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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황당한 시대에 깨끗한 사람은 없다.

by 중은우시 2024. 7. 23.

글: 급급초(芨芨草)

진도수(陳徒手)는 북경당안관(北京檔案館)에서 수십만자의 당안(檔案)을 필사하여 진상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들 당안을 어떤 사람은 영원히 묻혀버리기를 이를 악물고 바랐을 것인데, 이때 진도수는 마치 '도굴꾼'같았다

거기에서 얻어낸 사실들을 여러 해동안 모아서, <고국인민유소사(故國人民有所思)>와 <인유병(人有病), 천지부(天知否)>의 두 작품에 담았다. 신중국지식분자들이 '사상개조운동'때 한 여러가지 난감할 일들을 쓰면서 11명의 대학교수들이 1949년이후 '사상개조'때의 말과 행동을 이야기했다.

황종영(黃宗英)은 진도수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풍역대(馮亦代)도 너의 이 책을 보았는데, 보고 통곡했다. 책에서 언급한 그들은 모두 그가 잘 아는 사람들인데, 네가 말하는 그런 일들을 그는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통곡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진도수는 중국작가협회당안실에서 종이와 펜을 가지고 수십만자에 이르는 당안을 필사했다. "주로 회의기록이다. 그리고 작가가 보내온 서신, 진술, 반성문도 있다. 매번 운동때마다 한무더기씩 쌓였다."

1957년 "반우파운동"때 중국작가협회는 20여차례의 대회를 열어 "정(丁玲), 진(陳企霞)반당집단"을 비판했다. 회의에서는 여러가지 상황이 이어졌는데, 어떤 사람은 욕을 하고, 어떤 사람은 통곡하고, 어떤 사람은 소동을 벌였다. 한번은 회의에서 천진의 여작가 유계(柳溪)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기하를 고발하면서 진기하가 일찌기 자신과 '부정당남녀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다. 침대위에서의 일들을 상세하게 진술하여 참석자들이 아연실색한 바 있다.

진도수는 이 회의기록을 필사하면서 크게 놀랐다: "이건 아마도 가장 잔혹한 순간일 것이다. 원래는 오랜 친구였는데, 얼굴을 맞대고 너죽고나살기식으로 싸웠다. 가장 역겨운 일까지 끄집어 내어 상대방을 공격했다."

진기하를 숙청하기 위하여, 작가협회 당조서기 유백우(劉白羽)는 일부러 천진까지 가서 유계를 현장으로 데려온 것이다. 진기하는 <문예보>의 주편(主編)이었고, 원래 "아주 기운넘치고, 고집있는 사람"이었는데, 일거에 무너진다.

진도수는 이렇게 결론내린다: "반우파운동은 하나의 전투가 다른 전투를 끌어들이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끌어들였다. 마치 미리 계획되어 있는 것처럼." 먼저 정령을 비판하고, 다시 풍설봉(馮雪峰)을 비판하고, 다시 되돌아와서 한번 더 정령을 비판한다. 마지막에는 회의를 열어 정령의 당적을 박탈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데, 정령 자신까지도 손을 들어 찬성하게 된다.

<인유병, 천지부>에 쓴 자료는 그가 필사한 총수의 절반에 못미친다. 그리고 절대다수의 부분은 처음 공개된 것이었다.

2001년부터, 진도수는 북경당안관으로 옮겨서 필사하기 시작한다. 종이와 펜은 점점 컴퓨터로 대체되었다. <고국인민유소사>에 나오는 모든 사료는 이들 당안에서 나온 것이다. "마음대로 상상하거나, 마음대로 보충한 것이 없다."

<양계초전(梁啓超傳)>의 작자이자 평론가인 해새장(解璽璋)은 이렇게 평가한다: "진도수의 당대지식분자연구는 시종 대량의 관방자료와 원시당안에 근거해서 한 글자도 근거가 없는 것이 없다."

1961년에 태어난 진도수는 자칭 "정치화된 1세대"이다. 중,고등학교때 '문혁'을 만난다. 그래서 책을 읽을 시간이 극히 적었다. 오전에 몇과목을 들은 후, 오후에는 모두 길거리로 나가 대자보를 보았다. 대자보는 모두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가서 붙였다. 종이에는 검은색글자로 크게 쓰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시간이 오래되면, 종이는 태양아래에서 검게 바뀌어버린다.

매일 아침, 선생님은 전체 반의 40여명중에서 5,6명을 지목해서 다시 말하도록 했다. 진도수도 뽑힌 적이 있었다. 대자보에서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고, 그저 이것과 투쟁하고, 저것과 투쟁한다는 것만 알았다. 그는 한자한자 외워서 말했다: 서기 요지고(廖志高)는 수정주의를 꾀한다.발ㄹ

나중에 대자보상의 투쟁과 '운동'은 점점 생생한 경력으로 바뀌어 갔다. 1986년 진도수는 치공당중앙(致公黨中央)에서 중국작가협회 창작연락부로 옮겨간다. 그때 "바록 발난반정(拔亂反正)은 한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작가협회는 여전히 아주 복잡했고, 계속 조용한 적이 없었다."

