(舍人) 최우보(崔祐甫)가 반대의견을 제기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만물을 낳았을 때는 그 본성이 있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사람에게 길러지면서,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시위소찬(屍位素餐, 아무 하는 일없이 국가의 녹봉만 축내는 것)하는 관리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최우보는 명백하게 지상매괴(指桑罵槐, 뽕나무를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홰나무를 욕하는 것이다. 즉 이 사람을 지목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을 가리킴)한 것이다. 다만 이를 보면 당나라사람들의 고양이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쥐를 잡을 줄 아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이고, 쥐를 잡지 못하는 고양이는 관대하고 인자한 것으로 보이지만 기실 천도(天道)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유종원(柳宗元)은 이런 이야기를 쓴 바 있다. "영주(永州)이 모씨는 자신이 쥐띠라고 하여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고, 하인들도 고양이를 기르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집안에 쥐가 창궐했다. 곡식까지도 쥐가 다 먹어치웠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이사를 갔고, 다음으로 이사온 주인도 고생을 많이 하게 된다. 새 주인은 5,6마리의 고양이를 빌려와서 대문을 걸어잠그고, 쥐소굴에 물을 가득 부었다. 그리고 사람을 모아서 쥐를 잡았더니, 죽은 쥐가 산을 이루었다. 구석진 곳에 던져놓았는데, 몇달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악취가 가셨다."

문인에게 있어서 고양이는 또 다른 좋은 점이 있었다. 쥐는 곡식을 먹을 뿐 아니라, 서적도 먹어치웠다. 육유(陸遊)는 여러번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장서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안독(案牘), 서가(書架), 침상위에 모두 책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 쥐가 책을 갉아먹은 흔적을 발견하곤 했다. 그가 보기에 이건 진나라때의 분서에 해당할 정도의 큰 일이다. 나중에 그는 고양이 한 마리를 구해왔고, 마침내 쥐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특별히 고양이를 위하여 <서루패오서우득이노포살무허일군서기공위부(鼠屢敗吾書偶得狸奴捕殺無虛日群鼠幾空爲賦)>라는 시를 썼다. 그 내용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가용수능공서혈(賈勇遂能空鼠穴), 책훈하지리호장(策勛何止履胡腸), 어식수박진무괴(魚殖雖薄眞無愧), 불향화간포접망(不向花間捕蝶忙)" 말린 생선 몇조각만 주면 서재를 보호해주니, 이 얼마나 자기 일에 충실한 좋은 고양이인가?

부지런한 좋은 고양이도 있지만, 직책을 소홀히 하는 게으른 고양이도 있다. 소식(蘇軾)도 <묘견(猫犬)>이라는 글 쓴 적이 있다: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쥐를 잡기 위함이다. 쥐가 없다고 하여 쥐를 잡을 줄 모르는 고양이를 기를 수는 없다. 개를 기르는 것은 도적을 막기 위함이다. 도적이 없다고 하여 짖지도 않는 개를 기를 수는 없다. 내가 말하는데 그냥 쥐만 잡지 않는 건 그래도 괜찮다. 쥐는 잡지 않으면서 닭을 잡아먹는게 더욱 심한 것이다. 짖지 않는 건 그래도 괜찮다. 도적을 보고 짖지 않으면서 주인을 보고 짖는게 더욱 심한 것이다. 정인군자를 질시하며 반드시 없애려고 한다면 그게 바로 닭을 잡는게 아닌가? 권력자에게 아부하면서 천자를 고립시킨다면 그게 바로 주인을 보고 짖는게 아닌가?" 쥐를 잡지 못하는 고양이, 도둑을 보고 짖지 않는 개는 시위소찬하는 관리와 같다. 모두 나라와 집의 해악이다. 더욱 심한 경우도 있다. 어떤 고양이는 쥐는 잡지 않으면서 집안의 닭을 잡아먹는 것이다. 이는 해중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글에서 고양이와 개를 이야기하지만 암중으로 조정관료들을 풍자한 글이다.

