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袁世凱) 칭제(稱帝) 막후의 몇몇 추동자들...

중은우시 2024. 11. 13. 17:11

글: 소전유(蘇全有)

1915년 12월 12일, 원세개는 소위 민중권진서(民衆勸進書)를 받아들여, 등극을 선포한다. 역사에서 홍헌황제(洪憲皇帝)라고 불리게 된다. 1916년 3월 22일, 원세개는 어쩔 수 없이 하야한다. 이렇게 83일간의 황제생활은 끝이 난다. 그리고 6월 6일 요독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원세개는 모략이 비범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왜 그가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역사의 조류를 거슬러 황제에 올랐을까? 여기에는 원세개 본인의 원인외에 나머지 몇 사람이 막후에서 부추긴 것도 있었다. 그 요소를 분석해보지 않을 수 없다.

원세개는 임종전에 힘들여 네 글자를 내뱉는다: "그가 나를 해쳤다(他害了我)". 그렇다면 여기의 "그(他)"는 도대체 누구일까?

원씨가족들은 원세개가 죽기 전에 말한 "그가 나를 해쳤다"는 말의 "그"는 아마도 그의 아들 원극정(袁克定)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세개의 사후, 원극정은 영구앞에서 머리를 관에 들이받으면서 방성대곡했다: "아버지! 아버지! 죄송합니다!" 원극정의 곡소리는 그가 부친이 칭제하도록 부추긴 것과 관련이 있다.

원극정이 부친에게 칭제하도록 주장한 것은 그렇게 해야 그가 황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세개에게는 1처9첩이 있고, 17명의 아들, 15명의 딸이 있었다. 원극정은 원세개의 장남이고, 유일한 적출(嫡出)이다. 원세개는 원극정을 몹시 아꼈고,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는 그의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아명은 "계광(繼光)"인데, "계광"의 뜻은 원세개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우리 선인의 영광을 계승하는 것(繼吾先人之光也)"이다. 원세개가 신경써서 배양했기 때문에, 원극정은 구학에 대한 학식도 두터웠고, 독일어와 영어도 상당히 잘했다. 원세개가 서양인과 교류할 때, 자주 원극정에게 통역을 맡겼다. 그의 서재에는 독일어와 영어원서가 가득했다. 그리하여 원극정은 포부가 있었고, 신해혁명후 극력 황제에 오를 것을 주장했다. 이를 위애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썼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그의 부친에게 <순천시보(順天時報)>를 위조하여 보여준 것이다.

<순천시보>는 일본인이 북경에서 발행한 신문이다. 제1차세계대전기간에 열강은 동쪽의 아시아까지 신경쓸 수 없어서, 원세개는 일본의 태도를 크게 주목하고 있었다. <순천시보>는 원세개에게 중요한 소식원이었다. 이 신문은 자주 황제제에 대한 불리한 소식을 실었기 때문에, 원극정은 아이디어를 내서, 만천과해(瞞天過海), 투량환주(偸梁換柱)를 결심한다. 자신이 돈을 내서 <순천일보> 가짜판을 만들고, 자주 황제제를 주장하는 글을 싣는다. 원세개는 이를 본 후, 아주 기뻐한다. 그는 일본측에도 문제가 없겠다고 여기게 되어 황제를 칭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종이로는 끝까지 불을 감싸서 감춰줄 수 없다. 사후에 원세개에게 들통이 난다. 원세개는 원극정을 불러서 상황을 물어보고 크게 분노한다. 원극정은 급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으며, 원세개는 가죽채찍을 들어 내려친다. 그는 채찍질을 하면서 욕을 했다. "얼자(孼子)! 기부오국(欺父誤國, 부친을 속이고 나라를 망쳤다)!"

원세개의 칭제에는 "주안회(籌安會)"의 "육군자(六君子)", "십삼태보(十三太保)"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육군자"는 양도(楊度), 손육균(孫毓筠), 이섭화(李燮和), 유사배(劉師培), 호영(胡瑛), 엄복(嚴復)이다. 이들은 1915년 8월 14일 "주안회"를 발기설립하여, 양도를 이사장, 손육균을 부이사장으로 하여 황제제를 고취시킨다. "육군자"에 양사이(梁士詒), 장진방(張鎭芳)등 7명을 합하여 "십삼태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세개가 임종시에 이렇게 원망했다: "양도가 나를 망쳤다(楊度誤我)". 양고는 바로 '십삼태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1915년 4월, 양도는 원세개의 황제등극을 위한 2만여자의 <군헌구국론(君憲救國論)>을 써서 원세개에게 올린다. 원세개는 이를 높이 평가하여, 5월말 특별히 친필로 "광대일재(曠代逸才)"라는 네 글자 편액를 써서 양도에게 하사한다.