1987년 1월, 당은 "자산계급자유화에 반대한다"고 호소한다. 작가협회도 계속하여 학습과 운동을 전개한다. 매번 이사회를 개최하면, 좌우양파가 앞다투어 발언했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관점은 자유화였다. 화약냄새가 충만했다. 한번은 문대회(文代會)에서 진도수가 기록을 맡았는데, 왕몽(王蒙)이 이렇게 말한다: "이런건 문제가 있다. 너희는 걸핏하면 중앙에 고발하지 말라.' 이를 보면 당시 어떤 사람은 끝없이 계속하여 고발장을 냈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 작가협회는 청년창작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장은 당시 서교(西郊)의 진펑호텔(金豊賓館)이었다. 낮에는 문학이론을 강의했다: 사회주의, 현실주의. 저녁에는 외국영화를 틀어주었다. 회의는 8,9일간 계속되었고, 외부에는 눈이 내러 하늘이 어두웠다.

1980년대말 작가협회가 정리정돈된다. 서기, 부서기가 면직당하고, 당조성원이 모조리 교체된다. 70여세의 유백우가 다시 작가협회로 돌아와 <인민문학>의 주편을 맡는다.

1950년대 "인인과관(人人過關)"의 국면이 다시 출현했다. 풍파가 지나면 작가협회는 업무를 중단했다. 업무인원은 매일 그저 바둑이나 두거나 카드놀이를 했다. 진도수의 사무실 곁에는 당안실이 있었다. 간부학교에서 옮겨온 당안이 마대자루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당안실의 동료는 그를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정리를 마치고 나면, 그는 당안을 집으로 가져가서 필사했다. 이들 '기밀'인 기관당안을 진도수는 1993년 작가협회를 떠날 때까지 계속하여 필사했다.

2003년을 전후하여, 진도수와 양규송(楊奎松)은 모두 항상 북경당안관에서 당안을 조사했다. 몇년 후, 양규송은 왕운생(王芸生)과 <대공보>에서 1949년이후 발생한 변화를 썼고, 진도수는 <중당한화(中堂閑話)>, <염황춘추(炎黃春秋)>에 유평백(兪平伯), 풍우란(馮友蘭)등 유명대학교수들의 1949년이후 받은 사상개조의 시말을 써서 발표했다.

당안관리가 규범화되어 있지 않아서, 당안을 조사하는데에는 '인품'이 필요했다. 진도수는 왕증기(汪曾祺)의 아들 왕랑(王郞)을 인터뷰하고나서 단위에는 이 부분에 관한 자료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북경경극14/69단의 인사당안을 살펴보았다. 이날 천경극단은 악 원로동지가 사망하여, 간부들이 모두 그 일을 처리하러 갔고, 단지 2명의 젊은 여자가 남아 있었다. 취재하러 왔다는 말을 듣자 아주 기뻐하면서 "보세요!"라고 말했다.

굵은 밧줄로 묶어놓은 한 무더기의 허접한 물건의 위에는 붓으로 '왕증기'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 안의 종이는 품질이 좋지 않았고, 규격도 일정하지 않았다. 부책(簿冊)도 있고, 원고지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복사지로 3부를 만들어 놓았다. 진도수는 마치 보물을 얻은 것같았다.

필사를 마친 후에는 당안처의 처장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하는대로 방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십며만자를 진도수는 2,3회 필사했고, 그저 일부를 잘라서 할 수밖에 없었다. <인유병, 천지부>는 왕증기의 '문혁'이후 쓴 반성문등 자료를 인용했는데, 모두 아직 공개한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자료였다. 나중에 진도수가 말해주어서 왕랑이 경극간으로 가서 당안을 달라고 요구했다. 없애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러나 당안처에서 거절당한다: 가족은 볼 수가 없다.

당안의 분류도 체계성이 없었다. 왕왕 글에 제목을 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당안의 목록만 보면 원래 원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진도수는 한때 양사성(梁思成)을 연구했다. 그는 1960년대 양사성의 역대 북경시인민대표대회에서의 발언을 찾아보고 싶었다. 목록에 따르면 아무 것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당안관의 방식은 북경시인민대표대회의 모든 회의발언고를 두터운 하나의 책으로 장정하는 것이다. 진도수는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뒤져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양사성의 일부 발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진도수는 시중의 거의 모든 양사성에 관한 전기를 찾아보았다. 편집도 잘 되어 있고, 팔리기도 많이 팔렸지만, '서로서로 베끼는 바람에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마지막에 강조하는 것은 모두 양사성이 "해방후 어떻게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갔느냐"이다. 진도수는 당안과 구술에서 양사성의 또 다른 일면을 보았고, 그것은 아직까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이었다.