육유도 <조축묘(嘲畜猫)>라는 시를 쓴 바 있다: "심의번분폭(甚矣飜盆暴), 차군수득성(嗟君睡得成), 단사어염족(但思魚饜足), 불고서종횡(不顧鼠縱橫)"(바깥에는 비가 심하게 내리는데, 그대는 그래도 잠이 들었구나. 그저 생선을 배부르게 먹는 것이나 생각하지, 쥐가 돌아다니는 건 신경쓰지도 않는구나). 대체적인 뜻은 너 이 게으른 고양이야 먹을 때는 마구마구 먹더니, 배부르고 나니 쥐가 돌아다녀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냐라는 것이다.

당연히 게으른 고양이를 욕하는 이 시는 마찬가지로 은유적이다. 육유는 "유시중원무사시(猶是中原無事時)"에 살았지만 심장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북상하여 금나라를 치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뜻이 같은 사람은 거의 없고, 자신이 혼자서 나라와 집안이 몰락하는 것은 막을 힘도 없다. 이런 고독한 생활 속에서, 그의 고양이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한편으로 고양이를 욕하면서 당시의 관료사회를 욕했고, 다른 한편으로 고양이로 마음의 위로를 삼았다.

모두 알다시피 육유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너무나 많은 고양이에 관한 시사를 남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는 당연히 <십일월사일풍우대작. 기이(十一月四日風雨大作.其二)>이다. "철마빙하입몽래(鐵馬氷河入夢來)"라는 한 구절은 그의 내심의 무한한 비애를 말해준다. 기실 이건 시의 두번째이다. 첫번째 시는 이렇게 쓰여 있다: "풍권강호우암촌(風捲江湖雨暗村), 사산성작해도번(四山聲作海濤飜). 계시화연만전난(溪柴火軟蠻毡暖), 아여이노불출문(我與狸奴不出門)"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그의 곁에는 고양이만이 떨어지지 않고 함께 한다.

송나라때, 황제와 관료들은 대부분 고양이를 기르는 걸 좋아했다. 이들 고양이들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없었고, 쥐를 잡지도 않았다. 육유는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진회(秦檜)의 손녀는 숭국부인(崇國夫人)에 봉해졌는데, 한 마리의 사묘(獅猫)를 길렀다. 하루는 이 고양이가 돌연 도망쳤다. 고양이를 찾기 위하여 진회는 관군까지 동원해서 전체 도시를 수색한다. 그는 관군에게 시한을 정해주었는데, 그 시한내에 고양이를 찾아내지 못했다. 임안부는 조급해져서 진회의 집 주위의 사람들을 모조리 붙잡았고, 고양이를 수색한 관병들을 탄핵했다. 관병들은 놀라서 사방에 고양이화상을 붙였고, 사묘라는 사묘는 모조리 붙잡아들였다. 결국, 임안부는 주변의 권유를 듣고 행동을 멈추게 된다. 한 마기 고양이를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하다니,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일이다.

고양이들은 부지런하거나, 게으르거나,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주거나, 혹은 권력귀족임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이는 이미 왕조의 일상을 벗어난 것이고, 이 왕조를 관찰하는 거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고양이에게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불인지수(不仁之獸)"

<비아(埤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기로 고양이는 아침과 저녁이멘 눈동자가 둥글게 된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선이 된다. 그리고 코끝은 차가운데 오직 하지(夏至) 하루만 따뜻하다. 이는 고양이가 음류(陰類)이고, 음기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고양이의 눈동자는 빛이 비치는데 따라 모양이 바뀌고, 코끝의 온도도 바뀐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하여, 고양이는 자연스럽게 궤이고괴(詭異古怪)한 현상과 연결되어지고는 했다.

