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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평생 두 가지 큰일을 했다"는 말에 관하여 글: 모원신(毛遠新)(초고 2009. 02, 수정 2024. 02)​모주석이 자신의 "평생 두 가지 큰 일을 했다(一生干了兩件大事)"는 말을 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임종유언이라고까지 말한다.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언제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물어보았지만, 나의 대답은 항상 이러했다: "그 말을 나는 모른다. 1975년 10월 이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선양(瀋陽)에 있었으므로 알지 못한다. 그해 11월이후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석의 곁에서 보냈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진성감옥(秦城監獄)에서 나온 후에 비로소 일부 자료에서 보게 된 것이다."​이 말에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그중 구체적인 시간, 장소, 참가자에 대하여는 다음.. 2024. 7. 7.
"국가의인화": 아주 유해한 사고함정 글: 예인(倪刃)​많은 중국인들은 "국가"라는 개념, 그리고 국제정치를 대할 때 항상 의인화하는 경향이 있다.​먼저, "어머니조국(祖國母親)"이라는 자조 볼 수 있는 칭호도 의인화된 것이다. 당연히 이 말은 우리가 그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그리고 현재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말중에 "의인화유치병(擬人化幼稚病)"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전형이다. 의인화된 사고습관의 배후에는 "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오용(誤用)이 있고, 아주 해로운 사고함정에 빠진 것이다.​예를 들어, 가장 전형적인 표현은 이러하다 -- "국가는 이미 아주 힘들다"​여기에서 국가의 지향성은 아주 모호하다. 다만 사람과 같은 감정을 가진 것으로 대입하고, 또한 "개인이 국가를 골치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포.. 2024. 7. 7.
한경제(漢景帝)는 왜 황태자 유영(劉榮)을 폐위시켰을까? 글: 이대규(李大奎)​서한(西漢)왕조의 황위계승은 대체로 "입적불립서(立嫡不立庶), 입장불립유(立長不立幼)"(적자를 세우고 서자를 세우지 않는다. 장자를 세우고 유자를 세우지 않는다)의 원칙을 유지했다. 이는 중국고대에 명확히 규정된 적장자승계제도이다.​예를 들어 한혜제(漢惠帝) 유영(劉盈)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황후 여치(呂雉) 사이의 적자이다. 유비(劉肥)는 비록 장자이지만 서출이어서 번왕에 책봉되는데 그쳤다. 유방의 서사자(庶四子) 유항(劉恒)이 나중에 유명한 한문제(漢文帝)가 되는데, 이는 완전히 특수한 상황하에서 군공집단의 옹립으로 "형종제급(兄終弟及)"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그러나, 한경제에 이르러 다시 한번 특수한 상황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한경제의 박황후(薄皇后)에게는 아.. 2024. 7. 5.
중국식회의: 소사개대회(小事開大會) 대사개소회(大事開小會) 글: 사도(仕道)​최근 한 은퇴한 간부와 얘기를 나눴는데, 관료사회의 회의문제를 얘기하다가 그가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다. ​작은 일이면 크게 회의를 열고, 큰 일이면 작게 회의를 열며, 특별히 중요한 일이면 회의를 열지 않는다.​자세히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확실히 이치에 맞는다.​지금의 관료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융중하고 참가인원이 많은 회의일수록 회의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반대로 지도자가 사무실에서 조용히 개최하는 소규모회의는 아주 중요하다. 논의하는 의제는 모두 인사, 자금, 프로젝트등 핵심의제들이다.​소그룹이 큰 일을 결정하고, 큰회의는 왕왕 그저 형식에 지나지 않고, 절차에 불과하다. 그저 각본대로 진행하는 편이다. 회의에서 나오는 말이나, 토론하는 의제는 모두 항간에 이미 알려진 공개된.. 2024. 7. 5.
천년고교(千年古橋) 조주광제교(潮州廣濟橋) 글: 증가권(曾柯權)시중에 이런 말이 있다: "조주에 가서 광제교를 가지 않으면, 헛걸음한 것이다(到潮不到橋, 枉費走一遭)" 조주에는 아주 오래된 다리가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천년간 그 자리에 놓여있으면서 여러차레의 중건을 거친 광제교(廣濟橋)는 낙양교(洛陽橋), 노구교(盧溝橋), 조주교(趙州橋)와 더불어 중국사대고교(中國四大古橋)로 불리며, "세계 최초의 개폐식 교량"이라는 영예도 가지고 있다.​천년이나 된 오래된 다리는 그 풍채가 더욱 돋보인다. 지금의 광제교는 개방된 모습으로 사방에서 오는 손님을 즐겁게 맞이하면서, 세계를 향해 조주의 독특한 역사문화이야기를 얘기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계속하여 새로워지고, 새로운 활력과 매력을 발산한다. 역사와 시대가 교차하면서 새로운 생기를 내뿜고.. 2024. 7. 5.