"반우"수기에 양사성도 심하게 바판받았다. 나중에 그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그는 전위장(錢偉長)을 비판하는 회의에서 격렬한 언사를 사용한다: "우리의 정자척(丁字尺)으로 너를 육장(肉醬)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타성육장(打成肉醬)"은 반우시기 공농병의 상용어중 하나였다.

얼마전, 왕극명(王克明)이 진도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고국인민유소사>의 풍우란(馮友蘭)에 관한 부분을 읽은 후 비교적 맞는 말이라고 여긴다. 풍우란은 왕극명의 먼친척이모부이다. 자중균(資中筠)은 진도수에게 풍우란의 딸 풍종박(馮鍾璞)의 비슷한 견해도 전달했다. "풍종박은 눈이 높아서 다른 사람의 글은 인정하지 않는다."

진도수의 풍우란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그의 경력은 표본의 성격이 있다. 그는 계속 투쟁했고, 계속 유리(遊離)되었다. 관건적인 순간에 그는 움츠려 들었고, 영원히 한숨돌리고 다시 살아남았다.

그는 풍우란이 말년에 "양효사작조(梁效寫作組)"에 참가한 것을 이렇게 평가한다: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해 고문(古文)의 주석을 고쳐주었다. 이건 큰 죄악이 아니다. 그러나 결과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역겨운 일로 되었다."

설사 충후한 노사(老舍)도 위험을 피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파' 오조광(吳祖光)이 비판을 당할 때, 노사는 회의에서 동의하는 발언을 여러번 한다. 그러나 사적으로 오조광을 보살펴 주었다. 오조광은 나중에 북대황에서 노동개조를 당하는데, 노사가 오조광의 그림을 사서 돌아와 오조광의 부인 신봉하(新鳳霞)에게 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 나중에 오조광이 글을 써서 노사성생의 사람됨이 아주 좋다고 감탄했다." 진도수가 남방주말 기자에게 한 말이다.

"1964년 문화계에 정풍운동이 벌어진다. 북경시위는 스스로를 보전하고자, 노사를 끄집어 낸다...1966년 8월, 홍색공포가 그 달에 특히 극심했다. 다만 기실 그후 전체 형세는 완화된다. 노사가 만일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진도수는 노사의 자살을 이렇게 이해한다: "1949년이후 그는 고생을 한 적이 없다. 돌연 그렇게 되니 그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들에게 가혹한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저 시대가 아주 황당했을 뿐이다." 지식인은 특수한 시대에 집단적으로 위축된다. 진도수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아름답고 선량한 일면이다.

"심종문(沈從文) 선생이 쓴 <중국고대복식연구>같은 것은 완전히 국가에 대한 존중감에서 쓴 것이다. 그는 비단을 연구했고, 하나하나 직접 만져보았다. 그 책은 그래서 그렇게 두껍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런 직업감을 나는 아주 존경한다. 그리고 노사선생은 화극을 한부 한부 쓰고, 쓰고나면 몇번을 공연했다. 대약진이 지나가자 이들 화극도 지나간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글을 쓰는 열정이 있었다. 그것은 그 시대 지식분자들의 신시대에 대한 열정이었다.

진도수는 항 스스로에게 묻는다: 만일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나는 그들만 못했을 것이다. 만일 사인방이 분쇄되지 않고, 개혁개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그런 같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진도수의 말이다.

진상은 명약관화하다. 진상을 알리는 것은 마치 프로메테우스와 같다. 진도수라는 이 '도굴꾼'은 수십년을 하루같이 당안에서 진상을 파헤쳤따. 목적은 "49년이후 지식분자의 장탄식을 기록하는 것"이다. 역사의 어두운 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지식분자는 천직이 있다. 즉 말하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든 펜으로 말하든. 만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직이다. 만일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독직(瀆職)이다."

그러나, 49년이후, 일련의 배산도해(排山倒海)로 연이어 닥치는 '운동조합권'의 세례하에 지식분자는 이미 그런 결기를 잃어버렸다.

지식분자의 허리는 어떻게 한걸음 한걸음 구부러지게 되었는가? "사상개조", "세뇌"같은 단어는 교과서에서 사라졌고, 가끔 인터넷세계의 귀퉁이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낯선 단어가 되었다. 도대체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식분자는 또한 어떻게 "오늘의 나"와 "어제의 잘못"을 대하고 있을까?

기실, 진도수가 수십년간 쌓아온 자료를 가지고 쓴 저작은 여러 권이 더 있다. 다만 모두가 알고 있는 원인으로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권이다. 그리고, <인유병,천지부>는 여러 풍파가 있었고, '누망지어(漏網之魚)'로 독자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실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감히 정치운동의 근원, 발동자, 죄괴화수(罪魁禍首)를 언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