<태평광기(太平廣記)>의 기록에 따르면, 건강(建康)에 식초를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고 있었다. 고양이가 죽자, 식초상인은 아주 슬퍼하며 죽은 고양이의 곁에서 며칠을 앉아있었다. 고양이의 시신에서 악취가 날 때까지. 식초상인은 부득이 고양이시신을 호수에 던졌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고양이가 물에 닿자마자 되살아났다. 식초상인은 급히 고양이를 구하려 물에 뛰어들었는데, 그 결과 자신이 익사하고 만다. 고양이는 안전하게 뭍에 상륙했다. 나중에 관리가 이 고양이를 증거물로 붙잡아들여 가두어 두고, 아문으로 가서 사건상황을 진술했다. 그리고 되둘어와보니 고양이는 이미 줄을 끊고 도망가버렸다.

이 이야기 속에서, 고양이는 상당히 차갑고 냉혹무정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주인이 이렇게 그를 아꼈는데도 그는 주인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묘귀(猫鬼)"에 대한 전설도 있다. 수(隋)나라때 만들ㄹ어진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묘귀라는 것은 말하기를 늙은 고양이의 정(精)이 귀역(鬼蜮)으로 변해서 사람에게 붙은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고(蠱)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을 해친다. 그 증세는 가슴과 배에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사람의 오장육부를 먹고, 결국 피를 토하고 피가 엉켜서 죽는다." 고대인들은 일종의 사악한 법술로 보았다: 늙은 고양이를 죽여서 묘귀를 얻은 다음, 매일 자시(子時)에 제사를 지내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고,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재물을 옮겨올 수 있다.

수나라때 발생한 독고타(獨孤陀)의 묘귀사건이 있다. 독고타는 서위(西魏) 팔주국(八柱國)의 한명인 독고신(獨孤信)의 여섯째아들이며, 수나라 독고황후와 동부이모의 남동생이다. 그의 처는 수나라의 대신 양소(楊素)의 동부이모의 여동생이었다. 이런 관계망을 보면 그의 지위가 아주 존귀했음을 알 수 있다.

개황18년(598년), 독고황후와 양소의 처는 같은 병으로 쓰러진다. 의사는 진단을 마친 후에 묘귀병이라고 판단했다. 수문제는 독고타가 두 사람 모두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가장 의심스럽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암중으로 그를 시험한다. 다만 독고타는 이를 극구 부인한다. 수문제는 믿지 않았고, 그를 천주자사(遷州刺史)로 좌천시켜 쫓아버린다. 독고타는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게 되고, 말투가 공손하지 못하게 된다. 수문제는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보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

독고타의 집에는 서아니(徐阿尼)라는 노비가 있었는데, 그녀는 원래 독고타의 모친을 따라 묘귀의 법술을 행하곤 했다. 독고타가 한번은 집으로 돌아와서 처에게 술을 내놓으라고 했는데, 처가 술을 살 돈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독고타는 서아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묘귀를 양소의 집으로 보내어 돈을 가져와라." 개황11년(591년), 독고타는 서아니를 시켜 묘귀를 황후가 거처하는 곳으로 보냈었다.

재판을 책임지고 있던 대리승(大理丞) 양원(楊遠)은 서아니에게 묘귀를 불러오라고 말한다. 서아니는 자야(子夜)시간에 향죽(香粥)을 한 그릇 놓고,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불렀다: "묘귀야 빨리 돌아와라. 황궁에 더 이상 머물지 말고." 서아니의 안색이 파랗게 바뀌었고, 몸이 마치 무슨 다른 물건에 끌려가는 것같았다. 분명 묘귀가 몸에 붙은 것이다.

수문제는 대신들과 어떻게 처리할지를 상의했다. 어떤 사람은 묘귀를 기르는 자를 죽여버려야 저주를 풀 수 있다고 말하면서 독고타를 사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독고타의 동생, 독고황후가 모두 부탁하는 바람에 그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되었다.