“왜(倭)": 일본인들은 이 칭호를 어떻게 보았을까? 글: 옥미수(玉米穗)​"왜(倭)"는 옛날 중국에서 일본을 부르던 명칭이다. 에는 이 있고, 에도 왜인(倭人)에 관한 기술이 있다. 왜인은 바로 옛날의 일본인이다. 현재의 중국인은 "왜"라는 글자에 대하여 대체로 약간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왜"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명나라때의 "왜구(倭寇)"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키는 작지만 무예는 뛰어나며 흉악하고 악독한 일본낭인이 중국의 연해지구를 돌아다니면서 살인약탈방화를 저지른다. 왜구를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척계광(戚繼光)과 척가군(戚家軍)이다.​현재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왜"라는 명칭으로 일본 혹은 일본인을 부르지 않는다. 가끔 그렇게 부르면 멸시의 의미를 담고 있을 때이다. 마치 "일본"의 앞에 "소"자를 추가하여 ".. 2024. 7. 4.
황궁의 위생상태는 어떠했을까? 글: 독사(读史)​1​TV드라마와 권력에 대한 환상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은 황궁이 거의 천국수준일 것으로 여긴다.설계도 정교하고, 관리제도도 잘 되어 있으며, 정원이나 전각에 먼지 한톨 없이 일년내내 금벽휘황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인터넷에는 심지어 고궁의 처마가 얼마나 정교했었는지, 새들이 앉을 수 없게 만들어 새똥조차 없었다는 전설까지 소개되어 있다.그러나, 실제로 새들은 날다가 변을 본다. 어디든 가고싶은 곳을 날아가기 때문에 황제의 머리 위에서라도 마찬가지로 변을 본다. 사람들은 권력이라는 환상에 눈이 가려졌을 뿐이다. 사람의 일을 다른 동물들에게까지 적용하려고 하지 말라.권력에 의해 왜곡된 상상력을 벗겨버리고나면, 고대황궁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아주 더러웠다.극작가 제여산(齐如山)은 청나.. 2024. 7. 3.
유교(刘交): 유방(刘邦)의 유일한 동생 글: 감당(甘棠)​유방의 부친 유태공(刘太公)에게는 모두 네 명의 아들, 한 명의 딸이 있었다. 그중 유방은 동생 유교와 가장 사이가 좋았다.​유태공은 모두 두 명의 처를 취했는데, 그중 장남 유백(刘伯), 차남 유중(刘仲)은 첫째부인 소생이고, 삼남 유방과 막내아들 유교는 재혼한 부인의 소생이다. ​네 명의 아들을 살펴보면 장남은 요절했고, 차남은 착실하며, 삼남은 무뢰한이고, 막내가 가장 뛰어났다. ​그렇다. 그 당시 유방의 행위나 처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다. 하루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가진 것도 없이 그저 매일 허풍이나 떨었다.​그래서, 처음에 유씨집안에서 가장 기대를 건 것은 막내 유교였다.​유교를 공부시키기 위해 전문적으로 스승을 찾아가 공부하게 한다. 원래 그는 유학자가.. 2024. 7. 1.
중국경제가 막다른 골목에 빠진 근원: 악성내권(恶性内卷), 저가경쟁(低价竞争) 글: 자야관찰(子夜观察)​중국경제를 얘기하자면,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저가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세계 그 어느 다른 나라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심한 "내권(内卷, 영어의 involution을 번역한 말인데,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경쟁적인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가리킴)의 왕"이 되었다.​지금 일런 머스크같은 강자도 비록 기술혁신을 통해 비용을 낮추고, 로켓발사처럼 저가로 전세계를 독보할 것으로 여겼지만, 중국의 비야디등 전기자동차기업과의 거가경쟁에서는 패배하고 말았다. 현재 중국의 자동차기업은 이미 10만위안도 되지 않는 전기자동차를 내놓고 있다. 이는 머스크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했다. 그래서 머스크도 중국기업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중국은 지금까.. 2024. 7. 1.
"김가씨(金佳氏)": 건륭제의 조선인 후궁 글: 삼립신문(三立新闻)​청나라 황제들의 여인은 항상 역사드라마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이다. 특히 건륭제는 그러하다. 후세인들이 잘 알고 있는 몇몇 미인들의 총애다툼이 치열했으며, 또한 후궁들 중에는 한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와서 독특한 매력으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또한 황자까지 낳는다. 그녀는 "김가씨"이다.​조선인 김가씨가 출생한 곳은 현재의 한반도이다. 그녀는 현지의 명문집안출신인데, 고향을 떠난 이유는 주로 청나라건립초기, 김가씨의 가족에 일찌감치 청나라에 투항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충성심을 인정받았고, 조정의 주목을 받아 가족의 여성이 청나라의 궁중체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옹정5년(1727년), 감가씨는 단지 소업이었고, 청나라황실의 법도내에서는 지위가 비교.. 2024.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