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 모친장례문제: 형제간에 원수가 되다.

중은우시 2018. 2. 26. 11:25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는 효자였다. 1892년 모친 유씨(劉氏)를 데리고 조선에 부임한다. 갑오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야 사람을 시켜 모친을 중국으로 돌려보낸다. 1901년 6월 <신축조약>의 협상이 한창 진행중일 때, 유씨가 사망한다. 원칙대로라면, 원세개는 관직을 떠나 정우(丁憂)를 신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는 몸을 빼기 어려웠고, 결국 승인을 받지 못한다.


1902년 6월, 정부는 원세개에게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임명한다. 그에게는 이것 말고도 여러가지 중앙정부의 직위가 더해진다. 9월, 서태후는 원세개의 생모 유씨에게 1품의 봉전을 내리고 3000냥의 은을 상으로 하사하며 40일간의 휴가를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 모친상을 지내도록 허가한다.


이때의 원세개는 중천에 뜬 해처럼 잘 나갔다. 그러나 그의 적모(嫡母) 소생의 두 형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냉대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너는 바깥에서는 국가의 고위관리인지 몰라도, 집에서는 첩 소생의 자식이다. 장례는 당연히 집안법도에 따라 해야 한다." 집안법도에 따른다면, 처가 높고 첩은 낮다. 결국 원세개의 모친은 서첩(庶妾)이므로 죽은 후에도 조상묘의 정혈(正穴)에 묻힐 수 없고, 적처(嫡妻)와 같은 관을 두어 묻힐 수도 없고, 선영의 바깥(塋外)에 묻을 수밖에 없다.


이때의 원세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인물이지만, 모친의 장례를 치르른데서는 부득이 큰형인 원세돈(袁世敦)과 상의해야 해서, 여러번 그와 협의를 한다. 예외를 인정해달라고. 그러나 형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고, 더더구나 상복도 입지 않고 홍포(紅袍, 경사때 입는 옷)를 입고 있었다. 이는 원세개에게 큰 상처를 준다. 형제는 이렇게하여 반목하고 원수가 된다. 그러나 모친에 대한 부분에서는 원세개도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원세돈의 저지는 오히려 원세개의 반발을 불러온다. 그는 오히려 장례를 더욱 거창하게 치러서 첩 출신인 모친이 마지막을 빛내주고자 한다. 원세개는 원채(袁寨)의 동북 15리지점ㅢ 홍가와(洪家洼)를 새 묘지로 선정한다. 점유면적은 경작지 120무(畝, 1무는 667평방미터, 우리나라의 200평에 해당함)이고, 분원(墳園)은 40무이다. 새로 사합원(四合院) 기와집 십수칸을 지어 묘지기가 상주하도록 한다. 주파(主坡) 40무, 영문앞의 점유면적이 40무이며 여기에 패방(牌坊)을 세우고, 14개의 석비, 석인, 석마를 두 줄로 세운다.


업무장소를 3곳에 설치한다. 하나는 옛집인 원채인데, 여기서는 장례업무를 처리했다. 하나는 원장영(袁張營) 대수부(大帥府)인데, 영당(靈堂)을 크게 만들어 놓고, 고관대작들의 조문을 받는다. 하나는 홍가와묘지로 안장제사건을 처리했다. 조문을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인산인해를 이룬다.


원세개의 집에서는 밤낮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한번에 200여개의 식탁을 차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우물물까지도 다 말라버렸을 정도라고 한다. 부근에 있던 하남 고향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조정에 감사하고, 태후에 감사하고, 원관보에 감사한다. 평생 이렇게 큰 행사는 본 적이 없다. 효자 원세개가 8명이 드는 방탁에 앉아서 손님을 접대하던 장면은 그들에게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