이 사건 이전에, 민간에서는 이미 누군가 관청에 고발한 바 있었다. 자신의 모친이 묘귀에게 피살되었다고. 당시 수문제는 믿지 않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수문제는 명을 내려 묘귀사건을 일으킨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말하고, 특별히 그에 관한 법률을 만든다. 그러나, 묘귀의 그림자는 수나라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대업연간에 또 다시 묘귀사건이 벌어진다. 민간에서는 서로 고발하고,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자들이 천여가에 달했다.

당연히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의심스러운 점들이 많다. 그저 하나의 미신사건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독고타가 재물을 받아내려 했다면 왜 보통의 부잣집을 겨냥하지 않았을까? 묘귀를 이용해서 재물을 쌓을 수 있다면, 왜 술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을까? 수문제가 독고집안의 세력을 탄압하기 위하여 묘귀라는 다른 사람이 반박하기 힘든 무술을 이용한 것은 아닐까?

당나라에 이르러, 사람들은 여전히 묘귀를 무서워했다. <당율소의(唐律疏議)>는 수나라법령중 묘귀를 기르는 것을 금지한 법령을 그대로 계승하여, 무릇 묘귀를 기르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하도록 했다. 그외에 묘귀를 기르는 자의 집안 사람은 비록 몰랐다고 하더라도 3천리유배를 보냈다.

당고종(唐高宗)떄, 소숙비(蕭淑妃)가 무측천과의 정치투쟁에서 패배하고, 구금당한다. 그때 욕을 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아무(阿武, 무측천)은 쥐가 되고, 나는 고양이가 되어 그의 목구멍을 물어뜯겠다!" 무측천은 대노하여 궁중에 고양이기르는 것을 금지한다. 그후 무측천은 자주 꿈에서 왕황후(王皇后), 소숙비 두 사람이 산발을 하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무당을 불러서 법술을 하도록 해서 마음의 평안을 구했다. 그녀는 이것이 저주일까 우려하였다. 아마도 수나라때의 묘귀사건 때문일 것이다.

수,당이후, 묘귀라는 말은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사라진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정서도 점점 약화되었다.

3

고양이를 키우는 기풍은 송나라때부터 흥성한다. 그러나 더 소급해 올라가면 고양이는 당나라때 이미 사람들의 애완동물이 되어 있었다.

처음 사서(史書)에 이름을 남긴 고양이집사는 장박(張博)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덩덕종(唐德宗)때 여주자사(廬州刺史)인데, 고양이를 좋아해서 길렀다. 각양각색의 고양이가 다 있었다. 가장 귀한 것은 7마리였는데, 그는 각각 동수(東守), 백봉(白鳳), 자영(紫英), 거분(祛憤), 금대(錦帶), 운단(雲團), 만관(萬貫)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매번 집으로 돌아오면, 수십마리의 고양이가 그를 둘러쌌고, 함께 비단으로 짠 유막(帷幕) 사이를 오가면서 놀았다. 사람들은 그런 행위가 너무 이상하다고 여겨서, 장박은 묘정(猫精)이 사람으로 화신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송나라에 이르러, 상업이 번영하고, 도시가 많이 생겨나면서, 시민문화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추구했고, 고양이를 기르는 수요도 급증한다. 청나라때 지어진 <묘원(猫苑)>에는 고양이를 기를 때의 4가지 장점을 언급하고 있다: 집안의 옷과 서적을 보호할 수 있다; 생선만 먹이면 기를 수 있다; 겨울이 되면 발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 가르치면 먹을 것을 훔쳐먹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사회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사람들에게 즐거운 일이다.