양도를 제외한 십삼태보중에서 또 다른 중요인물은 양사이이다. 양사이는 속칭 재신(財神)이다. 민국시기 총통부비서장, 철로총국국장, 교통은행총리등을 지내며, 교통분야에서 가장 힘있는 인물이다. 처음에 양사이는 황제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원세개는 일찌기 14번 양사이에게 황제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양사이는 모두 모르는 척했다. 오직 한번 원세개에게 직접적으로 말한다: "지금 대총통의 권력은 각국의 군주보다 큽니다. 다른 점이라면 자손에게 계승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승권은 바로 자손후대에 해가 됩니다. 역대제왕중 누가 청나라처럼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습니까?" 그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원세개, 원극정은 교통분야를 손보기 시작한다. 하루는 원극정이 양사이를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황제제로 바꾸려는데 도와줄 것이냐 말 것이냐?" 양사이는 "조금 생각해보고 나서 답변드려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돌아가서 교통분야의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연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명확히 얘기한다; 찬성하면 얼굴(체면)이 없어지고, 반대하면 머리가 없어진다. 가죽이 없어지면 터럭이 어디에 붙어있겠는가? 그들이 토론한 결과는 모두 찬성하여 머리를 남기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안하면 모르지만 한다면 철저히 하자. 다음 날, 양사이는 원극정에게 전력을 다하여 돕겠다고 표시한다. 그리고 필요한 돈은 모두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황제제로 가는 노선도를 제공한다. 원극정은 크게 기뻐했다.

원세개의 칭제에 추동작용을 한 사람은 또 여러 명이 있다. 예를 들어,

진환(陳宦). 1915년 11월 진환은 사천도독으로 임명된다. 부임하러 북경을 떠나기 전에 땅바닥에 엎드려 삼궤구고의 예를 올리며 무릎걸음으로 원세개에게 다가가 발에 코를 대면서 크게 소리친다: "대총통께서 내년까지도 등극하지 않으시면, 저 환신은 이번에 떠나서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진환은 북양의 장령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그저 큰형님이 황제가 되는 것이고, 그러면 동생은 장군이 되는 것이다. 양도도 말한 바 있다: 북양의 여러 장수는 공을 따른지 여러 해가 되었고, 그들이 하는 일은 그저 반룡부봉(攀龍附鳳)하는 것이고, 자손의 부귀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만일 총통께서 망설이고 결정하지 않으시면, 여러 장수들은 어떡합니까? 그가 말한 것이 바로 이런 이치이다. 원세개는 1915년 12월 칭제후, 전환을 일등후(一等侯)로 봉한다. 그러나 다음해, 진환은 다시 원세개에게 퇴위를 권하고 사천독립을 선언한다. 이는 원세개칭제가 실패한 주요원인중 하나가 된다.

염석산(閻錫山). 산서(山西)의 염석산은 비록 동맹회원이지만, 황제제기간동은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극력 찬동한다. 그는 자신의 부친 염서당(閻書堂)을 북경으로 보내 거처하게 한다. 표면적으로는 오르신에게 북경구경을 시켜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부친을 인질로 보낸 것이다. 그렇게 원세개의 환심을 산다. 1915년 4월 원세개가 3번 그를 불러 만난다. 그중 한번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이 일을 얘기할 때마다 얼굴색이 변하고,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일생동안 많은 중국의 국가원수들을 만나보았다. 예를 들어, 손중산, 여원홍, 서세창, 풍국장, 조곤, 심지어 장훈, 단기서 및 장개석등등. 그 어느 누구도 원세개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사람을 몰아세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감히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장작림(張作霖). 장작림은 맹세하여 말했다: 산해관바깥에 무슨 이상이 있으면 저 장작림 한사람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제 한 몸으로 막겠습니다. 산해관안에 만일 반대자가 있으면 저 작림이 부대를 이끌고 와서 평정하겠습니다.

굿나우(Frank Johnson Goodnow, 古德諾)박사. 1915년 7월, 홉킨스대학 총장인 굿나우박사가 중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8월 20일 <공화및군주론>을 발표한다. 그는 중국은 백성들의 지력이 낮으므로, 군주입헌을 실행하는 것이 좋고, 공화를 실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 굿나우의 방중기간, 원극정이 그를 접대했다. 그의 말에 원세개에게 크게 고무되었다.

일본공사 히오키 에키(日置益), 영국공사 조단(John Newell Jordan, 朱爾典)등은 황제제에 대한 동의를 표시한다. 1915년 1월 18일, 일본공사 히오키 에키는 원세개에게 <21조>를 내밀 때 이렇게 말한다: "만일 성의있게 교섭하면, 일본은 귀 총통이 한단계 더 올라가시기를 희망합니다." 조단은 중남해 회인당에서 국연을 개최했을 때, 영어로 원세개에 대해 "폐하"라고 칭한다.

이를 보면 원세개가 황제를 칭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의 원인도 있지만, 객관적인 조건도 있었다. 이것이 합쳐서 결국 83일간의 황제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원세개에 있어서 인생의 최전성기이지만, 동시에 그의 사업과 생명은 이로 인하여 돌연 끝장나게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