항주에는 상인들이 많이 모여있고, 점포가 밀집되어 있다. 같은 유형의 점포들이 왕왕 한 곳에 모여있다. 예를 들어, 과자가게(果子行), 정육점(肉行), 생선가게(魚行)등. 고양이와 관련한 매매도 상당히 많았다. 보통의 고양이를 파는 곳, 각종 고양이를 파는 곳, 고양이생선을 파는 곳, 고양이집을 파는 곳등등 현대의 애완동물점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매매가 있으면, 악덕상인도 있기 마련이다. 임안의 작은 골목에 손삼(孫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기를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바깥의 사람들에게 우리 집의 고양이를 보여주지 말라. 임안에는 이 품종이 없다. 일단 누군가 발견하면 반드시 훔쳐갈 것이다." 손삼은 매일 이렇게 말했다. 이웃들조차 길을 지나가다가 들을 정도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건 그저 호반(虎斑)인데, 과거에는 희귀했지만. 지금은 이미 희귀하지 않다." 하루는 그 사람이 돌연 손삼의 집안으로 뛰어들어 고양이를 끌어안고 바깥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고양이의 털색을 보았고 깜짝 놀란다. 원래 이 고양이는 전신이 붉은 색이어서, 아주 특이했다. 손삼은 집으로 돌아온 후 처를 구타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황궁에까지 전해진다. 한 고위관료가 사람을 보내 그 고양이를 사겠다고 한다. 손삼은 거절했다: "나는 이 고양이를 목숨처럼 아낍니다. 어찌 팔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이 상대방은 엄청난 가격을 제시했다. 30만전이었다. 손삼을 그제서야 고양이를 판다.

그러나, 고양이를 데려오자 털색이 점차 옅여지고, 반달이 지나자 백묘로 바뀌었다. 대신은 급히 사람을 손삼을 집으로 보냈으나, 손삼은 이미 어디론가 도망쳐버린 다음이었다.

고양이를 기르는 것이 유행한 후, 여러가지 고양이를 기르는 절차도 생겨난다.

첫째 단계는 "상묘(相猫)"이다. 즉 좋은 고양이를 고르는 것이다. (1) 고양이를 공중에 들어, 사지와 꾸리가 위로 오그라드는 것이 좋은 것이다. (2) 고양이를 벽에 던졌을 때 고양이의 네 발톱이 충분히 날카로와, 벽을 꽉 붙들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다시 고양이의 살집이 탄탄하고 탄력이 있는지를 본다. 만일 걸음을 걸을 때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쥐를 잡기에 유리한 것이다. (3) 고양이의 입을 벌려보아서, 윗턱에 각진 곳이 많은지를 본다. 이런 구결(口訣)이 있다: "삼감착일계(三坎捉一季), 오감착이계, 칠감착삼계, 구감착사계." 당연히 외형도 고려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몸이 짧고, 꼬리는 굵고 길며, 코는 편평하고 곧고, 허리는 둥글고, 귀는 작고, 눈은 맑은 것이 좋다. 털색으로 보면, 순황, 순백, 순흑이 가장 좋다. 여러색인 경우에는 흑운개설(黑雲蓋雪, 검은 구름에 눈이 덮여 있다)이 가장 좋고, 대모반(玳瑁斑, 흑,황,백의 3색이 혼합된 것)이 그 다음이다.

둘째 단계. 양진길일(良辰吉日)을 잡아서 고양이를 데려오는 것이다. 고양이를 얻는데 가장 좋은 것은 고양이가 좋아하는 생선, 소금등을 예물로 주고, 고양이주인과 바꾸는 것이다. 이건 통상적으로 친척친구들 사이에서 고양이를 주고받는 행위이다. 황정견(黃庭堅)은 <걸묘(乞猫)>라는 시를 썼다: "추래서배기묘사(秋來鼠輩欺猫死), 규옹번분교야면(窺瓮飜盆攪夜眠), 문도이노장수자(聞道狸奴將數子), 매어천류빙섬선(買魚穿柳聘銜蟬)"(가을이 오니 쥐들이 고양이가 죽은 것을 알고, 항아리를 들여다보고, 소반을 뒤집으며 밤잠을 못이루게 하네, 듣자하니 고양이가 새끼를 몇 마리 낳을 거라는데, 물고기를 버들가지에 꿰어 고양이와 바꿔야겠네) (여기서 함선은 고양이를 가리킴). 친구집의 고양이가 곧 새끼를 낳을 것이라고 하니, 생선을 준비해서 한 마리 구하러 간다는 것이다. 그외에 그는 <사주문지송묘아(謝周文之宋猫兒)>도 지었다: "양득이노입전공(養得狸奴立戰功), 장군세류유가풍(將軍細柳有家風), 일단미염어찬박(一簞未厭魚餐薄), 사벽당령서혈공(四壁當令鼠穴空)." (고양이를 길렀더니 전공을 세웠다. 장군(고양이)의 군영은 가풍이 제대로 서 있다. 한 광주리의 부족한 생선도 싫다하지 않고, 네 벽에 쥐소굴을 모조리 없어졌다.) 친구가 고양이를 준 것에 감사하며 쓴 것이다. 전공을 많이 세워 그에게 죽은 쥐가 무수히 많다.

세번째 단계. 고양이를 집안에 들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옛 사람들은 고양이를 통(桶) 안에 넣고, 쾌자(筷子, 젓가락)로 좋은 방위를 점쳐서, 고양이를 꺼내 제사를 한번 지낸 후, 쾌자를 흙무더기 위에 꽂아놓는다. 그래야 고양이가 집안의 아무 곳에나 대소변을 보지 않는다. 이런 행위는 아주 괴상하지만, 실제로 아마 고양이가 집안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고양이가 집으로 온 후 어떤 주인은 고양이와 계약을 체결한다. 주인은 고양이에게 음식과 공간을 제공하고, 고양이는 평소에 열심히 일하고, 집안의 다른 가축이나 곡식을 훔쳐먹지 않고, 마구잡이로 뛰어다니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기면 채찍질의 벌을 받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고양이를 기른 후, 다른 사람이 훔쳐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고대에 한 사람이 도둑이 되는 것은 왕왕 소나 고양이를 훔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송나라때의 악가(岳珂)가 쓴 <정사(桯史)>에 이런 고양이를 훔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시 도시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주 고양이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양이를 훔친 자는 고양이를 물통에 넣는다. 고양이는 물장난을 좋아하지 않아서, 몸에 물이 닿으면 물을 마를 때까지 계속 핥는다. 그래서 누가 부르더라도 듣지 않는다. 누군가 도둑을 보고 고양이의 털색깔을 물으면서 자신의 집고양이가 아닌지 확인하려 하면, 도둑은 소매에서 다른 색깔의 꼬리를 내보인다. 분명 유사한 털색이 아닌 것을 내보일 것이다. 원래 그의 소매에는 여러가지 색깔의 꼬리가 들어 있다. 그중 전혀 다른 색깔의 꼬리를 내보인다. 물어본 사람은 당연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고양이가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이들 고양이도둑은 고양이를 식당에 판다. 잃어버린 고양이는 대부분 음식재료가 된다.

송나라이후, 게으르고 귀여운 고양이는 점차 인류의 고독한 마음을 만족시켜주게 된다. 고양이의 기능이 반려(陪伴)로 승급된 것이다. 다만, 송나라때의 소식, 명나라때의 양사기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이 작은 생물을 통해 시대를 은유하곤 했다.

1934년 겨울, 서비홍(徐悲鴻)은 그림 하나를 창작한다. 제목은 <만한(顢顸, 멍청하다는 뜻임>이다. 검은고양이, 흰고양이를 각각 1마리 그렸는데, 검은고양이는 경각심을 가지고 먼 곳을 쳐다보고 있고, 흰고양이는 게으르게 땅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다. 그림에는 시를 하나 써놓았다: "만한최상책(顢最上策), 혼돈귀천성(混沌貴天成), 소소희감관(少小嬉憨慣), 안위부동심(安危不動心)"

풍자의 의미가 아주 크다: 국난이 닥쳤는데, 더 이상 멍청하게 있지 말라는 것이다.

시대가 어떻게 바뀌든지간에 고양이는 시종 인간이 태도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도구'였다. 그게 고양이의 행운일까 불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